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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베트남 역사를 벗어나서, 한국역사로 잠시 돌아왔습니다. 베트남 역사가 외국인 입장에서 아직은 다루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에, 당분간 전종길의 역사칼럼은 한국사를 위주로 다루겠습니다.
인조반정과 세자책봉
조선시대 비운의 세자라면 사도세자를 떠올리게 됩니다.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사망한 세자입니다. 조선 후기 개혁군주 애민군주로 칭송받는 정조대왕은 바로 사도세자의 아들입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억울한 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가족들은 무사했고 아들은 조선 22대 국왕으로 등극했으니 불행을 자신의 대에서 끓고 후손에게 불행을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신원을 해소하려 노력했고 사도세자를 음해한 세력들을 제거합니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경우는 사도세자 보다 훨씬 불행한 결과를 맞이합니다. 조선 최초의 신지식 소현세자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그토록 큰 불행을 겪었는지 400년 전으로 돌아가서 살펴봅시다.
소현세자가 12살 되던 해 1623년 조선에는 큰 사건이 벌어지는데 바로 인조반정입니다. 정권에서 소외된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옹립한 사건인데요 반정의 명분은 재조지은을 (임진왜란 때 조선을 살려준 명나라의 은혜) 잊고 오랑캐 청나라와 국교를 맺은 죄, 서모 인목대비 폐모사건, 두가지 죄를 지은 금상 (광해군)을 폐위하고 훌륭한 새 임금 능양군 (인조)를 추대한다는 것이 반정의 명분입니다. 반정의 명분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단은 접어두고 소현세자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겠습니다.
인조반정 2년 후 인조의 장남 ‘이왕’은 14세 때 세자로 책봉 받습니다. 세자 책봉 2년 후 16세 때 한살 연상 강씨와 혼인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자빈 강씨 (강빈) 입니다.
소현세자와 강빈 부부는 처음에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소현세자가 마음에 두고 있었던 여인은 윤씨 소녀인데 서인들은 삼간택까지 통과한 윤씨를 배척하고 다시 간택령을 내려 선택한 세자빈이 바로 강석기의 딸 강빈입니다. 서인들이 이토록 윤씨를 배척한 이유는 [국혼물실] 입니다. 즉 국혼은 놓치지 않겠다는 뜻인데 왕비는 서인들이 배출하겠다는 말입니다. 정치적 희생양이 된 윤씨 소녀는 자결합니다. 당시의 풍속은 삼간택에 들었다가 탈락한 여자는 팔자가 드세다 하여 평생 수절하고 살아야 합니다. 소현세자가 흠모했던 윤씨가 자결하자 소현세자는 많이 안타깝게 생각했나 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강빈의 현명한 처신으로 소현세자의 마음이 강빈에게 돌아선 듯합니다. 심양에서 볼모생활을 할 때는 금슬이 아주 좋았다고 합니다.
병자호란과 암울한 미래
소현세자가 25세 되던 해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합니다. 청 태종 홍타이치는 장군 용골대에게 12만 군사를 주고 조선왕의 항복을 받아 내라고 명령합니다. 소설 ‘남한산성’의 내용대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으나 얼마 못 견디고 항복합니다. 인조의 항복을 받으려고 조선에 온 청 태종에게 인조는 삼전도에서 (지금의 잠실) 삼배구고두의 (세번 고개를 숙이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식) 치욕적인 항복을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삼전도의 굴욕’ 이라고 표현합니다. 삼전도 항복으로 소현세자와 강빈은 봉림대군 (후일의 효종) 부부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갑니다.
삼전도 항복 이듬해인 1637년 2월 8일 소현세자는 300명의 일행과 함께 볼모의 길을 떠나고 아버지 인조는 아들 세자가 못내 안쓰러워 경기도 고양 창릉까지 배웅을 합니다. 이러한 부자지간은 9년 후 정적으로 돌변해서 비극을 연출합니다. 심양으로 가는 2개월의 여정은 소현세자 부부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한 기간입니다. 궁궐 생활이 전부였던 소현세자 부부는 백성들의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고 힘 없는 국가의 의미를 느끼게 됩니다.
인조반정의 명분이 친명 반청에 있으니 광해군의 실리외교와 다르게 서인들은 망해가는 명나라에게 충성을 다했고 청나라에는 노골적인 반대를 했습니다. 명나라와 마지막 일전을 앞둔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후방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 병자호란입니다. 이렇다 보니 병자호란은 조선이 자청한 전쟁입니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 반정의 명분은 학정을 일삼고 백성을 괴롭히는 폭군을 몰아내는 것인데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반정은 소중화 사상에 의한 명나라 의리론과 강상의 법도에 (성리학적 유교 논리) 의한 반정이다 보니 자가당착에 빠져 국란을 자초한 결과입니다.
