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바 서양고전을 소개해 왔다. 기원전 1,300년 트로이 전쟁을 시작으로 소아시아와 서양의 패권싸움은 시작됐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라는 인류의 이야기 유산을 소개했고 기록하는 인간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이어서 지면에 실었다. 그리스가 지중해 연안의 패권을 장악했던 시기부터 꽃피기 시작한 ‘불완전한 민주주의’는 인간의 저 밑에 서식하는 욕망을 이야기하며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대표적인 비극 문학의 시작을 알렸다. 비슷한 시기 동양은 어땠을까? 동서를 오가는 통섭적 서평은 나의 궁금증에서 출발하지만 인류의 오랜 호기심이기도 하다. 동양과 서양은 서로 다르지 않다. 태어나 살아야 하고 내가 살기 위해, 살아있는 다른 것들을 먹어야 하는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과 그 질긴 삶의 방식은 다를 수 없다. 우리는 서양을 읽고 동양에서 배운다.
그리스인들이 ‘가난 때문에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바다로 나갈 때, 동양 정확하게 지금의 중국에서는 토호들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춘추전국시대로 불리는 이때 관중은 제(齊)나라를 춘추시대 5강 중 최고의 나라로 만든 사람이었다. 관자管子는 관중의 저서로 알려져 있지만 관중 사후 700년에 걸쳐 후대 사상가들이 관자의 사상체계를 집대성한 결과물이라 학자들은 주장하기도 한다. 관자는 사상서다. 병법서이고 철학서다. 읽기 전 우선 책의 두께에 기절할 만큼 놀란다. 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두껍다. 한글 완역본은 총 24권으로 편집되어 있다. 각 권마다 소제목의 꼭지가 대여섯 개로 구성된다. 주제의 폭넓음과 내용의 다양성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정치, 행정, 법, 경제, 철학, 교육, 군사, 자연, 과학을 불문하고 해박한 지식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 집단에 그대로 대입하더라도 전혀 손색없고 구태의연함이 없는 진보성을 자랑한다. 본격적인 책 소개와 서평 이전에 우리는 관중이라는 사람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야 필요가 있다. 관자는 관중을 이해하기 전과 후가 확연하게 차이 나는 책이기 때문이다.
관중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용주의 정치가였지만 관중의 젊은 시절은 인종지말자(人種之末子)에 가까웠다. 역대급 반전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젊은 시절, 친구와 동업하여 장사했으나 이문을 더 많이 챙겼고 세 번을 쫓겨났으며 싸움터에선 저 혼자 살자고 세 번을 몰래 도망쳤다. 그럴 때마다 관중에게는 한 사람의 친구가 늘 곁에 있었다. 어려운 시절 그와 함께 장사를 했던 포숙아라는 사람이다. 그는 관중이 이익을 더 가져가도 탐욕스럽다고 하지 않았다. 관중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이 더 어렵게 꼬일 때도 그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일을 하다 보면 잘될 때도 있고 꼬일 때도 있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함께 하던 곳에서 쫓겨나도 모자란 사람이라 말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받아들여질 만큼 좋은 관계가 아직 이루어질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싸움터에서 도망쳐 와도 그를 비겁한 자라고 탓하지 않았다. 관중에게는 살아서 모셔야 할 노모가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모시던 사람과 운명을 같이 하지 않아도 그를 의리 없는 인간이라 말하지 않았다. 작은 치욕을 참고 더 큰 일을 해낼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관중을 낳은 것은 그의 부모였으나 그를 알아 준 사람은 친구인 포숙아였다. 사람은 자신을 알아주고 믿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좌절하지 않는다. 그 한 사람이 없을 때 세상이 막막해진다. 관중과 포숙아의 우정이 바로 ‘관포지교'(管鮑之交) 알려져 전해진다.
