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짜오베트남에 기고한 칼럼 중 ‘열정은 감동을 부른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소개한 사람이 있다. 알리 엘 샤예드, 수단 알아자리 대학교 총장이다. 그와의 다른 일화를 먼저 소개하자.
수단에서 코이카 원조를 위한 조사업무를 마치고 만찬자리에서의 일이다. 그는 열흘 간의 우리의 수고를 치하하며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그는 내게 대뜸 A그룹은 어떠냐며 회장과 그 기업의 근황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이유를 물어보았다. 답 하기를 자기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그 회사를 통해 알았다는 것이다. 그룹 총수의 몰락과 더불어 당시 국내에 부정적인 재벌의 이미지가 컷던 A그룹이었지만 알리 총장에게는 수단 시장을 개척하는 한국 기업의 상징, 나아가 한국이라는 국가의 대표 이미지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사실 조사 기간 동안 느낀 일이지만 이 아프리카 북부의 도시에는 A그룹의 색깔이 여기저기 칠해져 있었다. 비록 색은 희미해지고 그 위로 중국 기업들이 무서운 기세로 쏟아 들어오고 있었지만 알리 총장이 여전히 느끼는 것처럼 A그룹이 남긴 족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비록 A그룹의 위세가 꺾였다 하더라도 그들이 닦은 길 위로 우리 기업들이 밀려들어갔다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조사 당시에 한국의 B그룹, C전자가 그 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망할 일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그 때 알리 총장에게서 받은 호의 중의 일부는 내가 한 번 만나보지도 알지도 못한 A그룹 사람들 덕이다. 감사할 뿐 아니라 놀랍지 않은가? 당시의 내가 그들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이는 환경과 세월을 다르게 살았지만 나와 A그룹이 한 역사의 토대 위에 ‘우리’로 이어져 있다는 반증이다.
난 87년에 입대해 89년에 전역한 팔팔 꿈나무였다. 군사적으로도 중요했던 시기이다 보니 복무한 세 해 동안 변화도 많아 세 명의 사단장이 취임과 이임을 반복했다. 사단에서 복무하다 보니 취임식 때마다 참석해 연설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 묘한 것을 발견했다. 취임하는 사단장마다 ‘이것을 이룰 것이다’라는 각오와 비전은 있는데 ‘전임 사단장의 비전을 이어’라는 표현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전임들이 한결같이 잘못된 비전을 가졌기 때문일까? 그들이 추진했던 일들이 실패였기 때문일까? 그 덕에 3년 내내 우리는 새로운 비전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들이 하나의 역사 위에 ‘우리’로 이어져 있다는 인식이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개화기에 민족각성과 민중교육에 대한 선교사들과 교회의 역할은 눈부셨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교회는 신사참배라는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전자는 ‘나’의 역사이고 후자는 ‘너’의 문제일까? 모두 한국 교회의 일이다. 이런 일을 모두 ‘우리’의 일로 바라봄으로써 정말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기 반성과 결단을 세울 수 있고, 분열과 반목의 경험을 통해 양보하고 격려하는 현재의 소중함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가? 그러므로 실패와 상처의 과거는 신이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과거의 오욕조차도 현재의 값진 열매를 내기 위한 거름이 된다.
수단의 A그룹도, 군에서의 경험도, 그리고 한국 교회에 대한 역사인식도 동일한 코드 속에서 인식할 수 있다. 우리의 현재가 갑자기 어디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지내온 과거의 터 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때때로 과거가 수치스러울 수도, 욕될 수도 있으나 그것이 없었다면 우리의 현재도 없을 뿐 아니라 그를 극복하고자 하는 현재의 의지도 존재할 수 없다. 한때 근현대사를 잘못된 역사로 규정하고 ‘진실 규명’이라는 기치아래 여러 일들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 맞다.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옳고 그름이 분별되어야 하고 그 사이에 억울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최종 목적은 ‘화해’와 ‘화합’이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잘 다루지 못하면 ‘분노’와 ‘보복’이 개입하고 금방 ‘파괴’와 ‘분열’의 종착역으로 폭주하기 일쑤라는 것을 쉽게 목격해 왔다. 왜 파괴되는가? 부정하는 대상이 ‘너’인 줄 알았는데 그 ‘너’가 ‘나’와 뿌리를 같이하는 ‘우리’이기에 그렇다. 역사의 새 탑도 과거의 터 위에 쌓아가는 것이기에 그렇다.
새로 출발한 한인회, 숙제가 많다.
한인회장 선거가 끝났다. 그동안 한인회로 인해 얼마나 피곤했는가? 그러므로 이번 한인회는 숙제가 많다. 돌려 말해 우리 교민 ‘절대 소수’의 지지를 받고 선출되었으니 그 책임이 오히려 막중하다. 고개를 돌린 많은 교민들의 마음을 풀어주어야 한다. 과정에 미숙함이 보였지만 경쟁 후보의 패배 인정은 그나마 정당성을 부여하는 좋은 그림이었다. 하도 말 많은 한인회다 보니 그 마저도 신선했다. 이제 새로운 한인회는 그간의 파행을 한인회의 역사로 끌어안아야 한다. 그 파행이 ‘네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부정하고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성하고 갱신’해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순수 교민 봉사단체로서 한인회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분명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까지 의심받던 사익 추구, 운영의 폐단, 그들 만의 밀실 협의라는 의심을 벗고 교민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이런 자각의 전제 아래 목표를 명확히 해야 한다. 죄송하지만 당선자의 공약에는 디테일이 없다. 구호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한인회장은 인기나 계파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 이 막중한 일의 방향은 ‘너’도 ‘나’도 ‘함께’ 가는 방향성을 가져야 하기에 그렇다. 그게 교민 봉사의 핵심이다. 반성하고 설득하고 끌어들이고 납득되게 하여야 한다. 여기에 시간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까지 수 년을 신뢰를 잃는데 썼으니 그것을 되찾기에 더욱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이전 한인회의 짐을 왜 우리가 져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질문은 없다.
우리의 역사는 이어져 있다. 나와 관계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우리로부터 다시 우리를 찢는 어리석은 행동일 따름이다. 우리의 현재는 그들이 쌓은 터 위에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분별하기를 바란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한의 정체가 무엇인지 분별하기를 바란다. 그로 인해 이어야 할 가치와 버릴 가치를 분별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교민 사회에서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 분별된 미래, 그러나 화합된 교민사회를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이번 한인회가 이 긴 시간이 걸리고 표도 안 날 봉사에 앞장서 뛰어들어 주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夢先生
박지훈 성균관대학교에서 건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건축가이자 ‘몽선생의 서공잡기’, ‘크룩스크리스티’의 저자이며 일러스트레이터로도 활동했다.
현재 설계, CM전문회사인 정림건축의 베트남 법인장으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