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유행은 역사상 처음으로 전세계인구 70억중 약 40억명의 경제활동을 제약하는 전대미문의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생산활동의 유래 없는 제한으로 인하여 대공황의 공포도 언급되는 상황이다. 유가가 마이너스 30달러를 기록하고, 전문가들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바닥이 났다고 말하는 최근 상황은 오히려 과거의 경험에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러한 차원에서 이번호 부터 총 4회 연속으로 ‘세계를 뒤흔든 경제위기’시리즈를 기획했다. 첫 편으로 석유 수출의 중단으로 갑자기 실물경제 위기를 맞이한 1973년 오일 쇼크 때의 경제 충격과 극복 과정을 살펴보았다.
4차 중동전쟁으로 시작된 1973년 오일쇼크
2020년 코로나-19의 유행으로 인하여 세계경제가 마비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1973년 겨울부터 1974년 상반기 내내, 지금의 코로나 사태처럼 외부요인으로 인하여 경제활동이 마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게 바로 1차 오일쇼크다.
이 위기는 1973년 10월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욤키푸르 전쟁으로 일컷는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 시작된다. 전세가 이스라엘에게 불리해지자 미국은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하였고, 친아랍국가로 분류되던 영국, 프랑스 등의 유럽국가들과 이스라엘을 외교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자, 아랍국가들은 아랍의 석유수출국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과 네덜란드에 대한 석유 선적을 중단하였고 동시에 타 회원국에게는 선적 양을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특히 12월 9일 아랍국가 석유장관회의에서 석유수출 금지국을 포르투갈, 로디지아(짐바브웨) 남아공으로 확대하고, 1974년 1월 인도분의 5%추가 감산을 합의하고 그리고 이듬해 1월 석유값이 원유 가격은 배럴당 3달러에서 12달러까지 치솟았는데, 지금은 별거 아닌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의 가치로는 30년 내내 배럴당 20달러선에서 유지되었던 석유가격이 하루아침에 50달러 수준으로 상승한 수준으로써 석유생산기구(OPEC)이 4월까지 배럴당 12달러 수준으로 동결하기로 결정하면서 서구경제에 본격적인 타격을 주기 시작한다.
석유 공급이 끊어지다
석유는 범용성은 엄청나다. 범용성이 많은 자원이다. 단지 연료뿐만 아니라 도로에 쓰이는 아스팔트, 플라스틱 제조, 화학 물질 제조 등 여러 가지 분야에서도 쓰이는데다가 석유에서 추출되는 정제물은 교통수단에 많이 사용되고, 특히 전기발전과 기계운영에 석유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상품이다. 지금도 석유에 대한 의존율이 높은 상황이었는데, 1973년에는 더 했다. 당시 주요선진국의 대부분은 화력발전소의존율이 높았고,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은 석유화력발전의존율이 매우 높은 상황이었다. 특히 유가가 30년간 1달러~3달러 수준에서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당연한 연비절감 기술은 없었으며 에너지 효율성 보다는 감성적인 요소 멋, 엔진출력 이런 요소에만 신경을 쓰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환경규제는 적용이 안되어서 연료사용의 비효율성이 심하던 시대였다. 오히려 지금보다 석유 의존도가 높은 시대에, 석유가 공급되지 않게 된 것이다. 이 결과 현재 코로나 위기와 비교한다면 심각성은 다르지만, 심리적인 쇼크는 본질적으로 같았다.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 공급이 외부요인으로 인하여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된 것이다.
