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베트남 한국대사관에 걸린
홍성란체
베트남의 한인사회가 생각보다 무겁다.
지난 어느 자리인가 호찌민 총영사의 언급에서 호찌민 교민이 17만명 정도라는 말을 들은 적있다. 17만, 웬만한 한국의 중소도시 규모의 한인사회가 이곳에 생긴셈이다. 이렇게 많은 교민들이 모이니 진짜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다. 아니 좀 더 긍정적으로 표현한다면 진짜 각 분야의 엄청난 인재들이 만만치 않게 몰려 들어왔다.
오늘은 그런 분들 중에 한 분을 만났다.
한국이라면 쉽게 만나보지도 못한 인물인데, 베트남 이라는 지역의 특수성으로 어렵지 않게 인터뷰를 하는 영광을 얻었다.
물빛이라는 호를 가진 홍성란 한글서예 작가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유명작가인가? 이제부터 좀 살펴보자.
한국에서 한글 서예는 아무래도 그 역사가 한문서예에 비해 짧을 수 밖에 없는 탓인가, 주로 한글 서예의 전통 서체는 여성들에 의해 전수되고 있는 듯하다. 물론 남성 중에서 한글 서예를 쓰는 서예가도 있지만 한글만을 쓰는 남성 서예가는 찾기 어렵다. 주로 한글을 고수하며 스스로 서체를 만들어 일가를 이룬 서예가는 대부분 여성들이다. 이들의 자취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가며공부를 했다. 마침 드러난 자료 한편에서 홍성란 작가의 서예에 대한 뿌리가 한자락 잡힌다.
지난 4월 한국 근현대 한글서예에 대훈로(大勳勞)를 남긴 꽃뜰 이미경 100세展이
서울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개막식이 열렸다.
한평생 한글의 아름다움을 연구하여 업적을 남겨온 꽃뜰 이미경 선생의 이번 전시는
미발표 서예작품 70여 점과 서예가·명사의 축필 작품 30여점 등 100여 점이 전시되었다.
이 전시회는 (사)갈물한글서회라는 재단에서 기획을 했다. 그 갈물한글서회하는 이 단체가 현재 한국의 한글 서예의 위상을 말해주는 단체다. 나름대로 한글 서예의 일가를 이룬 작가만이 가입이 가능할 수 있는 모임이라 한다. 여기서 나온 갈물이라는 이름은, 꽃뜰 이미경 선생의 언니 이철경(1914~1989) 선생의 호다. 그러니, 이 자매와 더불어 갈물선생의 쌍둥이 자매 몸뫼 이각경 선생, 이 세자매가 한국의 한글 서예의 대 줄기를 이룬 가족이다.
그렇게 갈물, 꽃뜰로 시작된 한국의 현대 한글서예의 계보는 몇 단계를 거쳐 홍성란 작가의 스승인 난정 이지연 선생까지 이어져 왔다. 그리고 그 난정 이지연 선생의 수제자인 물빛 홍성란으로 한글서예 계보의 적통이 이어 내려온 것이다.
물빛 홍성란, 이미 한국의 한글 서예라는 분야의 최고봉에 우뚝 선 서예가가 우리 교민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이런 여성 한글 서예가의 노력은 그저 전시회의 작품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다. 현대 한국 서단을 대표하는 한글 서예 작품의 글자체로 ‘한글폰트’를 제작된 총 5종의 디지털 폰트는 꽃뜰 이미경체, 갈물 이철경체, 원곡 김기승체, 일중 김충현체, 평보 서희환체 등으로 한글 서예의 힘차고 아름다운 한 획 한 획을 그대로 살려 디지털화된 폰트로 남아 현재 우리가 컴퓨터에서 사용하고 있다.
쉽지 않았던 대가와의 만남, 그리고 이미 맺어진 인연의 끈
이렇게 한글서예의 일가를 이룬 홍성란 작가와의 면담은 그의 부군인 박지훈 정림건축 베트남 법인장과 함께 본지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물빛 홍상란 작가가, 몽선생이라는 필명을 쓰며 지난 6월부터, 필자를 대신하여 본지의 메인 칼럼인 <짜오칼럼>을 기고하는 박지훈 정림건축 베트남 법인장의 부인이라는 사실에 더욱 개인적인 흥미가 생기는 면담이었다.