소현세자는 이러한 서인들의 모순을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소현세자의 정책은 백성을 위하는 힘있는 국가를 지향하게 되고 이러한 소현세자의 정책은 서인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반발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득권의 반발로 소현세자의 미래는 암울합니다.
노예해방과 경영인으로의 각성
심양에 도착한 소현세자 부부는 조선인 노예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밤잠을 설칩니다. 당시 집권당 서인들은 백성들의 고통은 외면하고 유교적 명분론과 정권 유지에 집중합니다. 이에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나라의 중재를 자청합니다. 즉 우리 역사상 최초의 대사 역할을 합니다. 소현세자는 조선인 포로 구출을 위해 조선과 청나라 양쪽으로 경비를 요청합니다. 또한 세자빈 강씨는 자신의 패물을 팔아 조선인 노예를 구합니다. 당시 노예시장에서 거래되는 조선인 노예의 가격은 은자 45냥 요즘 돈으로 300만원 미만의 가격입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5만명의 조선인 포로가 노예시장에 풀려서 공급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조선 정부는 예산 부족으로 심양의 세자관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청나라는 조선 세자관 경비 중단을 통보하고 대신 농토를 줄 테니 직접 경비를 조달하라고 했습니다. 낙담한 세자가 아내와 의논하니 세자빈 강씨는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합니다. “아마도 청나라는 조선의 우수한 농사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 농토를 준 것 같습니다. 이기회에 농사를 지어 남는 이문으로 무역을 하면 세자께서 원하시는 조선인 포로 구출과 정치자금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자께서는 청나라 고관들과 친분을 가지세요 훗날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강빈의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구출한 조선인 포로들은 일정기간 농사를 지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 품질이 좋은 쌀을 생산하여 중국 쌀보다 몇배 비싼 값에 청나라 고관들과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농사 지어서 번 돈으로 세자빈은 조선의 인삼 수달피 표범가죽 등을 구입하여 다시 비싸게 팔았습니다. 당시로는 획기적인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경영의 탄생입니다. 그러나 일반 상인들과 차이는 세자빈 강씨는 장사의 이문을 전부 조선을 위해서 사용한 점이 일반 상인들과 다릅니다.
그러나 조선의 집권당 서인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우선 강상의 법도에 (유교 윤리) 어긋나고, 왕족이나 양반들은 직업을 가질 수 없는데 세자빈은 천한 장사를 해서 이문을 남긴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서인들이 불안한 진짜 이유는 돈과 실력을 가진 세자가 즉위하면 유교논리가 아닌 현실 위주의 정치를 하고 정권을 잃을 까봐 두려운 서인들은 세자빈을 비난합니다.
변화의 꿈을 앉고 7년만의 귀국, 사라진 부국강병의 길
소현세자가 볼모생활 만 7년을 넘긴 1644년 청나라는 명나라 수도 북경을 공격합니다. 청나라의 실권자 도르곤 왕은 마지막 전투에 소현세자와 동행합니다. 청나라의 힘을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소현세자는 명나라 멸망을 지켜보며 부국강병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 했습니다. 아마도 즉위 후 조선의 미래를 구상했을 듯합니다. 또한 새로운 학문과 지식을 갈망하던 소현세자는 서양인 선교사이자 과학자인 아담 샬과의 만남은 유교만 숭상하던 조선의 단점을 보충할 묘수를 찾은 것으로 여깁니다. 매일같이 만난 두사람은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귀국 허락을 받은 소현세자는 1645년 아담 샬에게 천주교, 천문, 과학 등 많은 서적을 가지고 조선으로 귀국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인조는 아들 소현세자를 의심합니다. 청나라의 힘을 빌려 인조 자신을 밀어내고 양위를 받으려 했다고 의심합니다. 귀국 며칠 후 소현세자는 급사합니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석연치 않은 면이 많습니다. 타살로 의심되는 점이 많죠. 또한 소현세자가 죽자 이듬해 인조는 며느리 강빈도 억지 죄명을 씌워 폐 서인 후 사약을 내려 죽이고 며느리 집안도 도륙을 냅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 즉 인조 자신의 어린 손자 셋을 제주도로 유배 보냅니다. 당시 소현세자의 큰아들 석철은 12살, 둘째 석린은 8살, 막내 석견은 4살입니다. 석철과 석린 둘은 유배가서 곧 사망하고 막내 석견은 유배에서 풀려 살아 돌아왔으나 어디로 숨었는지 행방을 모릅니다.
소현세자 빈 강씨는 죽기전에 하녀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야사에 전합니다. “여인으로 태어나 능력 있고 자상한 남편을 만나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니 남편을 따라 죽는 게 아까울 것은 없으나 세자의 어린 후손들이 무사하지 못할 듯하니 차마 눈을 감을 수가 없구나”
다음 이야기
소현세자의 죽음은 정략적 이해관계에 따른 희생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은데요 다음부터 [조선시대 4색 당파]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또한 다른 나라의 권력 투쟁은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면서 진행하겠습니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 (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