평균 20% 이상의 물가상승과 전력난
1974년 1월 1일은 여느 새해처럼 서구권에서는 신년파티와 함께 조용히 지나가는 것으로 보였지만, 영국에서는 신년이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주 3회 전력제한 공급이 시작된다. 2020년 코로나위기에서는 오히려 물자공급을 중요히 여기고 있고, 석유가격이 하락하고 있어 상상할 수 없는 조치지만. 1974년 영국 상업용 전기사업자는 주 3회 사용일을 선택하여야 했고, 모든 사무실, 공장의 생산활동이 주 3회로 제한되었다. 당시의 조치는 석유 금수조치와 동시에 발생한 광부파업으로 인하여 석유를 대체할 석탄마저 부족해지자 시작한 조치였다. 한편 아랍국가의 전면 금수국가로 선정된 네덜란드에서는 전력공급의 배급제가 시작되었고, 배당된 전력 이상을 사용하게 되면 징역형을 선고할 정도로 경제비상정책을 강화한다. 또한 석유비축량의 보존을 위하여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노르웨이에서는 일요일 운전, 비행기 운행, 페리 운항을 전부 금지시켰고, 그 해 겨울을 견디기 위하여 스웨덴에서는 난방용 연료를 배급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에서도 석유배급을 시작했고, 또한 유럽 각국에서는 에너지 사용규제가 각주당 실행되기 시작한다. 3개월정도 절정에 치닫는 유가 위기는 1974년 4월에 종료가 되지만,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당시의 장기 침체는 경제 성장률로 확인 할 수 있는데, 평균 1948년 이후 평균 4%, 2%대성장률을 보였던 미국과 영국은 74년, 75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하였고, 심지어 당시 연평균 10%대 고도성장기를 보내고 있던 일본도 74년 처음으로 마이너스 1.23%의 성장률을 기록하여 당시 위기의 심리적 강도가 상당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 세계 경제도 이러한 상황에 영향을 받으면서 1948년부터 1973년 평균 5% 성장률을 보였지만, 1974년에는 2%성장률을 기록하고, 1975년에는 0.6%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즉 오일쇼크는 고도성장기를 보내고 있던 당시 세계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가한 것이었다. 아울러 1974년 당시 가격 12달러(현재가치 50달러) 정도로 올라간 유가는 1979년2차 오일 쇼크 때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되게 된다. 즉 석유는 공급되기 시작했지만, 가격은 그대로 유지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이 당시 물가 상승률이다, 1973년 미국을 기준으로 보면 최소 4%-최대 6%대로 유지되던 물가상승률이 1974년 이후로는 6%-9%대로 상승하는 것을 볼 수 있고, 특히 영국은 물가상승률이 심각해졌는데, 평균 6%-9%대 였던 물가상승률이 1973년 이후 16%-24%정도 수준으로 높아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러한 물가상승률의 원인은 우선 1973년 이전 수준의 생산력을 회복하지 못하는 가운데, 당시 기조는 실업률을 최소화 하는 것을 최우선과제로 하여, 불필요 인력이 지속적으로 고용되는 상황에서, 원가 가격이 이전에 비하여 상승되었기 떄문에 생산비용의 증가가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스태그플레이션은 서구사회의 노동계약 구조를 추후에 근본적으로 바꾸게 되는 원인이 된다.
즉 해고가 어려웠던 2차대전 이후의 케인지언 경제운영방식에서, 유연 노동제를 도입하고, 해고를 전반적 경기에 따라 용이하게 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게 된다.
뉴욕은 살아야 했고, 결국 1억 5천만 달러 규모의 채권을 발행하였다. 이로써 1975년 10월 16일 뉴욕시는 가까스로 파산을 면한다. 그러나 본 채권은 금융가에서 2번이나 구매를 거절당한 후 조건부로 겨우겨우 은행에서 사들인 채권이었다. 은행들의 조건이란 것은 다음과 같았다. 시 재정위원회에 은행 채권단 대표를 선임하는 조건이었다. 이 사건은 별거 아닌것으로 보이지만, 패러다임 전환의 사건이었다. 1975년 이전의 경제와 정치는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었다, 특히 금융분야는 지금과 같이 경제를 선도하는 수준은 아니었고, 금융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봉급은 생각보다 낮은 편이었고, 당시 미국 평균 농장주의 소득과 비슷한 수준인 연평균 3만달러에서~5만 달러 수준이었다.
1945년 이후의 경제는 물가 통제보다는 실업률 통제가 중요하였고, 그러기 위하여 대규모 제조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돌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융업은 산업의 지원역할에 충실하였고, 은행, 증권, 그 외 종합금융 서비스는 철저히 분리된 영역이었다. 그러나 1975년 뉴욕 파산위기는 금융업의 위상을 바꾸어 놓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금융이 시에 돈을 제공함으로써, 정치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리에 오르게 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지금은 익숙한 정리해고, 긴축이라는 단어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경제의 금융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즉 수익이 중요시 되고, 수익성 확보를 위해서는 구조조정이 일상화 되는 경제운영이 열리게 된 것이다.
