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3주 넘게 있으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고,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 많으니 아이들이 쑥 커서 돌아온 것 같다. 표현력도 좋아지고 이해의 폭도 넓어져서 웬만한 것은 말로 전달하고 해결할 수 있게 되었으니, 엄마의 육아 스킬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야 할 때가 왔다. 무논리, 협박성 멘트, 고함지르기, 약간의 거짓말 등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대하고 진실로 소통하는 고객 감동 육아 서비스 정신을 갖출 때이다.
이렇게 하루하루 성장하는 아이들인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변하기도 한다. 시우는 기질상 순하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거부감도 적으며 둥실둥실한 아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 다녀온 뒤로 유치원 가는 아침마다 ‘피곤하다. 힘들다. 공부가 힘들다.’ 등 갖은 핑계를 대고 울고 불고 했다. 정작 유치원 가서는 엄청 신나게 놀고 오면서 말이다. 며칠 살펴보니, 등원 전에 보던 TV가 문제였다. 등원 시간이 되어 TV를 끄면 그 때부터 기분이 나빠져서 사춘기 반항아처럼 구는 것이었다. 저녁에도 마찬가지였다. 저녁밥 먹고 정리 후 시간이 나면 TV를 1시간 정도 시청했는데, 끌 때가 되면 ‘오늘은 많이 못 봤다. 시연이가 좋아하는 것 못 봤으니 소피루비 2개를 더 봐야 한다.’ 등 난리를 부려 2시간을 보기도 하고, 다음날 아침에는 눈 뜨자 말자 ‘엄마, TV 좀 봐도 되요?’ 한다. 말은 질문형이지만 보고나 다름없다. 리모콘으로 켜고 끄고 자기 보고 싶은 거 고르고 혼자서 다 할 줄 아니까. TV 보는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적게 보든 많이 보든 TV를 끌 때마다 이 난리니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는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는 TV 보기에 낭만이 있었다. 아침엔 뽀뽀뽀과 함께 시작하고, 오후에 학교 다녀와서 5시 전후로 TV 앞에 앉아서 광고와 함께 어린이 프로그램을 기다리는 즐거움이 있었다. 토요일은 반일 수업이어서 라면 먹으면서 어린이 외화시리즈를, 일요일 아침엔 학교 안 가는 날이니 아침도 먹기 전에 TV 앞에 앉아서 어린이 명작만화를 기다렸다. 천사들의 합창, 브이(V), 맥가이버, 천재소년 두기, 비버리힐즈 아이들과 같은 외화시리즈, 아기공룡 둘리, 달려라 하니, 날아라 슈퍼보드, 베르사유의 장미와 같은 만화시리즈는 내가 즐겨보던 프로그램이었다. 당시에는 본방 사수 외에는 방법이 없으니 그 시간만 되면 TV 앞에 앉아서 광고가 끝나기만을 기다렸고, 내가 보는 프로그램이 끝나면 채널은 가차없이 어른용 프로그램으로 넘어 갔다.
지금은, TV에 어린이 채널만 해도 4-5개는 되고 유투브에서는 우리 아이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프로그램을 찾아서 또는 자동 연관으로 계속해서 볼 수 있다. 이제는 어른들이 만드는 유투브 채널에 어린이들이 직접 출연하니 우리 아이들은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눈을 뗄 수가 없다. 초등학생들 희망직업 1위가 유투브 크리에이터라고 하니 시대의 흐름은 어쩔 수 없지만, 아직 유치원생들인 우리 아이들도 벌써 TV와 유투브에 중독 아닌 중독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그래서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TV 전원을 끄는 것으로!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고 어떤 해결책이 좋을까 신중하게 고민한 뒤 내린 결정은 결코 아니다. 시우가 어찌나 징징대던지 듣기가 싫어서 홧김에 이제 우리집에서 누구도 TV를 볼 수 없으니 그런 줄 알아라 확 고함지르며 코드를 뽑아버렸다. ‘곧 팔아버릴거다’ 라고 으름장도 놓았다. 처음에는 엄마 왜 그러냐며 울고불고 했다. 다음날에는 ‘엄마, 티비 진짜 팔거예요?’라도 묻기도 하고, ‘엄마 아빠는 우리 잘 때 티비 보잖아요.’ 라며 엄마를 슬쩍 떠 보기도 하더니, 삼일 째 되는 날에는 ‘엄마, 그럼 유치원 안 가는 날에만 볼게요.’ 라며 협상을 시도한다. 앞으로 TV 얘기 안 꺼내면 주말에 틀어줄 수도 있다는 희망적 뉘앙스를 풍기며 답했더니 지금까지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오늘이 티비 코드를 뽑은 4일째 되는 날이니 이제 이틀만 더 지켜봐야겠다. 어제 오후에는 갑자기 책장 구석에 놓여있던 공룡퍼즐을 들고 와서 끼어 맞추기를 하는데, 할 일이 없으니 이것 저것 찾아 다니는 게 아닌가 싶어 내심 뿌듯(?) 하기도 했다.
사실 시우가 TV에 집착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거다. TV나 유투브를 틀어주면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요구가 없으니, 둘이 싸우지 않으니, 그 시작은 엄마 편하자고 틀어준 거다. 거기에다가 요즘엔 끝없이 볼 수 있는 환경까지 갖추어져 있으니 아이로서는 그 재밌고 신나는 기기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겠지. 나 또한 모든 유해한 것들을 차단하면서 아이들 키울 수는 없다는 생각이고, TV와 유투브 같은 시청각 매체가 무조건 유해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처음으로 들인 빨간 다이얼 전화기를 아직도 기억한다. 불과 30년 만에 그 유선 전화기가 무선 스마트 기기로 발전했고, 우리 아이들은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이 기기를 손가락으로 터치하여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게 된 아이들이다. 그래서 아예 멀리 해서 살 수 없다면 즐길 줄 알고 절제하여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미 절제력을 잃어가고 있는(아니, 아직 절제력이라는 것을 갖추지 못한) 시우에게 홧김에 뽑은 전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는 모르겠다. 어제의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주중에는 TV와 유투브 없는 삶을, 주말에는 적당한 시간 동안 TV를 시청하며 엄마의 자유와 아들의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런지. 혹은 아들의 변심으로 TV를 팔아버리게 되는 상황이 올지. 또는 엄마의 편안함을 위해 다시 무한 TV 제공의 시간으로 돌아갈지. 아직은 미지수다.
지금까지 시우의 TV 사랑 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 속에는 아이의 눈으로 본 어마어마한 통찰력이 숨어 있다. TV가 더 보고 싶어 유치원에 안 가겠다고 울던 날, 나는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하여 조곤조곤 설명했다. “엄마도 TV 보고 싶고 좋아해, 하지만 엄마가 TV만 보고 시우 밥도 준비 안 하면 좋겠어? TV 보느라 시우 얼굴도 안 보면 좋겠어? 아니지~ TV 볼 때는 즐겁게 보고, 유치원 갈 때는 TV 끄고 즐겁게 가야지. 그치?” 여기까지는 울먹울먹하면서도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설득력을 높이려고 한 마디 덧붙였다. “시우야, 아빠도 TV 본다고 회사 안 가고 그러지 않잖아.” 했는데, 시우가 참고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리며,
“아빠는 핸드폰으로 맨날 보고 싶은 TV 다 보잖아. 으앙~~~~~~~~~~~”
대성통곡을 하고 그날은 유치원 등원차량을 타지 못했다. 마지막 말은 안 했어야 했나 보다.
J.Sai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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