베트남의 호찌민에 필자가 알고 있는 서예가 한 분이 있다. 벽담 한동희 선생이다. 그는 한문 서예와 동양화로 교민사회에 명성을 날려 웬만한 은행 등 교민 단체 곳곳에 그의 서예와 그림이 걸려있는데, 그 한동희 선생이 일전에 홍성란 작가를 필자에게 추천하며 한번 만나보기를 권하던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그런데 그분이 또 본지와 깊은 인연을 맺고 지내고 있는 몽선생, 박지훈 칼럼리스트의 부인이라니 참 세상 좁다는 말을 새삼스럽게 되뇌이게 만든다.
다시 정리 하자면, <서공잡기>라는 베트남에 관한 에세이 모음집을 쓴 작가이자, 건축학 박사인 박지훈 정림건축 베트남 법인장의 부인이 자타가 공인하는 한글 서예 작가의 계보를 잇고, 한국대전 서예 전시회의 초대작가인 물빛 홍성란 작가란 얘기다.
이렇게 속으로 정리는 하고나니 머리는 맑아져 의문은 사라지는데 잠시 뜻모를 감정이 가볍게 울렁인다. 일종의 경외심이랄까, 질시랄까. 박지훈 법인장과의 만남을 베트남에서 맺은 최고의 연 중에 하나로 생각한 터인데, 그 잘난 인물이 한국 한글서예의 계보를 잇는 작가 부인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잠시 하늘의 주신 편향됨을 항의라도 하듯이 절로 고개가 하늘을 향한다. 하긴 이런 어울림이야 말로 하늘이 주신 부부의 연이겠구나 하는 느낌도 들기도 한다.
자,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 질시 나는 완벽한 부부 한 쌍을 욕심나게 하나하나 파헤쳐보자! 하며 몽선생에게 “이번에는 부부이야기가 나갑니다” 하니 정색을 하고 손 사례를 친다. 본인의 고사를 외면하고 막무가네로 내 맘대로 쓸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좀 유통성을 발휘하여, 주로 홍작가 이야기를 쓰는데, 그래도 베트남에서 부부가 공동으로 하는 일들이 많으니 어쩔수 없이 몽선생의 이야기도 함께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양해해 줄 것을 기대하며 글을 써 내려간다. 혹시 원치 않는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그것이 신의 뜻을 거역하며 천기를 누설하여 평생 독수리에게 심장을 뜯어 먹힐 일이 아니라면 그런대로 양해해달라, 몽선생님!
이루어졌다, 그의 부군 박지훈 법인장과 함께.
원래는 몽선생의 인터뷰를 먼저하고 나중에 혼성란 작가를 기회가 닿는 대로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워낙 사려 깊은 몽선생, 차일피일 인터뷰를 미룬다. 필자는 그럼 부인을 먼저 소개하라고 몇 번을 청했지만, 이 역시 대충 웃음으로 넘겨왔다. 하긴 이제 늙은이의 말에 귀기울일 사람이 없지 뭐, 하며 자조의 시간을 좀 보내고 있는데, 어느날 몽선생이 지난 밤 꿈에서 필자의 하소연을 다시 들었는지, 홍성란 서예 작가의 약력과 정보를 사진과 함께 이메일로 보내왔다.
박지훈 법인장, 꿈을 먹고 살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꿈을 이루고 살겠다는 뜻인지, 몽선생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양반, 이 양반이 하는 모습이 늘 이렇다. 절대 직접적으로 내놓고 말을 안 하고 그저 알아먹을 정도 만 행동을 보여준다. 평생 말이고 글이고 행동이고 돌리며 살아보지 못한 필자로는 그저 쓴 미소만 나올 뿐이다.
아무튼 그런 과정을 거치고 또 필자와 몽선생의 일정을 수 차례 조정을 한 후, 비로소 북미 정상회담이 이루어지듯이, 2019년 12월 18일 아침 9시 30분에 본지의 사무실에서 홍성란 작가와의 면담이 어렵사리 이루어졌다.
그의 부군 박지훈 법인장과 함께.