또한 금융계가 뉴욕시를 접수하면서, 금융계의 위상도 달라지게 된다. 금융계가 뉴욕시를 접수한지 6년후 기존 산업계, 통상전문가가 장관직을 맡던 재무장관 보직이 메릴린치 은행 출신의 금융전문가 도날드 리건(Donald Regan)이 임명되면서 처음으로 금융계 출신이 미 연방정부 장관자리에 임명되게 되면서 금관유착정치의 시작이자, 금융적인 운영이 경제운영에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열리게 된다. 위에서 말한 경제의 금융화는 필연적으로 노동의 유연화가 필수조건 중 하나다. 왜냐하면 자본 수익을 증가시킬려면 비용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1970년대의 인플레이션 문제는 서구권에서도 10%대를 보였을 정도로 심각했었고, 제 3세계에서는 적어도 30%대, 남미 지역같이 거시경제운영에 심각한 문제는 보이는 지역은 100%대 이상을 보일정도로 고용유지를 위한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매우 심각한 실정이었다. 이것은 오일쇼크의 단기적 영향인 생산력 약화와, 고용 유지라는 정치적 목표가 중첩되면서 발생한 이중고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융계가 경제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경제난을 타계하기 위하여 경제의 우선순위가 변경되는데, 기존의 케인즈주의 경제에서 중요시하던 고용과 투자라는 관점에서, 생산력과 물가상승 방지라는 목표로 바뀌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 고용과 정부투자를 유지하기 위한 세율이 높았고, 오랜 기간의 경제난으로 인하여 미국 캘리포니아, 영국을 중심으로 세금으로 인한 민심이반이 심각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부터 노동의 유연화가 경제난을 타계하기 위한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초창기에는 공공부분 지출 삭감으로 시작된 노동유연화는 산업 구조조정으로 70년대 말 부터 바뀌기 시작한다. 궁극적으로 미국과 서구선진국은 노동유연화를 통한 경제구조개혁으로 제조업의 몰락이 가속화되고, 서비스업 경제로 전환된다.
우리는 지금은 잊혀진 1973년 위기에서 2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한가지는 실물 경제의 위기는 상황이 종료되면 다시 예전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과, 위기가 종료된 후 발생하는 여파가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오일쇼크로 인하여, 서구선진 경제권의 경제운영은 산업중심에서 금융중심으로 재편되었고 기존의 고용유지 중심의 경제운영에서 물가통제 중심으로 운영이 바뀌게 되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 금융위기가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어느 정도 막으면 예전처럼 다시 돌아가는 것은 쉽지만, 실물경제의 붕괴는 경제의 뿌리가 망가지는 것이기에 경제 운영패러다임이 바뀌게 된다는 점이다.
1929년 세계대공황은 이전에 자유방임 경제에서, 정부투자와 실업률을 낮추는데 중점을 둔 케인즈 주의적인 경제로의 전환을 불러왔고, 1973년 오일쇼크는 케인즈주의 경제에서 복지를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물가안정과 금융적 경제관리에 중점을 둔 신 자유주의 경제로의 전환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현재 코로나 경제위기가 실물 경제위기라면, 이후의 경제운영 패러다임도 이런 방식으로 전환될 것이 분명하다.
또한 1973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실물경제위기시에는 오일쇼크나, 지금의 코로라 사태처럼 위기가 진행되는 상황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위기가 끝나고 그 이후의 후유증이 훨씬 더 큰 영향이 있고, 그때부터 살아날 비즈니스와 죽을 비즈니스가 가려진다는 점이다. 특히 민주주의 국가들이 기본적인 이동권과 참정권까지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는 선례를 만들었는지라, 정치체계내의 불확실성은 1973년과 다르게 매우 증대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973년 위기에서 석유값이 이전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았듯이, 이번 코로나 사태 이후 우리가 예측하는 대로 원자재 및 생산 가격이 회복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는 게 현재 상황이다. 1973년 1차 오일쇼크는 2020년 4월을 사는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다.
“위기는 아직 시작도 안 되었다”.
글. 한성훈 kosdaq6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