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냄새 농후한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과 서구 유럽의 낭만주의 음악을 융합해 독자적인 색채의 ‘러시안 센티멘탈리즘’을 확립한 천재 음악가. 19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러시아의 클래식 음악을 개척, 세계적인 수준으로 격상시킨 국민 작곡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1840~1893),’ 그는 러시아의 자랑이요, 러시아 음악의 ‘별’이었다. 그런 그가 사망했다. 1893년 11월 6일. 그의 나이 53세였다. 왕성하게 활동중이던 차이콥스키가 갑작스레 사망하자 러시아의 수많은 팬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의 장례식장은 전국 방방곳곳에서 몰려온 6천 여명의 추도객으로 인해 발디딜 틈 없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성당 앞 거리는 6만 여명에 육박하는 추모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차이콥스키의 모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은 3일간 휴교령을 내려 고인을 추모하는 기간으로 삼았다. 러시아의 국보 차이콥스키는 그렇게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마비시킨 채 팬들의 절절한 애도를 뒤로 하고 세상에게 작별을 고했다.
콜레라? 자살?
의사들이 밝힌 차이콥스키의 사인은 콜레라였다. 차이콥스키가 사망하기 며칠 전의 행적을 근거로 내린 결론이었다. 요인즉, 그는 사망하기 며칠 전 남동생 모데스트, 조카 다비도프와 함께 연극을 관람한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 때 끓이지 않은 생수를 마시게 된 그는 다음 날 아침부터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다가 신장 기능의 급격한 저하로 인해 결국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차이콥스키의 장례식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사인이 콜레라가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평소 절친이었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차이콥스키의 장례식장에 소독이나 검역 절차가 전혀 없었던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는 금속관에 묻는 것이 당시 러시아의 관례였는데, 차이콥스키의 시신이 나무관에 안치되었던 점도 이상했단다. 심지어 차이콥스키의 시신이 추모객들에게 공개되어 있어서 그의 손과 이마에 입을 맞추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정말 말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지적은 옳았다. 콜레라가 진짜 사인이라면 차이콥스키의 시신은 철저히 격리되었어야 했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동료 교수들도 말을 덧붙였다. 그들은 청결에 관한 차이콥스키의 강박증이 거의 환자수준이었다며 그가 끓이지 않은 물을 먹고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을 확률이 상당히 희박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 외에도 다른 여러가지 의혹들이 얽히고 얽혀 있었지만, 여전히 일반 사람들은 의사들의 의학적 소견에 따라 차이콥스키의 사인이 콜레라였다고 단정짓는 분위기였다. 적어도 차이콥스키의 ‘음독 자살설’이 세상을 강타하기 전까지는.
1979년, 러시아 출신의 음악학자 ‘알렉산드라 오를로바’는 차이콥스키가 비소(농약)를 마시고 자살했다는 새로운 학설을 발표해 음악계를 놀라게 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차이콥스키가 어딘가로부터 자살을 강요당했고,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너무나 극단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만약 오를로바의 학설이 사실이라면 차이콥스키를 죽게 만든 그들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그의 죽음이 타살같은 자살이었을까?
다음은 오를로바의 주장이다.
“차이콥스키는 동성애자였다. 그가 만년에 사귄 연인은 ‘스텐보크페르모어 공작’이라는 고관의 조카이다. 자신의 조카와 차이콥스키의 관계를 알게 된 공작은 이 사실을 황제에게 알리기 위해 인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그 편지는 황제에게 도착하기 전에 차이콥스키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률학교 동창인 ‘니콜라이 야코비’의 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차이콥스키는 원래 법률학교 출신으로 그의 동료들은 당시 러시아의 정관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동창들은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자마자 ‘비밀법정’을 소집했고, 모교와 자신들의 명예가 땅으로 떨어질 것을 우려해 차이콥스키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협박했다. 당시 비창 교향곡에 매진하고 있던 차이콥스키는 작품초연 직후 비소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황당한 주장이었지만, 오를로바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정황을 덧붙였다. 첫째, 차이콥스키가 끓이지 않은 생수를 마셨다고 알려진 날짜와 장소가 일치하지 않는다. 둘째, 콜레라로 인한 신장 기능 정지는 보도된 것만큼 빠른 시일 내에 일어나지 않는다. 셋째, 의사들이 차이콥스키에게 한 처치는 콜레라 환자에게 가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위장 결혼
오를로바의 주장 중에서 한 가지는 분명히 사실이었다. 차이콥스키는 정말로 동성애자였다. 당시 러시아에서의 동성애는 타락과 부도덕의 상징이었다. 일단 동성애자라는 것이 발각되면 곧바로 파멸이었다. 시민권은 박탈당하고, 시베리아 유형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꽁꽁 숨기고 살아야만 했다. 그러던 1877년의 어느 날, 그는 제자 ‘안토니나 밀류코바’로부터 뜨거운 구애편지를 받게 되었다. 차이콥스키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으며 자신과 결혼해주지 않으면 자살하고 말겠다는 협박성 편지였다. 자신의 은밀한 비밀을 숨기기 위해선 이성과의 결혼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밀류코바와의 결혼을 감행했다. 위장결혼이었다. 결혼 당일 날, 그는 동생 모데스트에게 이런 편지를 했다.
