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새 아침의 기도

설을 맞을 때마다 생각하는데 과연 새해의 시작을 언제로 봐야 하는 거지 하며 새삼스럽게 답 없는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이번에는 새해를 맞은 지 한 달도 안돼서 설이라고 하니 마치 환갑 진갑 다 보내고 껍질만 남은 기분입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참 이렇게 시간이 빨라도 되는 건가요? 요즘 세상의 변화가 빨라져서 시간도 그에 맞게 속도를 높인 건지 모르겠네요. 이런 저런 엉뚱한 생각으로 글을 시작합니다.

오랜만에 설 연휴를 베트남에서 보냅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이 뗏이라는 명절이 어떤 의미인가는, 이 시간에 베트남 최대의 도시인 호찌민이나 하노이에서 지내보시면 알 듯 합니다. 평소에 그 복잡하던 거리가 텅 비어있습니다. 더구나 올해, 2020이라는 숫자는 영화의 제목으로 써도 될 것같이 상징적입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텅 빈 도시만 덩그러니 남아있던 SF영화의 한 장면같이 사람들이 일시에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갑자기 넓어진 거리에는 늘 요란하게 넘치던 오토바이 소리도 사라지고, 길게 물고 다니던 범프 꼬리가 사라진 자동차들이 한가한 도로를 제법 속도를 내며 달립니다. 아침시간에는 늘 운동하는 사람들로 활기 넘치던 공원에도 이제는 남국 특유의 화려한 컬러로 치장한 이름 모를 들새들이 오랜만에 돌려 받은 자연의 정취를 한가롭게 즐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가하게 베트남의 새해가 시작됩니다.
그러고 보니 이 베트남은 나름대로 운치가 살아있는 곳인 듯싶습니다. 삶이 그리 각박해 보이지 않습니다. 뭔가 한가롭고 여유가 남아있는 곳인 듯합니다.
기본적으로 치열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의 정서와는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인가, 이곳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이곳의 삶이 나의 것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그저, 숨 막히게 몰아치던 삶의 무게를 피해, 슬며시 물러나 잠시 머무는 익명의 땅인 듯싶습니다. 늘 여유 없이 허덕이던 한국이지만, 지울 수 없는 운명이 각인된 땅인 탓인지, 이렇게 삶을 저울질 하는 시간이 되면 늘 어딘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듯이 고향 땅이 맞닿은 먼 하늘을 바라보곤 합니다.
각박한 한국이 뭐가 좋다고.
한국인의 치열한 삶은 문학작품에서 흔히 드러납니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에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유치환 선생의 <생명의 서(書)> 라는 시의 한 구절입니다.
‘병든 나무처럼 생명에 부대낄 때’,
그 씻기지 않은 곤군함, 현실에 치인 지식인이 갖는 삶의 아픔이 온몸에 스며듭니다. 고갈된 에너지로 불이 가물대는 백열전등 같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에너지를 찾아 머나먼 익명의 땅으로 소리 없이 떠납니다.
아마도 많은 한국분들이 이런 이유로, 기진한 삶에 신선한 원기를 불어 넣고자, 머나먼 아라비아 사막 대신 베트남을 찾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새로운 곳에서 꾸려가는 또 다른 삶, 상상만 해도 막연한 기대로 가슴이 설레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 이렇게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 이유의 근간에는 혹시 과거의 삶에 대한 회의가 작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잠시 잊었던 냉정한 현실이 선뜻 다가섭니다. 결코 채우지 못한 현재의 삶을 미래의 꿈으로 덮고 싶어서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선 것은 아닐까요?
사실 그렇습니다, 스스로의 생각으로 베트남을 찾은 모든 사람들은 현재보다 나은 미래의 행복을 기대하는, 동병상련의 꿈을 안고 들어온 것입니다.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적어도 다른 선택을 시도할 만큼 채우지 못한 부분을 가졌다는 점에서 우리는 동격입니다.

일단, 이곳 베트남으로 삶이 터전을 옮겨오신 모든 한국 분들, 그 용기에 존경을 표합니다. 대단한 선택을 하신 것이지요.
로버트 프로스트의 유명한 시, <가지 않은 길>에서 나온 싯귀와 같이, 그대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택해 이 베트남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삶이 펼쳐집니다. 그야말로 흥미진진 하지 않은가요?
그러나 우리의 삶의 노정에는 많은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지요. 특히 이국에서의 삶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니 천천히 가세요. 돌아갈 수 없는 삶에서 남들보다 빨리 갈 수 있다는 지름길은 그저 유혹에 불과합니다.
인생이란, 자신이 스스로 그려가면서도 어떤 모습이 나올지 모르는 그림이라고 합니다. 특히 이국의 삶은 더욱 그러하리라 생각됩니다. 진짜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이국의 땅, 베트남의 삶을 위해 준비할 일이 있습니다. 자신이 그리는 캠퍼스 위의 종이를 가능한 비워두어야 합니다. 이미 검은색으로 가득 채워있다면 어떤 그림도 생겨나지 않을 테고, 짙은 바탕도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에 제약이 생깁니다. 그러니 너무 짙은 색을 처음부터 들지 마세요. 어떤 색이든지 우리가 이국의 땅을 찾아온 목적, ‘좀 더 가까운 행복’에 부합하는 색을 찾아야 합니다. 이름하여 ‘행복의 색’이라고 부릅니다. 행복의 색이란 어떤 것인가요?
모든 행복은 사랑을 먹고 삽니다.
세상 모든 것, 세상 모든 이를 다 사랑할 수 있다면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요?
그런데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예수님이 되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그래도 우리 같은 범인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만능의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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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이 아닌, 미소입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담긴 따뜻한 미소입니다.
어쩌면 언제나 심각한 우리 한국인에게는 가장 낯선 일일 수 있지만, 잠시 고개만 들어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쉬운 방법입니다.
따뜻한 미소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미소는 분노, 미움, 짜증, 증오, 시기, 질시 등 부정적인 감정과 양립하지 않습니다.
미소와 동행할 수 있는 감정은 사랑, 평화, 온화, 은혜, 기쁨 등 오직 행복을 부르는 감정뿐입니다.
그래서 행복의 색은 바로 미소입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며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낯선 이에게 환한 미소로 굿모닝을 던져보세요. 스스로 하루가 밝아짐을 느끼실 겁니다. 또한 직장에서도 베트남 사람들의 미숙함을 따뜻한 미소로 안을 수만 있다면, 그대는 이곳에서 이미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주변에 누군가 늘 미소를 짓고 살아가는 분이 있다면, 그분과 가능한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것도 행복을 찾아가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행복의 전염성은 중국의 우한폐렴보다 훨씬 높습니다.

새해에는 이렇게 늘 따뜻한 미소와 함께 하기를,
오늘, 새 아침의 기도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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