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는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다. 관자는 관중 사후 각계각층의 사상가 집단이 700년에 걸쳐 편집된 정치철학서다. 춘추시대 재상이었던 관중에서부터 시작하여 전국시대를 오롯이 거치며 편집된 백과전서 격의 저작이라 보는 것이 옳겠다. 백성의 지지를 받고 융성했던 군주, 욕망과 분노를 관리하지 못하고 패망했던 군주, 사람을 잘못 써 벌어진 치명적인 일들, 사람 때문에 다시 일어난 국가 등 실제 사례를 통해 얻어진 금과옥조의 잠언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따라서 ‘관자’에는 당시 인류의 모든 지혜가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간단히 말하면 마키아벨리도 울고 갈 군주 바이블이다.
관자는 철저하게 실용과 현실 위에 서있다. 인과 예를 통해 백성들이 알아서 기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만들어진 뜨뜨미지근한 철학도 아니요, 엄격한 법의 테두리에 백성들을 가두어 놓고 냉엄한 형벌로 짜여진 법치주의도 아니다. 관자의 현실정치의 토대는 민심이다. ‘정치가 흥하는 것은 민심을 따르는 데 있고, 정치가 피폐해지는 것은 민심을 거스르는 데 있다’고 말하며 부민을 통한 부국을 추구한다. 관자 1권, ‘목민’에서부터 그 정체성을 확연히 드러낸다.
“무릇 영지를 지니고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가 가득 차도록 하는 데 있다. 창고가 가득 차면 예절을 알고 입을 옷과 먹을 양식이 풍족하면 영광과 치욕을 안다.”
관자의 정확한 현실 파악은 날카롭다. 인과 예를 아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먹고 살수 있는 다음에야 인과 예가 따를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관자는 이리 저리 둘러가지 않는다. 직선으로 말한다. 텍스트 내에 암시와 복선을 두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다. 특히, 나라를 다스리는 11가지 원칙은 명쾌하다.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생각되는지 가늠해 보시기 바란다.
“十一經(십일경) : 나라를 다스리는 열한 가지 원칙 1. 나라를 기울지 않는 땅에 두고, 2. 고갈되지 않는 창고에 곡식을 쌓으며, 3. 무진장한 창고에 갈무리하고, 4.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명령하고, 5. 백성에게 쟁론의 여지가 없는 관직을 맡기고, 6. 거역하면 반드시 죽는 길을 밝혀 두고, 7. 반드시 이익을 얻는 문을 열어 두고, 8. 불가능한 사업은 하지 않고, 9. 얻을 수 없는 것은 요구하지 않고, 10. 오래 지속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고, 11. 실행할 수 없는 정책은 행하지 않는다.”
나는 무릎을 친다. 지금의 사법, 행정, 입법의 3권과 사회 전반의 문제를 2,700년 전 그때의 말로 간단히 요약한다. 요약하는 것은 대부분은 그 속뜻을 알기 어렵지만 관자는 구구절절한 정치서보다 훨씬 명확하다. 이어서 구체적인 경제, 군법, 경제 등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는데 정확한 인과관계를 토대로 한다. 그 결론을 미리 사리에 맞게 예견하니 논리적이다.
“시장은 재화 유통의 중심지다. 따라서 모든 재화가 저렴하면 부당한 이득이 생기지 않고 부당한 이득이 생기지 않으면 온갖 일이 잘되며 온갖 일이 잘 되면 모든 물자의 쓰임이 절도 있게 된다. 이 때문에 시장의 일이란 사려 깊은 생각에서 생산되고 노력을 다함에서 성취하며 오만함에서 실패한다.”
뿐만 아니다. 정치, 경제, 군법과 부민도 중요하지만 관자에서는 소외된 약자에 대해 깊은 관심을 쏟는다. 어찌 보면 오늘날 복지체계보다 훨씬 진보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재상이 된 관중이 직접 지시하고 추진한 복지정책 9가지를 살펴보자.
“관중이 제나라에 들어와 40일째 되는 날까지 아홉 가지 시혜 정책을 다섯 번 행했다. 첫째는 노인을 어른으로 모시는 일, 둘째는 어린이를 사랑하는 일, 셋째는 고아들을 구휼하는 일, 넷째는 장애가 있는 사람을 돌보는 일, 다섯 째는 홀로 된 사람을 결혼시키는 일, 여섯째는 병든 사람을 위문하는 일, 일곱째는 곤궁한 사람을 살피는 일, 여덟째는 흉년 때 고용인들을 보살펴 도와주는 일, 아홉째는 유공자들에 대한 보훈이다.”