하나의 일화를 더 들어보자. 제나라에 역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요리사였다. 언젠가 그가 모시고 있던 왕이 농담 삼아 ‘나는 다른 것은 다 먹어 보았는데, 갓난아이로 만든 찜은 먹어 본 적이 없다’라고 말 한 적이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요리사는 자신의 첫 아들을 쪄서 바쳤다. 또 이 왕은 여색을 밝히는 편이었고 질투도 많았다. 그들이 딴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잘 관리해 줄 사람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자 수조라는 사람이 스스로 자청하여 고자가 되어 후궁들을 관리해 주었다. 또 이 왕에게는 당무라는 사람이 있어 능히 사람이 죽을 때를 알아맞히고 왕의 지병인 피부병을 치료해 주었다. 또 이 왕에게는 아주 근면하고 재치 있는 개방이라는 비서가 있었다. 이 사람은 너무도 성실하여 왕을 모신지 15년이 지났건만 한 번도 부모를 뵈러 고향에 가지 않을 정도였다. 왕은 이 충성스러운 측근들에 둘려 싸여 행복한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라의 재상이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다. 40년 동안이나 왕을 보필해온 현명한 신하였으므로 왕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재상의 병 문안을 가게 되었다. 가서 보니 재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지도 못할 만큼 중병이었다. 왕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만일 그대에게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별도로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는 지 물었다. 나이 먹은 재상은 그렇지 않아도 말하고 싶었으나 혹 왕이 듣지 않을까 망설여지는 것이 있다고 대답했다. 왕은 꼭 지킬 테니 말해 보라고 했다. 늙은 재상은 역아와 수조 당무 그리고 개방을 멀리하라고 말했다. 왕이 놀라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늙은 재상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역아는 왕을 위해 제 자식을 쪄서 바쳤습니다. 제 자식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왕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수조는 왕을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되어 후궁에서 벼슬을 살고 있습니다. 제 몸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왕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당무는 알지 못하는 운명과 천생의 약점을 이용하여 왕께 접근하였습니다. 근본을 지켜 몸을 다스려야지 당무에게 기대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개방은 15년 동안 고향의 부모를 찾지 못했습니다. 제 부모조차 위하지 못하는 자가 왕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겠습니까? ‘거짓은 오래가지 않으며 허망한 일을 곧 들어난다’ 하였습니다. 정상적인 일을 꾸준히 계속할 수 없는 자들은 죽기 전에 언젠가는 마각을 드러내는 법입니다.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
왕은 재상이 죽자 그의 충고에 따라 이 사람들을 미워하여 멀리했다. 그러나 역아가 없어지자 음식이 맛이 없어졌다. 당무를 쫓아 내자 피부병이 다시 돋기 시작했다. 수조를 쫓아내고 나니 후궁의 풍기가 문란해 졌다. 공자 개방이 사라지자 정부의 사무가 지체되었다. 왕은 이들을 다시 불러 총애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왕은 병에 걸렸다. 당무는 ‘왕은 모년 모월 모일에 죽게 된다’는 헛소문을 지어 퍼뜨렸다. 이어 역아, 수조, 당무는 서로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궁궐 문을 막고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음식물을 일체 들여보낼 수 없도록 막았다. 왕은 굶어 죽게 만들 작정이었다.
죽음을 앞 둔 왕이 길이 탄식했다. “성인의 말이 역시 옳았구나. 죽은 자가 아무 것도 모른다면 좋겠구나. 만약 알게 되면 내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있는 재상을 만난단 말인가?” 왕은 죽은 다음 재상이 자기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이 부끄러워 백포로 얼굴을 가리고 죽었다. 왕이 죽은 지 열 하루가 지나자 시체에서 생긴 구더기가 방문 밖까지 기어 나갔다. 그제서야 장사를 지내게 되었다. 한때 패자로서 천하에 군림하던 왕의 최후는 매우 비참했다. 늙은 재상의 이름은 관중이고 비참한 최후를 마친 왕의 이름은 춘추시대 패자의 하나였던 제환공이었다. 다음 호에서 ‘관자管子’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자. (소개된 일화는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 인용했으며 ‘구본형 칼럼’에서 일부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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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용
작가, 산악인, 꿈꾸는 월급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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