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군(軍)에보내던 날

한국 근현대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도시, 빛고을이라 불린 광주를 이렇게 찾게 되리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방문할 일이 없었던 곳인데 베트남에 사는 지금에 와서 찾게 되는 도시라니 더욱 생경했다. 그러나 아마도 이 도시는 우리 가족에게 잊어지지 않을 도시가 될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가는 길을 알아보고 고속버스가 나을까 열차가 나을까 고민하고 숙소를 결정하여 예약하고 나니 예정한 날이 성큼 다가왔다. 차에서 내려 처음 본 광주는 태풍 미탁이 올라온다는 소식에 비구름이 몰려들고 있었지만 참 깨끗한 인상을 가진 도시였다.
이번 광주 방문은 오랜만의 가족여행과 같았다. 나와 아내, 그리고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함께 하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간만의 열차 여행이었으니. 그럼에도 웃고 떠들고 즐길 수가 없었던 것은 그것이 아들의 입대를 위한 신병훈련소 입소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군대가 어떤 곳인가. 처음으로 가족과 완벽한 단절을 겪는 곳, 이십년이 넘도록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문화가 있는 곳, 개인에 앞서 전체가 존재하는 그 곳을 향하며 아들은 낯선 세계가 주는 불안감과 더불어 두려움을 가졌을 것이다. 오래전 이십대의 내가 그랬었듯이.

부모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아들이 외국에서 대학을 다녔기에 이미 훈련된 이별이었지만 그래도 보려고 마음먹으면 함께 할 수 있는 것과 아무리 만나고 싶어도 맘 먹은 때에 나올 수 없는 곳에 가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일이다. 부모와 아들의 선택 바깥에 임의로 결정할 수 없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일은 서로를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입대하던 날 아침, 호텔에서 신병교육대로 출발하기 전 함께 기도해주는 것으로 격려를 대신했다. 바라보는 아들의 짧게 깎은 민둥머리가 더이상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아기 같은 아들이 군복을 입고 있는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전날 잔뜩 찌푸렸던 하늘은 새벽부터 비를 토해 내었다. 빗속에 부대 앞에 도착해 이른 점심식사를 했다. 워낙 긍정주의자임에도 표현은 시크한 아들은 신경 쓰지 말라는 투이지만 어디 부모 마음이 그런가. 입으로는 남들 다 다녀왔다, 나 때는 더했는데 일년 반이면 잠간 사이 시간이 지나간다, 요즘 군대가 군대냐 했지만 속 마음은 겉 말과 다를 수밖에 없다. 저 놈이 잘 할까, 사고는 없을까, 좋은 선임병 만나야 할텐데 등등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헤매 다닌다. 그러다가도 표현을 감추지 않는 아내의 걱정 보따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오면 별 걱정을 다한다고 타박하고는 돌아서서 그 걱정을 같이 하는 게 아버지 마음인가 보다.

입소식에 앞서 부대에서는 훈련병들의 생활을 설명하고 훈련의 내용과 과정을 소상하게 부모에게 전해주었다. 그 느낌이 어찌 그리 친절한던지. 내가 겪었던 군기 만땅, 공포의 훈련소는 어디 가고 친절 아저씨들만 있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이래가지고 나라를 지킬까 하는 엉뚱한 마음도 드는 걸 보니 세상이 바뀌어도 참 많이 바뀌었다 싶기도 하면서 부모 마음의 걱정도 조금은 덜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군대는 군대이다. 군대에 가는 청년에게 1년 6개월 가지고 뭘 그래 그러면 그들의 눈이 삐쭉하게 돌아간다. 요즘 군대가 무슨 군대야 그러면 군에 간 아들을 둔 부모들의 혈압이 상승한다. 연락도 자주 하는데 뭘 기다리나 하면 남친이 휴가 나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애인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킬 것이다. 그래서 군대는 70년대나 80년대 군대나 2000년대 군대나 다 그때의 그들에게는 어려운 과정이다. 그럼에도 자기 시간을 바쳐 감당할 수밖에 없으니 분단된 조국에 태어난 청년에게 군대는 나라를 지키는 일에 함께 한 숭고한 희생의 시기이면서 동시에 책임 있는 대한민국의 남자로 인정받는 통과의례라 해야 한다.

그러니 본인은 물론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요리조리 법망을 피해가며 갖은 수를 쓰는 국회의원들이 더욱 미워지고, 온갖 진단서를 끊어 들고 군 면제를 받는 정치가들을 때려 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이 솟아나지만, 그래도 나는 자식을 군에 보내 너희가 말뿐으로 떠드는 국토 수호라는 그 신성한 국민의 의무를 다하려고 한다는 그런 당당함을 가지려 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 하는 위로가 아니라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훈장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청문회에 나와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은 하면서 책임 있는 행동은 털 끝만큼도 없는 이들을 비교하여 볼 때, 비록 자신의 선택이 아닐지라도 피하지 않음으로 모범을 보였고, 자기의 아들 역시 군에 보낸 부모들 이야말로 이 땅의 진짜 책임을 다하는 시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여러 선배 부모들로 말미암아 지도자 복은 지자리도 없는 이 나라가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게 되니 자식을 군에 보낸 우리 모두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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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상념 속에 어느덧 입소식 행사가 끝났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선 아들의 등을 보며 나선 충장대에는 비가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우연히도 그날은 10월 1일, 국군의 날이었다.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다. 군에서 사회로 복귀하고 나면 군대라는 경험이 우리를 연결하는 끈이 되니 말이다. 그래서 남자들 모였을 때 군대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누가 그랬던가. ‘내가 군에 있을 때는…’으로 시작되는 군대 이야기에 남자들은 밤을 새어 술 잔을 기울이고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누구라도 어벤저스 엔드게임(Avengers End game)에 등장하는 영웅과도 같아지니 말이다. 아마 우리 아들도 또 그렇게 우리와 닮아 갈 것이다.
서울로 올라가는 KTX는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이 시간이면 아들은 군에서의 첫 식사시간을 맞겠지 하는 생각으로 시간을 온통 채워 버렸다. 하지만 아들을 군에 보내고 나서 한동안 상실감이 있어도 첫 휴가만 마치고 나면 그런 마음도 훨훨 날아간다는 것이 선배들의 경험이다. 입대 날에는 눈물 흘리던 엄마도 그 날 이후로 외박이라도 나오면 또 왔냐고 타박하게 된다고 하니까. 그래도 그렇게 타박할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태풍이 약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비는 크게 내릴 모양이다. 호찌민도 우기인데 비는 많이 올까. 아들에 대한 걱정을 덜어낸 자리로 호찌민에 두고 온 회사 걱정이 서울에 도착하자 마자 자리를 잡는다. /夢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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