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아가멤논’ 그리고 ‘오레스테이아’

아가멤논은 고대 그리스의 왕이자 장군이다. 트로이 전쟁에 출정할 때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배 위에서 목 졸라 죽인 다음 신에게 바쳤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딸을 죽인 남편에 대한 원한으로 싸여 있던 그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죽었다. 목욕탕에서 긴 전쟁의 피로를 씻고 있을 때, 아내의 정부情夫가 아가멤논에게 그물을 씌워 꼼짝 못하게 했고 그의 아내는 청동 도끼로 그를 두 번 내리쳐 쓰러뜨린다. 쓰러진 후 다시 한 번 내리쳐 죽였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비극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아가멤논과 그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 사이에는 세 딸과 한 아들이 있었다. 큰 딸 이피게네이아는 아가멤논이 죽여서 제물로 바쳐졌다. 둘째 딸 엘렉트라는 감정이 격하고 의지가 굳은 여인이었다.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남편인 아가멤논을 죽인 후, 엘렉트라는 아직 어린아이였던 동생 오레스테스를 믿을 수 있는 사람 손에 맡겨 다른 나라로 도망치게 했다. 어머니인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차마 아들인 오레스테스를 죽이지 못하겠지만 아이기스토스라면 어린 아이지만 커서 후환 덩어리인 오레스테스를 죽여버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딸 크리소테미스는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하며 부드럽다. 그녀는 언니인 엘렉트라가 이를 갈면서 복수를 생각할 때, 옆에서 달래 주고 복수를 포기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엘렉트라는 아버지 아가멤논의 죽음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팔팔한 엘렉트라는 어머니인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겐 눈엣가시였다. 둘은 매일 싸웠다. 클림타임네스트라는 엘렉트라에게 악담을 퍼 붓곤 했다.
“이 가증스러운 년아, 아버지를 여윈 게 너뿐이더냐. 이 세상에 가까운 사람을 잃은 이가 너 하나 뿐 인 줄 아느냐? 너 같은 것에게는 재앙이나 내려라. 제발 지하의 신들이 너를 지금의 슬픔에서 구해내지 말았으면…”
잠시 첨언하자면 여자 아이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즉 여아가 아버지에 대하여 가지는 강한 소유욕적인 애정을 칼 융은 ‘엘렉트라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엘렉트라의 이야기를 가지고 1막짜리 오페라를 만들기도 했다. 이 오페라는 1909년 드레스덴의 작센에 있는 궁전 음악당에서 초연됐다.
다시 비극으로 돌아온다. 다른 나라로 도망쳐 있던 남동생 오레스테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와 그녀의 정부情夫에 대한 복수를 위해 드디어 나타났다. 치밀한 계획 끝에 성에 들어와 방심하던 어머니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를 먼저 죽인다. 벌건 피를 본 오레스테스는 분노를 머금은 채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찾아 나선다.
“그때 문이 갑자기 열리고, 안에서 오레스테스와 발 밑에 쓰러진 아이기스토스가 발길에 차여 밀려들어온다. 손에 칼을 든 필라데스(오레스텐스의 친구)도 함께 들이닥친다. 시동은 도끼를 가지러 가다가 기겁을 하여 달아난다.
-오레스테스: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때,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땅에 엎드려 가슴의 옷을 찢고 젖가슴을 들이댄다)
-클리타임네스트라: 기다려라. 오레스테스. 이것을 보아라 내 아들아, 이 젖에 매달려 잠들면서 이빨 없는 잇몸으로 맛있는 젖을 빨지 않았느냐?”
오레스테스는 순간 망설였다. 그러나 분노가 이미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결국 자신의 어머니를 청동 도끼로 내리쳐 죽인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의 운명이 어머니를 죽게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죽어가던 어머니는, 자신이 낳아 기른 것이 독사였다고 중얼거린다. 그러자 오레스테스는 죽어가는 어머니에게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을 죽였으니, 받아서는 안될 벌을 받으라고’ 절규한다. 오레스테스는 반미치광이가 되어 자신을 저주하는 신들을 피해 다니다 결국 이를 불쌍히 여긴 아테나 여신에 의해 구제된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오레스테스는 그리스 신화 속에서 가장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사내 중의 하나다. 가장 비극적인 사내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후에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된 후 세상을 떠도는 오이디푸스라면,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죽이고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는 오레스테스는 두 번 째 비극남悲劇男쯤 될 테다. 운명이 이끄는 비극적 인생을 살다간 신화 속 주인공들은 많다. 그러나 스스로 죄임을 알고 그 죄를 의무로 짊어지고 끔찍한 죄를 범할 수 밖에 없도록 기계장치에 걸려든 사람들은 많지 않다. 안타깝게도 오레스테스는 평생 어머니를 죽인 죄악에 시달려야 했다. 죽이기 전에는 죽여야 하는 책임에 시달렸고, 죽인 후에는 살모(殺母)의 죄의식에 시달렸다.
흥미로운 건 인간의 법과 신의 법이 작용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의 법체계에 의하면 자신의 딸을 죽여 제물로 바친 아가멤논의 죄와 그 아가멤논을 죽인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죄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의 죄는 살인이다. 단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신은 오레스테스의 행동은 정당하다 보았다. 어머니가 저지른 죄를 오레스테스가 벌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
그리스 비극을 읽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규범과 우리가 젖어 있던 가치 전반에 대해 의문을 던져 본다. 사회적인 도덕과 윤리는 과연 정당한지, 나의 도덕은 일치하는지, 반드시 일치해야만 하는지, 왜 일치해야만 하는지, 내가 생각하는 도덕과 윤리는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고전, 길고 긴 세월을 거쳐 살아 남은 텍스트는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인류의 신경체계, 이야기 아직도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러한 금기와 터부에 대한 인간의 가치 판단에 관해 질문할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자신에게 한 번도 묻지 않은 불편한 질문 하나를 던져 보자.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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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산악인, 꿈꾸는 월급쟁이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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