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편찬자는 장주다. 그러니까 이름은 주(周), 송(宋)에서 태어나 맹자와 동시대에 노자를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실재성은 의심스럽다 한다. 전국시대 말기, 도가의 사상가들이 원본 장자(莊子)를 편찬할 때, 이것을 장주(莊周)에게 가탁(假託)하여 장자라 명명한 것인 듯하다는 학설이 있다. 존재에서부터 신비로 둘러싸인 텍스트다. 장자는 內篇(내편) 逍遙遊 (소요유) 편으로 시작된다.
‘북극 바다에 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을 鯤(곤)이라 하였다. 곤의 길이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변하여 새가 되면 그 이름을 鵬(붕)이라 하는데 붕의 등도 길이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붕이 남극 바다로 옮아 갈 적에는 물을 쳐서 삼천 리나 튀게 하고 빙빙 돌며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나 올라가며 육 개월을 날아가서야 쉬게 된다고 하였다.’
스케일을 보라. 그 어떤 고전과 철학서들도 이와 같은 스케일로 시작하지 않는다. 초장부터 기를 죽여놓은 철학적 시선이다. 장자의 시선은 인간세를 밀쳐 내고 구만 리 장공 위에 있다. 그 시선은 도가의 시선이며 장자의 시선이며 노자의 시선이다. 존재 너머를 사유하는 者, 장자를 찾아 힘차게 사유하자. 이어간다. 같은 소요유 편에 나비 이야기가 있다. 저 유명한 호접몽胡蝶夢 이야기다.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조금 전에는)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깬 지금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어 만물의 조화라 한다.’
장자의 호접몽을 두고 사람들은 도가적 물아일체의 완성이라 하기도 했다. 나와 너의 경계가 없어지는 대동이 和(화)하는 지점. 도道 수행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그 경지는 아마 장주의 나비에 이를 테다.
아서라, 장자는 쉽지 않다. 나는 장자를 읽었지만 장자를 읽고 난 뒤 내 삶은 암전이었다. 이제껏 약간의 고전을 접하며 생에 대하여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장자를 읽고 난 후 삶은 다시 어둠으로 휩싸였다. 장자는 당시 시대의 도덕으로 군림하던 인, 의, 예, 지 즉 유가적 의로움과 어짊을 땅에 패대기 친 유일한 사람이다. 순간 니체가 떠오른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지금의 도덕은 모두 가짜라 일갈하며 세상의 도덕이 아니라 자신만의 도덕을 세우는 게 중요하다 말했다. 장자는 니체와 닮았다. 니체도 장자를 읽고 난 뒤 중국에서 태어났더라면 나는 장자가 되었을 거라 말한 바 있다.
자유로운 사람, 구애 받지 않는 인간의 덕목은 덕목이 없는 것이 덕목이라 이른다. 현실 회피의 비난과 의도적 비켜가기 라는 비아냥도 있지만 장자를 깊이 읽어 본 다음이라면 이 사람, 장주는 현실에 정면돌파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처음에 나오는 곤이라는 큰 물고기와 붕새라는 거대한 새는 사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처음에 시작하여 독자의 시선을 흐린 뒤 지금까지의 의도된 모든 사상과 인간을 억압하고 있던 덕목들을 뒤엎을 준비를 하는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텍스트가 진행 될수록 현실 전복을 우회하여 설파하고 사회 시스템의 변혁을 에두르지 않고 직설한다.
그는 인간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을 번갈아 가며 이야기하고는 인간은 자연을 닮아 살아갈 때에만 진정한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 한다. 그는 부에 대하여 지극히 적대적이었으며 아울러 권력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멀리한다. 죽음을 축제로 전환하고 태어나 살아가는 일에는 냉정하여 목석의 시선을 유지한다. 구만리 장공에서 바라보면 나비와 자신은 둘이 아니라 모두 같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장자 1편 소요유에서 33편 천하 편에 이르기까지 읽는 내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삶의 본질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의문이 쉬지 않고 튀어나왔다. 장자는 답을 주는 책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나 죽기까지 반드시 물어야 하는 질문이 총 망라 되어 있다. 그는 이 질문들을 꼭 붙들고 세상을 살아가라 말하고 있다. 질문 없는 삶은 어두운 삶이다. 유한의 인간, 피와 살이 있는 유한의 인간 앞에서 질문의 힘조차 없다면 우리는 나아갈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장자로부터 얻어야 하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그의 시선이다. 그는 바다 깊은 곳으로 빠져들었다가 하늘 높이 구만리를 떠돌고 다시 인간의 내면 속 깊은 곳의 추악함을 끄집어 낸다. 마이크로와 매크로를 넘나드는 그의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꿰뚫어야 하는 것이다. 장자에서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과일 나무는 과일이 열리면 따게 되고 딸 적에는 욕을 당하게 된다.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어진다. 이들은 자기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한다. 그래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이다.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다. 세상 만물이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쓸모 없기를 바란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 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커질 수 있었겠는가? 그대와 나는 다 같이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서로를 하찮은 것이라고 헐뜯을 수 있겠는가?’
이름하여 무용無用의 용用이다. 쓸모는 가득 찬 상태다. 더 이상 채울 수 없다. 쓸모 없는 상태는 비워져 있다는 말이겠다. 소용돌이나 태풍의 눈은 비어 있다. 비어야만 강렬한 소용돌이의 부동의 중심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작고 왜소하며 쓸모 없는 것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연민, 그것이 장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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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용
작가, 산악인, 꿈꾸는 월급쟁이| E-mail: dauac9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