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사 세월에 맛이 간 나도 엄격하게 말하면 돈을 벌기 위해 베트남까지 왔으니 한국 사람이나 베트남 사람이나 젊은 청춘이나 가르치는 선생이나 돈을 좇다 죽어가는 속물인 것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듯하다. 7년 전 <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란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어 도서판매 시장을 잠시나마 호경기로 만든 적이 있었다. 획기적으로 쉽게 돈 버는 방법이라도 가르쳐 주는 줄 알고 사 보았지만, 내용이란 것이 “부자 아빠는 좋은 아빠, 훌륭한 아빠, 똑똑한 아빠이고 가난한 아빠는 나쁘고 무식하고 자식에 대한 교육 방법도 잘못되었으니 결국 부자가 되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일상에 “돈” 이란 것은 삶의 최대 아젠다 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돈은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돈은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대신 해줄 수도 있고 사랑스런 남편으로, 훌륭한 아빠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돈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모두가 돈을 많이 벌고 싶지만, 모두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구의 0.3%밖에 되지 않는 유대인이 세계 100대 기업의 40%를 차지하고 전 세계 9%의 리더가 89%의 부를 독식하고 있기에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에서 오늘도 밤이 다 새도록 찍어내고 있는 달러가 나에게까지 공평하게 돌아올 가능성은 없다. 세계의 리더들은 돈을 가진 자가 먼저 차지하도록 제도화하였고 그들의 주머니가 차고 넘치면 흘러내리도록 만들어 놓았지만, 이 또한 그들의 주머니만 찰 정도의 통화량을 조정하기에 못 가진 자가 가진 자가 될 확률은 희박하다.
제목을 “화려한 귀국”이라 적어 놓고 돈 이야기만 한다고 생뚱맞게 생각하겠지만, 필자가 교민들의 화려한 귀국에 대해 적고 싶어 몇몇 지인들에게 무엇이 “화려한 귀국”인지 생각을 물어보았다. 대부분의 대답이 필자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의 학기말 시험의 답지와 같이 어디에 쓰겠다는 것은 다르지만 “돈을 많이 벌어”라는 전제 조건은 동일 하기에 “화려한 귀국”의 내용이 돈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다. 구멍가게 같은 사업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필자 또한 돈을 많이 벌지 못한 89%의 인간에 속하기에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나에 대한 정답을 여기서 제시할 수는 없다.
물론 돈을 아주 쉽게 그리고 많이 벌 수도 있는 방법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방법은 글의 끝 부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확실한 것은 연간 5.5% 성장을 하고 있는 베트남 땅이 한국 보다는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수치가 말을 해 주고 있다. 따라서 만약 당신께서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베트남을 선택했다면 조금은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오 사장” 처럼 나라는 잘 선택한 것이라 말해 주고 싶다.
한국인 “오 사장”은 그의 나이 40대 후반에 한국에서 밀려났고 그가 선택한 베트남으로 왔다. 그냥 한국 나이로 퇴물이 되었기에 밀려난 것이 아니라 8억이 넘는 채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가 선택한 베트남으로 밀려났고 중학생인 아들은 그의 어머니 집이 있는 밀양으로 밀려났으며 그의 부인은 그녀의 친정으로 자발적으로 밀려갔다. 오 사장에게 돈을 빌려준 누나와 형은 그와 원수가 되었고 오 사장과 원수가 된 형제는 논밭을 팔아 마지막까지 도와준 그의 어머니 집마저 쳐다보지 않았다. 오 사장이 베트남 항공 서울발 이코노미 구석 자리에 앉아 8억의 빚더미와 5백만 원도 되지 않는 현금을 들고 호치민으로 올 때는 다른 한국인 대부분이 가지고 있을 법한 희망도 용기도 열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 사장은 그냥 한국에서 밀려 베트남에 온 것이다. 그는 당시 한 달 250불에 하루 세끼를 제공하는 탕롱의 하숙집에도 있었고 까바잠의 하숙집에도 있었다. 그는 얼마 가지지 않은 돈으로 탁자가 3개밖에 없는 길거리 카페 앉아 하숙인들과 함께 까페다도 마셨고 막시막 사거리 우측 편에 야간에만 설치되는 길거리 식당에 쭈그리고 앉아 타이거도 마셨다. 40대 후반인 오 사장의 첫 번째 베트남 직업은 하숙집의 까페다 동료가 소개해준 관광 가이드였다. 할 일 없어 시작한 이 직업으로 생활비를 벌었으며, 할 일 없어 시작한 이 직업으로 한국의 새로운 인맥을 만들었으며, 할 일 없어 시작한 이 직업을 잘하기 위해 40대 후반에 인사 대에서 베트남어를 배웠고, 이 직업 때문에 베트남 구석구석을 탐방하였다.
