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5월은 푸르다. 신록(新綠)이라, 새로 돋은 잎들의 푸르름이 계절의 햇살 아래 반짝이고, 수줍게 봉오리를 열던 꽃들도 경쟁하듯 저마다의 잎을 펼치고 꽃망울을 터트리는 계절이다. 그러니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부르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오월의 햇살은 아지랑이 같다. 강렬하지 않고 뜨겁지 않지만 취하게 한다. 그 속에 푸름과 반짝임이 몽롱하게 섞여 있다. 그 안에 서면 색깔이 묻어난다. 살아있는 색깔의 이름이 신록이라 할까. 이런 신록은 햇살 속에도 있고, 나무 위에도 있고, 풀 위에도 있고, 내 안에도 머문다. 보행로를 따라 올라가는 세종대왕 기념관 주위가 이런 신록으로 가득했다. 시야 너머 다다를 수 없는 곳까지 푸르고 맑은 서울, 오월의 정오였다.
마냥 취해 푸르름을 예찬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봄 날을 즐기기 위해 일부러 서울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세종대왕 기념관을 방문하기 위해 그런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 곳에서 열린 한 특별한 혼례식에, 특별한 참석을 위해 걷는 길의 신록이 그렇게 좋았을 뿐이다. ‘특별한’이라는 수사를 더한 그 날의 특별함은, 봄날의 푸르름 같은 한 베트남 아가씨가 한국에서 짝을 만나 혼례식을 가지기에 더욱 특별했다.
호아(Hoa) 양은 우리 회사 베트남 법인의 직원이었다. 호아라는 그녀의 이름은 물론 가명이다. 여기에 동의없이 진짜 이름을 적는 것도 부적절하겠지만 호아라는 이름이 꽃을 뜻하는 베트남 이름이니 봄날에 적절하여 택한 이름이다.
그녀는 내가 멘토링하는 베트남 청년들의 모임에 2012년부터 회원이었고, 인문사회과학대를 다닌 영특하고 예쁜 처녀였다. 졸업 후 그녀는 우리 베트남법인에 입사하여 행정실에 근무해 왔다.
그녀는 영어를 잘했고(원래 영어가 전공이었다.) 상황을 분별할 줄 하는 예의 있는 청년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회사 운영의 판단을 돕는 여러 일들을 조력해온 좋은 직원이었다.
몇 개월 전 그녀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린 후 들어왔다. 얘기할 게 있다고 했다. 좋은 직원들이, 조용히 얘기할 게 있다고 면담을 요청해 오면 나는 반사적으로 겁이 난다. 혹시 그만 두려고 하나?
어렵게, 어렵게 뱅뱅 둘러 꺼낸 그녀의 이야기는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면 축하할 일 아닌가? 그런데 그게 아닌가 보다. 상대가 한국 사람이란다. 묘했다. 언제 한국 사람과 만나 교제를 했지? 얘기를 꺼내기 시작하기 전 머뭇거린 시간의 두 배를 지내고 나서야 남자가 누구인지 밝혔다. 이럴 수가!
2017년 일년 간 단기적으로 본사 직원의 파견근무가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베트남법인에 대형 프로젝트들이 발생하면서 본사와의 교감을 위한 일시적인 조치였다. 그녀의 반려자가 된 친구는 이 때 우리 법인에서 근무했던 본사의 직원이었다.
그런데 파견 기한이 3개월쯤 남았을 때 내가 단기 파견자들에게 이런 지시를 했다.
지금부터는 자유롭게 일해라. 가능한 베트남 직원들과 더욱 어울리고, 휴일을 계획을 세워 충실하게 보내라. 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아.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우리와 다른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과 어떻게 하나의 가치 아래 함께 일할 수 있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여러분에게 주는 숙제이다. 그러니 마음을 열고 남은 기간 동안 그들 안에 들어 가길 바란다. 여러분의 인생에 큰 경험이 될 것이야.
그는 정말로 그렇게 했다. 열심히 직원들의 모임에도 가고 도움도 구하고 서로 어울리더니, 미래의 신부가 된 우리 직원과 마음이 통하고, 더 나아가 그녀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한 모양이다. 요즘 청년들은 만만치가 않다. 함부로 조언할 일이 아닌가 싶다.
혼례가 진행되는 동안 신랑이 소속된 설계실의 본부장에게 툴툴대며 한마디 했다.
우리 핵심전력을 그냥 빼내어가면 어떻게 하나? 앞으로 본사 파견자들은 특별 통제 대상이야.
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둘 사이에 고리를 연결한 것도 알고 보면 나인걸,
그녀는 자신이 발표하기 전까지는 비밀을 지켜 달라 했다. 외국인과의 결혼이므로 도중에 어떤 장애가 생길지 모른다고 우려했고 부모님들과 인사의 과정도 걱정했다. 하지만 양가에서는 둘의 결혼을 큰 축하로 반겼다. 그렇게 둘은 베트남에서 먼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잘 마치고 한국에 가기 전까지 회사에 다니기로 한 그녀가 다시 한번 내 방 문을 두드렸다.
그녀에게 마지막 한가지 남은 걱정이 있었다. 한국에서의 혼인식 때문이었다. 호아 양은 아버지가 안계셨다. 어머니는 오빠와 고향에 살고 있는데 몸이 불편하여 한국을 방문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국에 방문할 수 있는 그녀의 친지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내게 가족 자격으로 참석해 줄 것을 부탁했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답해 주었다. 그것이 이 신록을 즐기게 된 특별한 배경 이야기이다.
세종대왕 기념관에서의 결혼식은 전통혼례로 치루어졌다. 절차가 많이 간소화되어 부모의 역할이 별로 없음은 다행이었다. 그런데 앞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외에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혼례식을 지켜보는 내내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딸을 시집 보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묘한 감정의 연장선상에 있을까? 주변을 가득 채운 오월의 푸르름이 갑자기 슬프게 여겨졌다.
기분을 떨치기 위해 휘이 둘러보았다. 예식과 주변의 신록이 어우러진 모습은 그냥 하나 같았다. 경계가 없이 하나 같았다. 사랑도 그렇구나, 사람의 일도 그렇구나. 경계를 허무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구나.
누군가 그랬다. 사랑은 장님이 되는 거라고. 그런데 아무 것도 뵈지 않는 것처럼 불붙어 사랑해도 시간이 지나면 시력이 회복된다. 상대의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이 다 보인다. 오늘의 신록이 어제처럼 싱그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더디게 나타나길 바란다. 그리고 그 때가 오면 불타는 연정보다 서로에 대한 더 깊은 존중의 사랑이 마른 가지 위로 움트는 싹처럼 피어나길 바란다. 부모를 대신한 마음으로 한국으로 딸을 떠나 보내는 축복의 메시지를 오월의 푸르름에 적셔 보낸다. /夢先生
박지훈
건축가,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정림건축 베트남 법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