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텍스트를 읽어 내리려 한 것은 나의 큰 불찰이었다. 행간 너머에서 노자는 나를 보고 마냥 웃고만 있고 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해 끙끙대었다. 모욕이다. 자괴를 느낄 즈음 장자가 도와주었으나 아주 조금의 힌트만을 던지고 사라져 버렸다. 더 복잡해진 머리 속을 가눌 길이 없었다. 첫 일독은 노자에 넉다운 됐다. 심기일전하여 두 번째로 달려들었던 노자는 더 오리무중이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텍스트로 서평을 쓴다는 게 무리인 줄 알고 있으나 이마저도 하지 못하면 노자는 움켜쥔 손의 바람처럼 빠져나갈까 걱정이 되어 나는 쓴다.
흔히 사람들은 노자에 대해서 무위자연이라는 말만을 떠올리고는 초야 묻혀 바람과 같이 물과 같이 사는 신선상을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신비론적 도론에 근거한 이와 같은 노자의 모습은 실상 유가에서 비롯된다. 당시 도가는 사상적 지배자격이었던 유가론자들로부터 환영 받지 못했고 노자의 사상은 폄하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얻어진 잘못된 노자의 이미지가 오늘날에 이른다. 노자의 사상은 유가와 사상적 대립으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붕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력이 필요하듯 큰 바람이 꾸준히 불어주지 않으면 구만리를 날 수 없다. 자유는 이렇게 역경을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물처럼 살자는 노자의 道無水有도 이와 다르지 않다. 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양과 양생이 필요하며 사람이 물과 같이 ‘불영과불행’ (맹자,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아내는 노력 없이는 완성하기 힘든 경지다. 이러한 구체적 사태를 신비론적 도론의 차원에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겠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곱씹어 세 번 읽기에 들어가야겠으나 지적 능력의 한계를 가득 느낀다. 텍스트를 번역하여 내 놓은 역자조차 노자 연구에 생애를 바쳤지만 서문에 그가 한말은 여전히 노자를 이해하는 것은 망망대해 일엽편주라 했다. 읽기 전에는 와 닿지 않았으나 읽고 난 후 깊이 이해되는 말이다. 노자는 인간으로서 알지 못함이 큼으로 말을 많이 할 수 없다 했는데 그런 현자가 도를 깨우치고 난 다음 한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오직 세상에서 자신만이 흐리멍덩하다고 했다. 나는 무릎을 쳤고 이내 부끄러워 쥐구멍을 찾았다.
잠시 그의 생애를 알아보자. 노자는 중국의 고대 춘추시대 중기부터 전국시대 초기까지 살았다. 시기를 추정하면 대략 기원전 570년부터 479년 사이가 된다. 노자가 살았던 시대는 계급 질서, 생산 관계, 세계관 등이 가장 밑바탕부터 통째로 변하던 혼란의 시대였다. 사성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노자는 초나라 고현 (지금의 하남성 녹읍) 사람으로 성은 이(李)씨고 이름은 이(耳)이며 자는 담(聃)이다. 그는 무너져 가던 주나라에서 황실의 도서관장을 지냈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를 물었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공자와는 동시대 사람인 것으로 추정한다. 기타의 다른 행적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노자는 어떤 이유에선가 주나라를 떠나야 했던 것 같고, 그때 국경을 넘으면서 국경지기에게 설파했던 간략한 내용이 ‘도덕경’이라는 책으로 남았다고 한다. 상편은 도경(道經), 하편은 덕경(德經)으로 이름 붙이고 다시 81장으로 나누었는데 모두 오천 자다. 이후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도교에서는 이런 사실을 더욱 신비화해서 노자가 그때 국경을 떠나 인도로 가서 불교도들을 교화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근거는 없다. 노자의 아들은 이름이 종(宗)이고 군인의 길을 걸었으며 은간(殷干)이라는 영지에 봉해졌다. 이렇게 노자와 그 아들의 경력을 볼 때, 지식과 권력에 가까이 있었던 집안이었던 것 같다.
주옥 같은 문구가 도처에 있으나 여기선 도덕경 45장에 나오는 말을 소개한다. 노자 텍스트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大辯若訥(대변약눌), 대변은 사물에 따라서 말하고 자기가 지어낸 것이 없는지라 그러므로 어눌한 듯하다.” 대변 즉 위대한 말은 꾸미지 못하고 포장하지 못해 듣기엔 약눌, 즉 어눌한 듯 보이지만 미사여구가 따를 수 없는 사물의 진실을 드러낸다는 말이겠다. 수많은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물어오는 말에 지체 없이 답하고 생각 없는 순간의 말들을 쏟아내는 경박함이 존경을 받는 세상이다. 침묵의 행간이 아름답고 고운 단어를 생각하기 위한 약간의 멈춤이 우리에겐 필요한지 모른다. 세상의 값싼 가치에 털려 버리는 우리에게 노자는 어떤 시간으로 살아야 할지를 묻는다. 노자는 이를 이르되 결코 직선으로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에두른다. 하고자 하는 얘기를 숨겨놓지만 휘휘 돌아올라 폐부를 찌르는 명쾌함이 있다. 노자를 읽는 내내 침묵하는 선지자의 넓은 등판을 나는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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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용| 작가, 산악인, 꿈꾸는 월급쟁이 |E-mail: dauac9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