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다. 아침 저녁으로 손가락 톡을 나누는 한국의 가족들은 어느 새 겨울을 맞이한다고 한다. 하지만 연중무휴 뜨거운 자외선을 따돌리려 썬블럭과 동고동락하는 나는 겨울이라는 계절에 대해 무심해진지 꽤 된 것 같다. 뽀독뽀독 소리나는 눈길을 걸어나가 길 옆 모퉁이에 있는 오픈 마차에서 뜨끈한 우동 한 그릇 먹을 수 있었던 시절은 언제나 그리울 한국의 겨울낭만이다. 하지만 여기는 너무나도 따스한 호찌민. 아쉬운대로 호찌민 스타일의 12월을 즐겨보기 위해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에 열을 올리고, 숙성된 좋은 와인을 준비한 다음, 거실 스피커가 습기라도 먹지 않았는지 점검해야겠다. 그리고나서, 겨울이면 생각나는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들으며 분위기를 내 봐야지.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오스트리아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는 ‘가곡의 왕’으로 불린다. 본격적인 작곡을 십대 후반에 시작했다 하더라도 무려 600여개의 가곡을 남긴 그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선율의 귀재임이 틀림없다. 물론 그의 작곡 스펙트럼은 넓었다. 관현악곡, 실내악곡, 피아노 독주곡, 협주곡, 그리고 교회음악에 이르기까지 소화하지 못하는 장르가 없었으니까.
슈베르트의 수많은 명작들 중에서, 해마다 겨울이 오면 전 세계의 명성있는 바리톤과 테너 가수들이 앞다투어 무대에 올리는 연가곡 <겨울 나그네 Winterreise>.
제목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 또는 슈베르트의 음악을 잘 모르는 한국 사람들에게도 이 제목은 생소하지 않을 듯 하다. 1986년에 개봉한 강석우, 이미숙 주연의 영화 <겨울 나그네> 때문일거라고 하면 조금 억지스러우려나… 여하튼, 슈베르트의 연가곡인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서는 일제시대의 영향으로 <겨울 나그네>로 알려져 있지만, 슈베르트 본인이 붙인 제목은 <겨울 여행>이었다. 왜냐면, 독일어 ‘Reise’는 나그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 방랑을 뜻하므로 ‘Winterreise’는 겨울 여행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겨울 나그네’라는 제목이 ‘겨울 여행’보다 더욱 시적으로 들리는 것은 사실이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이야기로 돌아간다.
1825년 오스트리아 빈.
한 친구의 집을 방문한 슈베르트는 거실 탁자에 놓여 있던 독일 시인 ‘빌헬름 뮐러’의 시 ‘겨울 여행’을 읽게 되었다. 슈베르트는 뮐러의 시에 등장하는 주인공, ‘떠도는 방랑자’를 만나자마자 마음을 온통 빼앗겼다. 실연을 당해 삶의 희망이 없어진 주인공이 눈보라 치는 겨울날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며 자신의 감정을 펼쳐 놓는 이야기인 뮐러의 시 ‘겨울 나그네’ 속에는 외롭고 고독한 자신의 모습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의 시집을 통째로 빌려가 날이 새도록 읽고 또 읽었다.
슈베르트의 마음을 사로잡은 시 ‘겨울 여행’, 아니 ‘겨울 나그네’의 텍스트는 주인공이 겪은 실연의 비애를 눈 쌓인 겨울 풍경과 결부시켜 비통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찬찬히 시를 음미해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된 한 인간의 고독과 절망감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곡을 작곡할 당시 슈베르트는 오랫 동안 앓고 있던 몹쓸 병(매독) 때문에 죽음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여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24개의 가곡 전편을 관통하고 있는 분위기는 너무나도 절망적이고 암울하다. 열거하기 좀 길지만 작품의 분위기를 이해하기 위해 24개 가곡의 제목을 살펴본다.