오 사장은 할 일 없어 시작한 이 직업 때문에 고객이 자기 전에 잠든 적이 없었고 어떤 고객보다 늦게 일어나 본 적이 없었기에 가이드 일을 시작한 후 하루 다섯 시간 이상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이런 오 사장을 가이드로 이용한 고객들은 그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오 사장의 두 번째 직업은 공장 부지를 소개하는 부동산 중개업이었다. 한국에서 관광 왔던 고객이 소개한 손님의 공장부지를 소개시켜 주며 시작한, 사무실도 없는 부동산 중개업은 그의 사업기반에 종잣돈을 만들어 주었고 그 돈으로 그가 부지를 알선한 기업들의 포워딩 서비스를 베트남 직원 1명을 데리고 시작하였다. 이렇게 작게 시작된 그의 포워딩 사업은 오 사장에게 엄청난 돈을 만들어 주었으며 베트남에서의 세 번째 직업이자 지금까지 하고 있는 마지막 직업이 되었다.
이 대박 사업은 7년 만에 한국을 밀려 떠날 때 같이 실어온 8억의 빚을 다 갚아 주었으며 그의 어머니에게는 새집을 지어 주었고 3년 전부터는 원수가 된 그의 누나와 형들을 포함한 모든 가족이 어머니가 있는 밀양에서 명절을 같이 보내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모든 가족 중에는 친정으로 스스로 밀려간 그의 부인도 있게 해주었다. 오사장은 요즘 4군 지역에 엄청난 돈을 들여 온 가족이 모여 살 수 있는 집을 짓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구정 때는 호치민 발 인천도착 한국행 항공기의 일등석에 앉아 “화려한 귀국”을 하였기에 거지가 되어 호치민에 내린 “오 사장”이 7년 만에 떼돈을 벌어 귀국했다는 소문이 탕롱 골목의 구석구석까지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죄송하지만 위의 “오사 장의 화려한 귀국”에 대한 이야기는 가공된 것이다. 요즘 워낙 필자의 주위에 “슬픈 귀국”이 많고 힘들어하는 교민들이 많아서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보았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돈을 아주 쉽게 그리고 많이 벌 방법은 부모님을 잘 만나는 방법밖에는 없다. 하지만 부모님은 선택 여지가 없기에 이미 기회는 없다고 봐야 한다. 이제 남은 방법은 사람을 잘 만나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이는 사람을 아무리 잘 만나도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 오 사장처럼 열심히 준비하면 반드시 동쪽에서든 남쪽에서든 탕롱에서든 푸미흥에서든 귀인이 나타날 것이다.
운칠기삼(運七氣三)이란다. 나폴레옹은 장교를 뽑을 때 사람의 운기(運氣)부터 보았다 한다. 사람을 아무리 잘 만나도 성공요소의 70%를 차지하는 운이 없다면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시라 운이란 것은 시기적인 문제이지 누구에게나 오게 된다.
언제 오고 있는 것인지도 조금만 신중하면 누구나 스스로 알 수 있다. 사람을 잘 만났을 때가 운이 오는 시기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이 몰리지만 누가 잘 난 사람인지 모를 때와 여러 기회들이 동시에 찾아와 판단이 어려울 때는 운이 오는 시기가 아니다. 주위의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지 않고 올바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을 때는 운이 오는 시기가 아니라 “당시 귀신에 씌었다”란 시기이다. 반대로 달콤한 말들이 너무 쉽게 다가올 때도 “귀가 얇아진” 시기이지 운이 오고 있는 시기는 아니다. 운이 오는 시기는 당신께서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준비가 되면 사람이 올 것이고 사람이 올 때 운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기회는 찾아올 것이다. 이때 대업을 도모하라. 당신은 “화려한 귀국”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 사장” 처럼.
작성자 : 최 은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