한국의 한글서예 계보를 잇는 인물, 물빛 홍성란
서예작가 맞어? 몽선생을 앞세우고 등장한 홍성란 작가의 인상은 서예가라기보다 패션니스트에 가까운 인상이었다. 암튼 반가운 마음에 넙죽 손을 잡고 안으로 모셨다. 순간 몽선생의 뱁새 눈빛이 필자의 뒷통수를 찌른다.
사무실 작은 소파에 이 큰 인물 둘을 나란히 앉혀놓고 보니,
먼저 그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 벽에 걸린, 필자의 모친이 칠순이 넘어 배워 쓴 추사체 서예 두 점이다.
비록 훌륭한 솜씨는 아니지만 필자가 최애하는 작품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서예에 대한 얘기가 시작된다.
홍성란 작가에 대한 독자의 긍금증은 무엇일까?
본지의 모든 글은 독자의 시각에서 쓰여져야 한다는 너무나 뻔한 원칙에, 가장 먼저 홍작가의 모습을 기술할 요량으로 다시 바라본 홍작가의 모습. 일반적으로 서예가라 하면, 그리고 더구나 한글서예의 계보를 이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하고 떠오르는 모습과 필자 앞에서 다소곳이 앉아 아직도 소녀 같은 젊은 미소를 놓지않은 홍작가와의 모습은 도무지 매칭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긴 늘 이렇긴 했다, 박지훈 건축학 박사, 몽선생과 엮인 스토리는 항상 필자의 예상을 깨버리고 말곤 했던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이번에도 역시!, 홍작가의 모습은 서예작가라는 필자의 고루한 예상을 여지없이 깨버린 모던한 패션니스트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어긋난 예상이 기운을 빼기는커녕 오히려 활기가 뻗치는 조화는 또 무엇인가. 아무튼 좋다. 일단 신원조사 좀 해보자, 하며 시작한 옛날 얘기가 두 분의 사랑 스토리로 이어진다.
고향인 청주, 같은 고을의 대표적 유지 집안이었던 박씨 집안과 홍씨 집안의 자녀 박지훈과 홍성란, 이야기의 배경은 이렇게 시작한다. 요즘으로 따지면 전형적인 두 엄친아. 그런데 이야기가 되려니 집안 일로 잠시 서울로 전학 갔다 내려온, 서울 전학생 박지훈을 보는 순간, 평생의 마음을 빼앗기고만, 그 학급의 반장 홍성란. 이렇게 이들의 사랑은 청주 오창면이라는 작은 고을에서 동화처럼 시작된다.
그리고 사랑 이야기가 늘 그렇게 진부하듯이, 유난히 피부가 하얗던 서울 전학생 지훈이는 부모를 따라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첫 사랑은 그런거지 하며 가슴을 앓던 성란이는 일찍 성숙한 소녀로 자라며 지훈과 별도로 서울의 대학으로 진학한다.
청주에서는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홍성란 그 재주가 어디 가겠는가? 낭중지추라고 하던가, 자신이 원치 않던 대학이라고 이름조차 밝히길 망설이며 상처난 자존심에 드러난 활동을 하지 않던 학생시절, 마침 열린 서울 올림픽 호돌이 디자인 팀에 우연히 합류하여 자신의 송곳 재능을 발휘한다. 그 작업을 인연으로 대학을 마친 후 한국의 대표적 광고사인 <두산 오리콤>과 또 다른 최고의 예술지 <공간>에서 아트디렉터로 근무하며 자신의 케리어를 쌓아간다.
한편 지훈이는 성균관대 건축과를 입학하여 그 역시 건축 예술인으로 재능을 키워간다. 그리고 뻔하게 서울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별다른 갈등도 없이 결혼에 골인하며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하며 맥없는 희곡을 마감한다.