1) Gute Nacht (안녕)
2) Die Wetterfahne (풍향기)
3) Gefrorne Tränen
(얼어붙은 눈물)
4) Erstarrung (곱은 손)
5) Der Linden baum (보리수)
6) Wasserflut
(흘러 넘치는 눈물)
7) Auf dem Flusse
(시냇물 위에서)
8) Rückblick (회상)
9) Irrlicht (도깨비불)
10) Rast (휴식)
11) Frühlingstraum (봄의 꿈)
12) Einsamkeit (고독)
13) Die Post (우편마차)
14) Der greise Kopf (백발)
15) Die Krähe (까마귀)
16) Letzte Hoffnung
(마지막 희망)
17) Im Dorfe (마을에서)
18) Der stürmische Morgen
(폭풍의 아침)
19) Täuschung (환영)
20) Der Wegweiser (이정표)
21) Das Wirtshaus (여인숙)
22) Mut (용기)
23) Der Nebensonnen
(환영의 태양)
24) Der Leiermann
(거리의 악사)
한 젊은이가 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실연을 당했다. 그녀의 집 앞에서 작별 인사를 고한 그는 아픔을 잊으려 눈과 얼음이 뒤덮인 들판을 따라 방랑의 길을 떠난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흐른다. 지나가는 우편마차의 경적 소리에 ‘혹시나 연인으로부터 편지가 온 걸까?’ 하고 잠시 설레어 보기도 하지만, 마차는 그냥 지나쳐 버린다. 꽁꽁 얼어 붙어 을씨년스러운 겨울 들판을 정처없이 떠돌던 젊은이는 까마귀, 환상, 도깨비불, 백발과 같은 죽음에 대한 상념들에 휩싸여 이내 자살충동에 빠진다. 그러더니 결국 마을 어귀에서 손풍금을 연주하는 늙은 악사를 만나 이렇게 말한다.
“함께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자”라고. 실연은 극복된 것인가?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는 한 남자가 겪은 실연의 아픔을 표현했다기에는 그 정서가 너무나 어둡고, 무겁고, 절망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서는 뮐러의 시에 등장하는 주인공만의 것이라기보다는 슈베르트가 인생에서 당면한 좀 더 본질적이고 심각한 고민을 반영한 것으로 보는게 맞을 것 같다. 이 가곡은 평생을 떠돌이 작곡가로 살아온 고독한 남자요, 끊임없는 방랑으로 인해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가난뱅이요, 드러내어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창피한 병에 걸려 고통받던 우울한 환자 슈베르트가 읊어대는 삶을 향한 ‘처절한 독백’임이 분명하다. 뮐러가 주인공 삼았던 나그네는 그렇게 슈베르트 자신으로 둔갑해 있었다.
과장되지 않은 담백한 어조와 가슴 저리도록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찬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슈베르트의 자화상과도 같은 이 슬픈 작품이 이토록 긴 세월동안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나의 작품은 음악에 대한 나의 이해와 슬픔을 표현한 것이다. 슬픔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야말로 세상을 진정 행복하게 하리라고 생각한다. 슬픔은 이해를 돕고 정신을 강하게 한다” .
아… 슈베르트가 했던 이 말 속에 정답이 들어 있는 걸까?
그가 떠난 지 200년이 흘렀지만, 세월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의 가치가 여전히 앉아 있다.
슬픔을 노래로 승화해 낸 불멸의 예술가 슈베르트의 가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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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지 희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졸업(교육학 학사) / 미국 맨하탄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석사) / 한세대학교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박사) / 국립 강원대학교 실기전담 외래교수(2002~2015) / 2001년 뉴욕 카네기홀 데뷔 이후 이태리, 스페인, 중국, 미국, 캐나다, 불가리아, 캄보디아, 베트남을 중심으로 연주활동 중 / ‘대관령 국제 음악제’, 중국 ‘난닝 국제 관악 페스티발’, 이태리 ‘티볼리 국제 피아노 페스티발’, 스페인 ‘라스 팔마스 피아노 페스티발’ 《초청 피아니스트》 E-mail: pianistkim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