3천년 전 인간의 모습이나 지금 인간의 삶이나 다를 게 없다. 근본은 바뀌지 않는데 사람들 마음만 조급하다. 단지 편리해진 문명의 이기(利器)만 넘쳐났을 뿐이다. 사랑하고 연민하고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고 기뻐하는 일은 하나 달라진 게 없다. 관자는 바뀌지 않는 인간의 근본을 알아차린다. 범용적인 철학서이지만 3천년을 살아남은 관자의 힘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우리가 관자를 읽는 이유는 그때 그 시대의 사유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치공학적 의도로 그 시대 정치체계를 반면교사 삼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지혜와 사물을 꿰뚫는 통찰을 배우기 위해서 우리는 관자를 읽는다. 바위와 돌과 나무가 아닌,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를 위해 관자를 읽는다.
관자는 사소한 것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군주가 모종의 판결을 위해 사전에 알고 있어야 할 용어 정의도 세세하게 구비한다. 군주의 판결이 곧 법이고 강제력과 구속력을 가진 사회에서는 군주 개인의 판단방식은 사회의 질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심사숙고 했던 관자의 흔적을 보자.
“법칙, 현상, 법도, 교화, 결정, 마음씀, 계산이 이른바 칠법이다. 사물의 모습, 명칭, 그것이 존재하는 시간, 서로 비슷함, 종류가 같음, 그것이 발생하는 차례, 그 상태를 일러 현상이라 한다. (중략) 주는 것과 빼앗는 것, 험난함과 평탄함, 이익이나 손해를 보는 것, 어려운 것과 쉬운 것, 열고 닫는 것, 죽이고 살리는 것을 일러 결정지음이라 한다. 진실하고 성실하고 후하게 하고 베풀고 헤아리고 용서하는 것을 일러 마음씀이라 한다.”
위의 칠법을 가지런히 정리한 다음 비로소 군주는 판결과 형벌을 집행해야 한다고 관자는 말한다. 덧붙여 “재물을 쓸 때 인색하면 안 되고 노동력을 쓸 때 괴롭히면 안 된다.” 라고 말하며 사회적 갑질에 대한 일갈도 빼놓지 않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혀를 내두르는 독자들의 모습을 나는 상상한다.
관자에서는 군주는 물론 참모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간다. 군주와 신하 즉 참모의 역할은 구분되어야 하고 철저한 위임과 empowerment 가 중요하다고 역설하며 “군주가 아래의 일까지 살피는 것을 거슬림이라 하고 아래의 신하가 군주의 일까지 관여하는 것을 넘침이라 한다. 윗사람이 거슬리는 것은 어긋남이고 아랫사람이 넘치는 것은 거역이다.” 라고 말하면서 신하는 군주에 대해 “정황을 보고하되 정황에 맞는 명령을 내리지 않음을 인멸이라 하고 명령을 내리되 보고하지 않음을 단절이라 하고 정황을 보고하되 이르지 않음을 침해라고 하고 명령을 내리되 도중에 중지됨을 막힘이라 한다. 인멸, 단절, 침해, 막힘이 있는 군주는 그 대문을 닫고 그 방문을 지켜서가 아니라 정치에 시행되지 않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이 이르지 않음을 가림이라 하고 충신이 등용되지 않음을 막힘이라 하고 명령해도 시행되지 않음을 차단이라 하고 금지해도 중지되지 않음을 거역이라 한다.”
우리는, 숱하게 보아 왔다. 관자에서 말하는 단절, 침해, 막힘이 팽배했던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되는지를 우리는 두 눈으로 목도했다. 위정자들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만을 깊이 파지 말고 관자를 읽고 눈이 뜨이기를 바라는 건 괜한 기대일까. 머리는 차갑지만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 엄격한 법의 잣대를 가지면서 약자를 품는 사회, 모두가 잘 살지만 인과 예가 넘치는 나라, 관자를 보면 미래가 보인다.
(칼럼의 인용문은 ‘관자’, 관중 지음, 소나무출판사, 2004.11.03 발행 본에서 인용했습니다.)
장재용
작가, 산악인, 꿈꾸는 월급쟁이 / E-mail: dauac9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