한글서예의 계보를 잇는 난정 이지연선생의 수제자로 등극
홍성란은 어려서부터 워낙 서예에 특출난 재능을 보였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은사를 만나 서예를 시작하고 한국의 서예 계보의 한 축인, 난정 이지연 선생의 눈에 들어 애제자로 성장하며 한국의 대표적 서예작가로 우뚝선다. 그동안 여러전시에서 상을 받고 결국 국전에서 특선을 차지하며 이제는 대한민국 모든 서예인의 꿈인 국전 초대작가로 우뚝 서며 공식적으로 한국의 한글 서예의 최고봉의 하나도 인정받는다. 한국에서 국전 조대작가라는 명예는 그 분야에서 최고임을 알리는 징표가 된다. 그리고 한국의 한글서예 엄선된 작가들의 모임인 갈물한글서회의 회원으로 들어간다. 결국 지금 홍성란 작가는 어디에 있던 간에 부인할 수 없는 한글서예의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라 말할 수 있다.
대충 이렇게 서술하고 보니 타고난 천재가 정해진 길을 간 듯하다. 이런 천재가 베트남에 와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첫째, 서울 어느 거대 교회의 권사인 홍작가는 어린나이에 장로를 부여 받은 부군, 박지훈 장로와 함께 길잃은 양들을 찾아 함께 신앙 공부를 함께 한 후 주님의 품 안으로 돌려보내는 봉사를 매주 개인적으로 행하며 산다. 이렇게 아주 간단하게 한 줄로 요약되는 설명이지만 사실 행간을 풀자면 너무 얘기가 길어 그것만으로 이 인터뷰 전체를 채우고도 남을 깊은 이야기가 담겨있지만 단지 특정 종교의 이야기라 이렇게 표현하고 마는 것을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둘째, 홍작가의 호를 딴 물빛 장학회라는 이름으로 호찌민 청년 공산단 산하 SAC(STUDENT ASSISTANCE CENTER)와 정식 계약을 맺고 매년 지방에서 올라와 호찌민에서 공부하는 어려운 학생 중에 두명을 선발하여 지원하고 있는데, 이 일을 시작한 것이 자신이 베트남에 들어온 2007년 다음 해인 2008년이니 벌서 10년이 넘어, 현재 20명에 가까운 학생이 그 장학회를 통해 학업을 마치고 사회인으로 성장해 나갔다. 그 중에 일부 졸업생은 몽선생이 일하는 회사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이 일로 이 부부는 베트남 일간지에 <지방학생들의 등불>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뷰가 실리기도 했다. 개인 자금을 활용하여 지원하는 장학회라 많지 않은 학생에게만 혜택이 돌아가지만 일단 들어온 학생은 끝까지 지켜본다는 방침으로 계속하고 있다는 부부. 역시! 소리가 절로 나는 부부다. 주언진 시간을 항톨 허투로 쓰지 않는다. 너무 완벽하지 않은가? 완벽함은 재미가 없다. 해서, 부부 이야기는 여기서 마친다.
이제 홍성란 작가의 서예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를 돌리자.
홍작가는 지금 호찌민 국립대학교 인사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한글의 날 축제에 휘호 퍼포먼스를 비롯, 한글 서예를 알리는 일에 기여하고 있다.
직접 홍작가에게 질문을 던졌다.
서예란 무엇인가?
서예란 붓으로 글씨를 쓰는 예술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예(書藝)라고 하지만 중국 에서는 서법(書法), 일본에서는 서도(書道)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용어는 서(書)에 대한 의식구조를 달리하여 표현하였을 뿐 문자를 소재로 하는 점은 서로 같습니다.예(藝)라고 했을 경우는 자칫 잘못하여 너무 기교적인 면으로 치우칠 수 있고, 법(法)이라고 했을 경우는 법도(法度)에만 사로잡힐 수 있고, 도(道)라고 할 경우에는 또 너무 도(道)적인 경지만 주장한 나머지 법이나 예술적인 경향이 다분히 무시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예란 ‘예(藝)’와 ‘도(道)’의 정신을 바탕으로 삼아 한데 어우러져 하나로 일치되었을 때 비로소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서예는 해당 나라의 글씨체를 예술적으로 종이 위에 표현하는 기술적 측면을 넘어서, 정신수양의 수단으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한글 서예만 하시는 듯합니다. 왜 한글 서예지요? 또 서예와 그림의 차이랄까? 다른 점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한글 서예를 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권유로 시작했는데, 특히 아버지께서 서예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기에 그 시골에서 시내로 나가셔서 필방에 들러 붓과 큰 먹을 사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많은 경진대회에 출전하여 큰 상을 수상하기도 하여 학창시절부터 시골 마을에서 나름 명성을 얻어 자부심이 꽤 높은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한글서예를 사랑하게 되어 지금까지 별 고민 없이 한글서예를 위한 붓을 잡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림의 경우에는 재능이 우선적으로 뒷받침 되어야 끝까지 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서예는 재능보다 성실이 우선되는 예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실에 시간이 더하여지면 풍성하고 완성된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였지만 서예도 병행해 왔기 에 그 차이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서예를 할 때 필요한 마음과 갖춰야 할 정신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 까요?
