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에서 살다 해방 후 남한으로 내려온 실향민 집안이라, 어릴 때 집안 어른들이 쓰시던 사투리를 아직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몇 개 남아 있는 듯합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지금도 가끔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직원들을 너무 일만 시키는 악덕 사장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도록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이면 공연한 소리를 하나 정도는 해야하지 않나요? 그때 하는 말입니다.
놀메 하라우, 놀메 놀메하시라우,
아마도, 딱히 칭찬 할 말이 마땅치 않은 경우에 일에 대한 굴레를 조금 풀어주는 것으로 치하를 대신하는 것인데 진짜 일하지 말고 놀라는 소리로 알아들으면 곤란해집니다. 오히려 이제 손에 익어가고 있으니 그 익숙한 솜씨를 보여달라는 주문일 수도 있겠지요. 잘 못 말하면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고, 그 기대 효과가 반감되기도 합니다.
어느 책에서 보니, 자녀들이 한 행동에 대하여 어떻게 칭찬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가 많이 다르다고 한 기사가 생각납니다. 자녀들에게 뭔가 칭찬을 해줄 때, 당시에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칭찬보다는, 그런 행동을 하게 한, 그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인성을 칭찬해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장애인의 가방을 들어주었다고 하면, “아휴 잘했어 다음에도 그렇게 해야지” 하며 그 행동에 대한 칭찬을 하는 경우보다, 와우 장한데, 힘없는 불편한 사람을 위해 자신을 봉사하는 착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네가 자랑스럽다 하며 그런 행동을 유도하는 인성을 칭찬하는 것이 기억에도 오래 남고 다음에도 자발적으로 그런 유사한 일을 찾아서 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말을 다시 돌립니다. <놀메 하라우>
얼마 전 어느 연구 기관에서 노친네들, 그런대로 잘 살아 오신 어른들을 상대로 그 동안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예문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지만 일단 그들이 정한 가장 후회하는 일은 그동안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살았다는 것이라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안 해도 될 일을 너무 심각하게 사느라고 사는 재미도 못 느끼고, 또 심각하게 살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한 모습을 보이지 못해, 가까운 사람도 많지 않고, 친구도 얼마 없다. 이런 결과를 만든 것이 따지고 보면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사느라 여유를 못 가진 탓이라 생각한다는 것인데, 정말 공감이 가는 말 아닌가요?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런 말을 남긴 그 노인분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진짜 한 수 배웠습니다! 하는 인사가 절로 나옵니다.
또한, 그 기사를 보는 순간, 어깨가 가벼워진 듯도하고, 이제는 싫으면 싫다 하며 내 기분도 고려하며 살아도 되겠다 싶은 무책임도 스미는 듯하고, 아무튼 뭔가 짐이 덜어지는 자유라는 기분을 조금 느끼는 듯합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그저 노인들이 남기셨다는 그 한 마디가 이렇게 사람을 기운차게 만들 수 있다니 참 귀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삶이 주는, 대책 없이 무겁고 심각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제는 삶이 좀 가벼워질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기기조차 합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말입니다. 더구나 적당히 덜 심각하게 살아도 죄가 되지 않는다니, 진짜 살만한 세상을 만나는 것인가요? 뭔 인생의 비밀을 발견한 듯 흥분되는 이 기분은 좀 비상한 듯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심각하지 않으려는 삶의 태도란 어떤 것인지 감이 잘 안 잡힙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시니컬하게 보는 것인가요? 아니면 새로운 철학을 담아야 하나요?
불성실하게 살라는 것은 아닌데 덜 심각하게 살랍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가능한 일이됩니까?
세상 좀 대충 살면 안되나요?
한동안 제 밑에서 일하다 그만둔 직원이 오랜만에 만나 나온 대화에서도 그 얘기가 비슷하게 나왔습니다.
“남들은 사장님처럼 일만 하면서 살지 않아도 모두 다 잘 삽니다. 어떻게 일만 하면서 살아요? 세상이 변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듯이 일이 최우선이 아닌가 봅니다. 또 그렇게 대충 일을 해도 요즘은 다 잘 삽니다”
그 친구 말은 우리 회사에서 오래 있어서 직장이란게 다 그런 줄 알았는데, 여기 그만두고 다른 데 가보니 이렇게 열심히 일만 하면서 사는 것 같지 않다. 즐길 것 다 즐기며, 일도 잘하고, 놀기도 잘한다. 일할 때는 일하고, 놀 때는 놀 줄 아는 세상으로 변했는데, 너는 아직도 맨날 일만 붙들고 하루종일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말입니다.
일할 때와 놀 때를 제대로 구분하는 혜안과 용기,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왜 아메리카 서부극 영화를 보면 살인 청구업자들이 단골로 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피해자를 앞에 두고 총구를 들이대면서 하는 말,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나는 그냥 일을 할 뿐이야.”
왜 그들은 그런 말을 남기고 일을 처리할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봤는데 그때 영화감독이 치밀함이 보입니다. 그런 감정은 실제였던 것이었어요. 살인청부업자들은 실제로 자신의 직업이 주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방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공과 사의 구분입니다. ‘비록 내가 너를 죽이지만 이는 그저 공적인 사업에 연관된 것으로 사적인 감정은 개입되어 있지 않다’ 는 자기 정당화를 받아주는 안식의 공간이 필요했지요.
그리고 사적 공간으로 나와 공적 시간에 공적 공간에서 행한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개인으로서의 면죄를 주며 스트레스를 피합니다. 그들, 청부살인자들조차 그렇게 삶의 심각함이 주는 무게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낸 듯싶습니다.
일이 좀 잘 못 돌아간다고, 삶이 무너진 게 아니다.
일은 그냥 일일 뿐이야.
공과 사를 구분하는 일은 우리가 사는 각 분야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서로 보완하거나 보호함으로 한쪽으로 몰릴 수 있는 과중한 스트레스를 나누어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나름 효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회사에서는 맨날 일이 일어나잖아요? 그렇게 매일 일어나는 회사의 일을 자신의 사적 일로 안고 가져간다면 골 아파서 얼마나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회사 일에서 자신을 분리 시킬 필요가 있는데 우리는 그런 일에 익숙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피아 구분 없이 모든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안고 사는 그대 같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바로 공사의 영역을 구분하는 일입니다. 공과 사를 시간별로, 공간 별로 구분하고 가능하면 생각하는 사고마저 그 공사의 구분에 순응한다면 이제 종일 자신을 좇아다니는 과중한 일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업과 같이 공적인 영역에 들어가 있는 모든 것들은 실제로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유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셔야 이런 시도가 효과를 얻어 삶을 덜 심각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을 조금 덜 심각하게 살 수 있다는 기대는 적지 않은 희망을 던진 모양입니다.
아직 사고에서 정리가 안 된 주제를 그대로 글로 옮기는 시도를 하다가, 마감 시간까지 따지며 글을 끝내느라 아주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또 하루를 접는 붉은 노을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