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이야기 |
베트남 토착세력인 반랑왕국과 어우락 왕조는 “락” 이라고 불리는 베트남 전통 촌락을 중심으로 사회가 형성됩니다. 평화로운 베트남에 중국의 침략으로 전쟁이 시작되고 베트남 특유의 저항이 시작되었습니다.
BC 221년 진나라 시황제는 550년 전쟁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합니다. 비슷한 면적을 가진 유럽은 아직까지 수 많은 국가들이 공존하는데 반해 중국은 2200년 전에 하나의 중국을 만들어 주변국들을 압박합니다. 동양과 서양은 이렇게 다른 정치적 상황에서 처해 있어서 전혀 다른 문화를 지니게 됩니다.
시황제 욕심의 나비효과
진 시황제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춘추 전국시대 550년 동안 지속되던 전쟁을 끝낸 진시황제는 자신이 아는 모든 영토를 정복하려 했습니다. 진 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하고 2년 후 BC 219년에 도휴를 사령관에 임명하고 임효와 조타를 부장으로 삼아 옛 월 나라에서 남하한 백월족의 근거지를 공격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조타가 (찌에우 다 – Triệu Đà) 남비엣을 건국한 인물입니다.
도휴는 당시 국경이던 오령산맥을 넘어 백월족의 근거지 공략에 나서는데 10만 군대를 다섯 갈래로 나눠서 진격합니다. 당시의 백월족들은 오령산맥과 팡시팡 산맥 사이에 넓게 퍼져 살았던 이유로 도휴는 군대를 넓게 펼쳐서 진격하고 각 부대 간의 유기적 협조 체제를 구축한 진격 방법을 선택합니다. 도휴의 본진 3만 군대는 월족 부락을 초토화시키며 군장들을 살해하고 계속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백월족들은 부락이 불타 없어지면 산속에 들어가 저항하고 군장이 죽으면 새로운 군장을 세우고 저항합니다. 밀림 속까지 백월족을 추격하던 도휴는 낯선 계곡에서 월족들의 기습 공격을 받아 도휴는 전사하고 진 나라 3만 군대는 대부분이 죽거나 항복했습니다.
부장 임효는 사령관 도휴의 패전 소식을 듣고 월족들의 배후를 공격하여 승리합니다. 도휴 전사후 시황제는 임효를 사령관에 임명합니다. 동쪽을 맡은 조타도 연승을 거두고 점령지 월족을 유화책으로 다스리는 등 민심을 안정시켰으나 진시황제는 임효의 공을 더 높이 평가한 듯합니다.
백월족과 중국은 4년간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전쟁 경험이 많고 잘 조련된 중국 군대가 승리합니다. 그리하여 오령산맥과 팡시팡 산맥 사이에 있는 영토는 중국의 영토가 되어 진 나라는 삼군을 (남해군, 계림군, 상군) 설치했습니다. 또한 중국에서 수십만 명을 이주시켜 월족들을 한족화 시킵니다.
백월의 토벌이 끝나고 임효는 남해군 일대를 다스리고 조타는 현령이 되어 임효의 부하가 됩니다. 하지만 하늘은 임효의 편이 아니라 조타(찌에우 다 Triệu Đà) 편인 것 같습니다. 진 시황제가 죽고 진승 오광의 난이 일어날 즈음에 임효는 병이 들어 죽습니다. 임효의 지위를 물려받은 조타는 베트남 역사에 획기적인 사건을 일으킵니다. 진 시황제가 죽고 어리석은 2세 황제 호해가 등극하자 간신 조고의 농간으로 강성하던 진 나라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진 나라 본국의 사정이 혼란하니까 남월에 주둔한 진 나라 군대도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게다가 남해군 태수 임효는 병이 들어 죽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남월열전”에는 임효가 병이 깊어 조타를 (찌에우 다 Triệu Đà)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 본국 황제는 아둔하며, 진승 오광 등이 난을 일으키고 뜻있는 지사들의 동조가 있으니 공은 남해군 태수를 맡아 도로를 끊어 중원의 진격을 막고, 오령산맥을 북쪽 경계로 하고 남해를 남쪽 경계를 삼으면 가히 한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조타의 (찌에우 다 Triệu Đà) 진술에 의해 기록된 내용이라 죽은 임효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그냥 찌에우 다 (Triệu Đà)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남해군 태수가 된 찌에우 다 (Triệu Đa)는 군대를 장악한 후 자기를 따르지 않는 진 나라 관리들을 전부 살해합니다. 어제까지 같이 전장을 누비던 동료를 찌에우 다는 전혀 망설임 없이 몰살시킵니다. 구 질서가 무너진 중국 대륙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찌에우 다는 상황 판단을 정확하게 했고 과감하고 신속하게 행동하여 자신의 야망을 실행합니다. 또한 진 나라 본국의 혼란으로 어수선한 계림군과 상군을 차례로 공격하여 손쉽게 점령하고 BC 207년 남월국(Nam Việt)을 건국합니다.