무엇보다도 집중입니다. 즉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모든 잡생각을 없애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그 간단한 가로획과 세로획조차 똑바로 그을 수 없음을 스스로 알게 되지요. 그래서 작품 공모전에서도 심사기준의 우선순위로 오자와 탈자를 구별해 내는 작업을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저 같은 경우는 작품을 쓸 때 청소를 하는 등 주변을 먼저 정리하고 몸을 깨끗하게 한 후에 붓을 잡습니다. 저의 소재는 주로 성경 말씀이므로 기도와 소망을 품은 마음으로 작품에 임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서예를 하면서 홍작가가 받은 보람이랄까 삶에 대한 보상이랄까….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비롯하여 주변과 사회의 불합리에 대한 불만으로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붓을 잡습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과 생각이 절로 정리되지요. 더불어 세월이 지날수록 경력으로 쌓이고요.
그런 세월 속에서 서예 강의도 하게 되고 불우한 이웃에게 눈도 돌리게 되었는데 결국은 그 수고가 오히려 제게 풍요함이 되어 자리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제가 얼마나 부자인지 알기 시작함과 동시에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되더군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또한 금보다 더 귀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고, 할 일이 늘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일찍 알게 되었지요.
홍작가는 서예를 하시면서 자신의 글을 서예로 표현하지는 않나요?
서예가라면 누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글을 서예로 쓰고 싶어 하지요. 물론 저도 그렇고요. 특히 한글서예가는 더욱더 그런 갈망을 가질 것입니다. 그래서 제 글을 소재로 쓰고 싶어서 방송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하여 졸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쉽지 않더군요. 지금 7년째 인문사회과학대학교에서 한국어 강의를 하다 보니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열망이 커져서 연세대학원 교육경영 최고위 과정도 수료했지만 지금까지도 강의준비에 몰두를 하고 있다는 변명으로 자기 글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주로 성경 말씀을 대부분 소재로 삼고 있고, 약 10퍼센트 정도의 글만 제 마음을 울리는 시를 선택하여 쓰고 있습니다. 제 글을 써서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서예를 사랑하기 때문에 서예 작업 자체를 즐기고 있다고 하는 게 옳겠죠.
교민들에게 서예를 권하시며 당부하고 싶은 말씀
이런 외국 생활에서 서예는 자신을 정돈할 수 있는 좋은 취미활동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이 적게 든다고 할 수 있고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재능보다 성실을 가장 필요로 한다는 점이 장점입니다.
즉 누구나 할 만하다는 것이지요. 꾸준히 써나가다 보면 어느덧 작가라는 그룹에서 활동하면서 삶의 풍요함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면서 최근 베트남에서 부는 한류에 따른 한국어 붐이 있으니 베트남 사람들과 소통을 하시는 데 도움이 될것이라는 생각에 한글서예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홍성란 작가의 새해 인사>
홍작가의 프로필에 걸린 길고 긴 수상 기록과 그의 작품들 일일히 소개하자면 이 밤을 다 세어도 충분치 않다. 나중에 나온 질문은 홍성란 작가가 직접 기술한 답변이다. 그런 답변을 통해 홍작가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번에 한 주필이 만난 사람에는 호찌민 교민사회의 무게를 더하는 서예계의 거목과 그와 함께 우리의 사회를 밝게 만드는 그의 부군의 이야기를 담아보았다. 하늘로 부터 받은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여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이 부부를 보며 배울 것이 많은 시간이었다.
새해는 어제보다는 오늘이 한 톨만큼이라도 낳아지는 삶이 되기를 스스로 기원해본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한 16: 24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