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평범한 군주의 길을 가던 연산군은 대간 권력과 충돌을 합니다. 처음에는 연산군이 대간들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훈구파 공신들을 이용합니다. 무오사화 이후 지나친 왕권강화 정책을 펴는 연산군에게 불안감을 느낀 신하들은 공신과 대간들이 연합하게 됩니다. 이에 연산군은 훈구파 공신들과 대간 모두에게 철퇴를 내려 치는데 이른바 갑자사화의 발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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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사화 발생배경
지난 시간에 설명한 것과 같이 아버지의 두 후궁 엄숙의 정소용을 몽둥이로 때려 죽이면서 벌어진 사건이 갑자사화 입니다. 아버지의 후궁 둘을 죽인 후 연산군은 엄숙의와 정소용의 아들 둘을 끌고 할머니 인수대비 처소로 갑니다. 그리고 “할머니 왜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라고 외칩니다. 노환을 앓고 있던 인수대비는 충격으로 한달 후 운명 합니다. 이제 무자비한 갑자사화의 살육이 시작됩니다. 폐비 윤씨가 후궁들의 참소로 억울하게 살해된 전모를 임사홍이 부풀려서 연산군에게 일러 바치고 이에 이성을 잃은 연산군이 충동적으로 일으킨 사건이 갑자사화다 라고 조선왕조 실록과 많은 역사서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과연 그런지 조선왕조 실록 내용에 의해 필자가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갑자사화가 발생하기 2년 전 1502년 연산군은 느닷없이 폐비 윤씨 사건에 대해 신하들의 의견을 묻습니다. “첩이 (성종의 두 후궁 엄숙의, 정소용 지칭) 왕후를 참소하여 본처를 내치고 사약을 내릴 때 신하들은 목숨을 돌보지 않고 간하는 것이 옳은가 순종하여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옳은지 논문과 시를 지어 올리라” 이러한 어명은 사건의 전모를 모르고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모든 신하들은 엄청난 살육이 있을까 불안해 했습니다. 그런데 왠일인지 이후 2년간 연산군은 폐비사건을 다시 거론하지 않자 신하들은 불안 속의 고요를 느낍니다. 며칠 후 연산군은 느닷없이 공신들 자녀의 품계를 한 등급씩 올리라고 명령해서 조정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이는 공신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는 인상을 줍니다. 항상 공신들의 지나친 특권에 반대했던 사림파 대간들은 당연히 반대하고 집단 사직을 합니다. 그러나 연산군의 강한 집념과 며칠 전 폐비 사건 반성문도 생각나서 대간들은 한발 물러납니다. 그러나 대간들은 임사홍과 측근 3명의 품계는 올릴 수 없다고 마지노선을 그어 놓고 버팁니다. 여기서 연산군은 사림파 대간들이 임사홍을 심하게 견제하는 것을 눈치채고 임사홍을 주목합니다. 반대로 임사홍 역시 사림파 대간들에 대한 분노가 대단할 것 입니다. 사림파 대간들은 연산군과 무려 1년간 밀당 끝에 임사홍의 승급을 막고 정계 진출도 막았습니다.
그러나 임사홍의 넷째 아들 임숭재는 성종의 부마였고 연산군의 매제인데 아들과 며느리의 합동 청탁으로 임사홍은 극적으로 연산군과 결합하게 됩니다.
사림파 대간들이 그토록 싫어했고 배척 했건만 사림파의 행동은 임사홍에게 분노를 심어주어 수백명의 사림파가 학살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갑자사화 2년전 연산군은 폐비 사건을 다 알고 신하들에게 반성하는 글과 시를 짓게 해놓고 행동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때를 기다린 듯 합니다. 임사홍은 항상 분노를 삭히며 때를 기다리던 중에 연산군을 만나 정계 복귀를 하고 연산군의 뜻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치고 감독 연산군, 주연 배우 임사홍의 갑자사화가 발생합니다. 따라서 필자는 연산군의 분노에 의해 갑자기 갑자사화가 발생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뒤에 설명 하겠지만 폐비 사건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함께 죽입니다. 이는 연산군이 자신에게 고분고분 하지 않는 사람들 까지 제거한 것 입니다. 임사홍 역시 자신의 복수를 넘어 권력을 장악할 목적이 있어서 갑자사화의 피해가 커집니다.
미쳐가는 임금과 나라
갑자사화는 사림파만 희생된 것이 아닙니다. 훈구파 원로대신들 까지 수백명이 죽고 귀양갑니다. 연산군은 자신의 뜻에 반하는 신하들을 죽이고 임사홍은 권력장악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살육합니다. 연산군의 할머니 인수대비는 아버지의 후궁을 때려 죽이고 자신을 찾아와 “할머니 왜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라고 소리치는 연산군을 보고 충격을 받아 죽었는데 사관들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인수대비는 죽을 때 폐비 윤씨를 사사한 것을 후회 했을까? 아니면 폐비 윤씨를 죽일때 연산군도 함께 폐세자 시키지 않은 것을 후회 했을까?” 갑자사화 후 연산군은 사치와 향락에 몰두 합니다. 이제 연산군의 행동에 간언하는 신하는 없고 임사홍 처럼 아부하는 신하만 곁에 있습니다. 갑자사화 후 대신들과 대간들이 입을 닫고 있으니 당연히 변화가 생기는데 좋은 방향의 변화는 아니겠죠.
임금이 미쳤으니 지방 수령들은 착취에 몰두합니다. 지방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제도를 악용하여 착취하는데 지방수령들은 공납을 대신하는 방납업자를 선정 합니다. 백성들의 공납을 대신 해주니까 당연히 수수료가 생깁니다. 조선시대 수수료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인정상 주는 쌀을 수수료라고 하는데 이것을 ‘인정미’라고 부릅니다. ‘인정미’ 없다 혹은 ‘인정’ 없다 라는 말의 뜻은 남의 수수료까지 떼어 먹는 악질이라는 뜻 입니다. 그런데 물건 값 보다 비싼 인정미 때문에 백성들은 죽을 맛입니다. 이는 공무원과 상인의 결탁 즉 정경유착 때문입니다. 전에도 정경유착이 음성적으로 존재 했으나 이때부터 정경유착은 국가의 큰 폐단이 됩니다. 훗날 공납의 폐단을 막으려고 대동법이 생기는데 자세한 내용은 대동법을 소개할 때 설명 하겠습니다.
또한 채홍사라는 직업이 생깁니다. 전국에 예쁜 처자들을 골라서 바치는 직업 입니다. 노래 잘하고 춤 잘추고 예쁜 여자는 대게가 기생 혹은 양반의 첩들 입니다. 그러나 일반 처자들도 예쁘면 선발 했습니다. 조선왕조 실록에는 약 2천명의 운평을 뽑아서 그중 특히 예쁜 100명은 ‘흥청’이라 했습니다. 흥청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고사 ‘흥청망청’은 연산군 시절에 생깁니다.
다음 이야기
박원종을 필두로 반정 3대장은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 시킵니다. 그리고 조광조를 필두로 부활을 노리는 사림파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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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