“사랑하는 내 동생아, 이 상황이 너무 비극적이구나. 내가 하려는 이 속임수 때문에 죽을만큼 괴롭다. 하지만 소리내어 울 수가 없어. 단지 흐느낌으로 목이 메일 뿐이지…”
세상과 타협하기 위해, 자신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 쉼없이 아내 밀류코바에게 거짓말하는 것이 힘겨웠던 차이콥스키는 점점 작품활동을 핑계로 그녀를 피하게 되었다. 차이콥스키가 부부관계에 소원하자 아내 밀류코바의 원망은 점점 커져갔다. 지옥과 같은 결혼생활로 괴로워하던 차이콥스키는 강물에 몸을 던졌지만 아쉽게도 자살소동으로 끝이 나게 되었고, 결국 그는 아내를 피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이들의 결혼생활은 몇 개월만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동성애자 차이콥스키의 인생에 있어 위장결혼은 단 한번으로 충분했다.
교향곡 <비창>, 그의 유언이었나?
다시 그의 사인에 관해서 이야기해 본다. 차이콥스키가 콜레라에 걸려 사망한 것인지 정말 동료들의 강압에 의해 자살을 하게 되었는지 현재까지는 결론내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많은 음악역사학자들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Pathetique)’이 그의 사망과 직접적으로 관련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무엇을 근거로?
교향곡 ‘비창’은 1893년 10월 28일, 차이콥스키가 사망하기 9일 전에 초연되었다. 초연 당시 청중들은 직접 지휘봉을 든 차이콥스키에게서 이상한 점을 감지했다. 그는 원래 지휘봉을 크게 휘두르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날은 팔의 움직임이 현저히 작아서 지휘봉을 그냥 들고 서있는 것처럼 보였다. 청중들은 연주 시작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즉 1악장에 등장하는 ‘성자들과 함께 당신의 종이 영혼의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그리스도여’는 러시아 정교회의 신자들에게는 친숙한 ‘진혼성가’로 대다수 청중들의 귀에 익은 선율이었다. 이 선율을 듣게 된 청중들은 작품이 왠지 죽음과 연계되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한 바로크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들이 슬픈 곡조에 즐겨 쓰던 ‘탄식의 선율’은 작품을 더욱 진혼곡처럼 들리게 했다. 뿐만 아니라, 오열하듯 내지르다가 이내 푹 꺼져버린 다음 우울하게 소멸하는 4악장의 멜로디들은 낙담과 체념의 소리처럼 들렸다.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에 일생동안 괴로워했을 차이콥스키는 ‘비창’을 작곡하던 즈음 이미 자살을 결심했던 것일까? 혹시 ‘비창’은 그가 음악으로 쓴 ‘유서’였던 게 아닐까? 아니,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의 죽음이 ‘콜레라’ 때문인지,‘음독’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제3, 제4의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 그것은 영원히 차이콥스키 본인만이 아는 비밀로 계속 남을 수도 있다. 그리고 사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우리는 그저 처절한 고통과 번뇌 속에서도 절대 예술혼만큼은 버리지 않았던 차이콥스키의 아름다운 열정에 집중하면 될 뿐이다.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차이콥스키의 ‘비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