지금의 광둥성 번우에 도읍지로 정하고 국호는 남월 (Nam Việt), 찌에우다 자신을 무왕이라 칭합니다. 이때부터 베트남은 국호를 가지게 되고 이전과 다른 중국식의 발달된 통치체제를 갖춘 국가가 출현합니다. “찌에우 다” 그는 중국 연 나라 출신이고 진 나라 관료 출신입니다. 또한 대다수의 관료들은 중원 출신, 지배층은 옛 월 나라의 기득권 세력이며 백성들은 옛 월 나라 유민들입니다. 그러면 “남월”은 중국 역사일까요? 베트남 역사일까요? 중국은 “남월국”은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하고 베트남은 “남월국”은 진정한 베트남 국가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살펴봅시다. 남월국은 중국과 베트남의 중간 지대에 위치했고 백성들은 월 나라의 유이민들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정착한 남월족입니다. 남월국은 남진을 계속하여 판시팡 산맥을 넘어 현재의 베트남 영토를 침략합니다. 남월국은 BC 179년 베트남 토착세력의 국가 어우락 (Âu Lạc) 왕조를 멸망시키고 곡창지대인 홍강 델타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반랑왕국의 잔존 세력까지 모두 정복하여 남월국은 당시의 베트남 영토 전체를 (현재의 베트남 북부지역) 지배하게 됩니다.
중국 변방 지역에서 넘어온 월족들이 베트남 토착세력들과 하나의 국가를 만들고 그들은 동화되어 갑니다. 현재 베트남 국민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킨족(kinh)의 형성 과정입니다. 그리고 베트남의 국가명 남월 (Nam Việt)은 월족과 관계를 명확하게 인정한 증거입니다. 현재의 국가 명 월남 (Việt nam)도 월족 유민들의 유입에 의해서 형성된 국가인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중국 학자들의 주장대로 “남월국”을 중국 역사의 일부로 인정한다면 현재 베트남 역사의 전부를 중국 역사로 인정해야 하는 궤변이 됩니다.
위만과 조타의 평행선
우리나라도 베트남과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요 바로 “위만조선”입니다. 2,200년 전 중국에서 건너온 위만 일행들은 조선(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합니다. 위만이 찬탈한 조선을 우리는 “위만조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위만은 국명을 바꾸지 않고 “위만조선”이라는 국가명을 그대로 사용했으므로 “위만왕조” 혹은 “위만정권”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은데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위만조선”으로 호칭하겠습니다. 위만조선은 베트남의 “남월국” 건국시기와 아주 비슷합니다. 왕위를 찬탈한 위만과 중국에서 이주한 유민들은 조선(고조선) 백성들과 합쳐져서 오늘날 우리민족이 형성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만조선””을 중국역사로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우리역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국 역사와 베트남 역사가 비슷한 사례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집니다. 베트남 신화에 나오는 어우락(Âu Lạc) 왕조 건국과 멸망에 관한 이야기 두 개를 소개하겠습니다. 어우락 왕조의 안 즈엉(An Dương) 왕은 반랑 왕국을 몰아내고 도읍지를 까오방에서 하노이 북부지역으로 천도합니다. 새로운 도읍지에 성곽을 쌓는데 아무리 성을 쌓아도 자꾸 무너집니다. 이유를 알아보니 한 노인이 “반랑국의 왕자가 왕위 계승을 못하고 죽어서 한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비엔딴 산에 가면 죽은 왕자가 흰 닭으로 환생했는데 황금 거북을 데리고 가서 흰 닭을 죽이면 됩니다”라고 하여 어우락 (Âu Lạc) 왕조의 안 즈엉 왕은 노인이 시키는대로 황금 거북을 데리고 가서 흰 닭을 죽이고 꼬롸성을 완성시켰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흰 닭은 반랑국의 남은 저항 세력을 의미하고 황금 거북은 새로운 세력을 의미합니다. 즉 새로운 세력이 공사를 방해하는 구 세력이 숨어있는 비엔딴 산으로 가서 구 세력을 제거하고 성곽 공사를 완성시킨 내용입니다.
또한 황금 거북은 안 즈엉 왕에게 발톱 하나를 내어 주며 쇠뇌를 만들때 방아쇠 재료로 사용하라고 합니다. 그후 강력한 신 무기인 쇠뇌는 어우락 왕조를 지킨 수호신 역할을 합니다.
쇠뇌는 진 나라가 개발한 강궁이며 연속 발사가 가능합니다. 나중에 진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할 때 쇠뇌는 적군들을 공포에 떨게한 무기입니다.
어우락 왕조가 멸망할 때 전하는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 이야기하고 비슷합니다. 남비엣 왕자 쫑 투이(Trọng Thủy)와 어우락 공주 미 쩌우(My Châu)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남비엣 왕자 쫑 투이(Trọng Thủy)는 어우락 공주(My Châu)에게 무기고를 열어 쇠뇌를 보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어우락 공주는 아버지 안 즈엉 몰래 남편에게 쇠뇌를 보여주고 남비엣 왕자는 쇠뇌의 방아쇠를 전부 못쓰게 만든 후 부모님을 뵈러 갔다가 오겠다고 하며 남비엣으로 갑니다.
쇠뇌의 위력만 믿은 어우락의 안 즈엉 왕은 남비엣의 공격을 못 견디고 도망갑니다. 어우락 왕이 강가로 도망가서 황금 거북을 만나 거북이 등에 타고 물속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전쟁에 패한 안 즈엉 왕은 우물에 투신 자결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베트남의 전설은 우리나라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 이야기 보다 500년 먼저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 다음 이야기 |
중국 최남단 지역과 현재의 베트남 북부지역을 통합하여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던 남비엣은 중국 한 나라의 침략을 견뎌야 하는데요. 다음 이야기는 “한 나라의 침략과 베트남 민족의 저항”입니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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