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딴짓해도 괜찮아

이 글의 제목을 보고 오해하는 분이 있을까 조금 염려되었다. 딴 짓 해도 괜찮다니? 혹여라도 이 글을 다 읽은 후 낚시였다고 분통을 터트릴 분이 계실까 염려하여 미리 밝힌다. 이것은 한 권의 책에 대한 이야기이다. 점잖게 말해 서평 같은 것이다. 그러니 눈치 채셨으리라. 이 글의 제목은 그 책의 제목을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실망이 되실 듯하면 얼른 다음 페이지로 넘기시기를 권한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작가를 먼저 알았다. 처음 그를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라 할 정도로 사소한 기회 때문이었다. 본사에서 방문한 손님과 만나 얘기를 나누는 자리의 말석에 그는 앉아 있었다. 인사를 나눌 때 그에게서 어떤 강렬함도 발견하지 못했다. 표현은 약간 어눌하게 들렸고 말은 느렸다. 정통 충청도 출신인 나보다도 느렸다. 그러니 경쟁자인(?) 그를 기억에 남겨 두었을 리가 만무이다. 말 느린 걸 가지고 경쟁자 운운하니 웃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경쟁심은 사소한 계기가 일으키는 법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떠올랐다. 경쟁심 때문이 아니고 라오스 비엔티안의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문득 그가 라오스에 본거지를 둔 회사에 다녔음을 역시 우연처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안부를 가장해 전화를 걸었다.
두번째 만난 자리였지만 처음 만난 자리처럼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라오스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얘기의 사이사이에 끼어 나오는 그의 이력을 접할 때마다 내가 앞에 두고 있는 인물이 이전에 만났던 인물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가방에서 책 한권을 꺼내 내 앞에 밀어 두었다.

그 책의 제목이 ‘ 딴 짓 해도 괜찮아’였다.
제목만 흘낏 봐도 끌리지 않는가? 딴 짓이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끌림 말이다. 보자마자 머릿속에 저 사람의 딴 짓은 뭘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들어 보니 제목은 출판사 사장님이 뽑은 것이란다. 원래 작가가 의도한 것은 산에 대한 것이었는데 출판사 속설에 산이 들어간 책은 실패한다고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는 제목이 붙었단다. 말하자면 제대로 된 낚시이다. 그런데 전문가의 촉과 경륜은 무시 못한다. 낚시로도 그만이었지만 책을 읽다 보니 제목으로도 딱이다.

그의 글은 쫄깃하다. 살아있어 글 맛이 있다.
활어회와 같다. 직장에 다니면서 일탈처럼 에베레스트 등반을 꿈꿨고 결국엔 그것을 이뤄낸 한 사내, 산쟁이의 이야기이다. 그 과정의 일화들이 펄떡펄떡 뛰는 문장으로 책 속에 놀고 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겉 그림일 뿐이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그와 동의했는데 그것은 꿈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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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필명이 몽선생이다. 왜 하필 ‘몽’이냐고 제법 많은 질문을 받았다. 왜 몽선생이에요? 꿈(夢)을 꾸니까 그렇다고 답해 주었다. 선생은? 그건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의 표정이 기억난다.

1997년이었다. 이후로도 내가 몽선생이라는 별명의 뜻을 말할 때마다 듣는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기였다. 그래도 입 밖으로는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괜찮습니다. 여러분. 설마 원숭이선생을 생각하지는 않으셨겠지요.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랴.
아직 많이 젊었을 때 내가 가진 꿈에 대해 사람들이 대꾸했다. ‘꿈 깨라, 꿈꾸고 있군, 아직도 꿈이 있어 좋~겠군’ 하고. 일부의 이야기이다. 물론 이러한 평가 중에 몇몇은 다분히 긍정적인 의미를 속내에 담고 있다. 그래도 표현 만큼은 굴곡진 억양과 비뚤어진 악센트를 갖고 있음은 부인키 어렵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이유는 있다. 내 꿈이 비현실적인 것을 넘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내용이었기에 그렇다. 그러나 무슨 상관일까. 처음 꿈을 꾸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이 땅에서 꿈을 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몸살 나게 알아 버렸는데.
그가 꿈을 꾸었을 때도 그러했다.

그런데 그는 꿈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 꿈을 막는 무형의 장애물들을 구체화시키는 힘이 있었다. 보이는 것은 이겨낼 수가 있다. 그것이 그의 감춰진 능력이었다. 그 능력을 우리는 열정이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열정의 불을 꺼트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자기의 열정으로 문제들을 객관화했고 그것을 하나하나 부숴 나갔다.
이 책에는 그런 얘기들이 담겨있다. 그가 이 과정을 쉽게 겪어냈을 리 없다. 사람들의 비웃음과 더불어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대책 없는 친구로군, 아직 세상을 몰라서 그래 같은 평가는 양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나도 그런 경험을 했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경험이었다. 꿈에 대해 진지해지면 진지해질수록 나의 이야기는 더할 나위 없이 가벼워지며 내가 열중하면 열중할수록 나의 행동은 마냥 치기어린 행동으로 밖에는 이해되고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한때는 그것을 나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적이지 못한 사람이라고 자학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할 때 그들로부터 내 꿈은 정말 꿈이 되어 버렸다. 평가는 간단히 요약된다. “꿈꾸고 있네.” 이게 답이다. 그래서 세상의 눈과 씨름하여야 했다.
긴 세월이었다. 내 꿈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위에 누인 채 묶여 있었다. 길면 잘리고 짧으면 늘려졌다. 그건 이미 꿈이 아니었다. 현실도 아니었다. 몽롱한 어떤 것이었다. 그런데 어떤 글 하나가 눈을 확 끌어당겼다.

‘나 혼자 꿈을 꾸면, 그건 한낱 꿈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새로운 현실의 출발이다.’

나는 이 문구를 가슴에 새기고 산다. 이 문장은 나를 다시 몸살을 앓게 했다. 그 후로 함께 하는 꿈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는 어땠을까? 그는 같은 꿈을 꾸는 동료들과 함께 세상의 눈을 이기려 몸살을 앓았다.
산에 오른 이에게 단골 질문이 있다.
왜 산에 오르려고 하지요? 그가 대답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가 그렇게 대답할 것이라고 믿는 내 믿음이 답했다.
내려오기 위해서이지요.
오르는 그 과정의 일들, 고난하고 극복하고 그리고 함께 울고 웃은 동료들과의 그 모든 기억들을 담아 내려오기 위함이다. 그래야 떠난 이유가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름은 장재용이다.
그의 책을 읽다가 감동하여 씬짜오베트남에 추천하였다. 지금 그의 글이 올라 있으니 기회 된다면 읽어 보시라. 나와 달리 재미있는 글쓰기를 한다. 허락을 받지 않고 서평을 흉내내 그를 주인공으로 삼아 쓴 이 글을 넉넉히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무리 감동이 있어 그의 삶과, 그의 산과, 그의 글을 이야기하고 있을지라도 부디 그대여, 내게 함께 산을 오르자 말은 말아 다오. 나는 단지 당신의 꿈이 좋고 그 꿈을 꾸는 딴짓이 좋았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나는 평지가 좋고 올려다 보는 것을 더욱 좋아하니 그대여, 그대는 산정에서, 나는 산 아래에서 서로의 꿈에 취하자꾸나. / 夢先生


박지훈
건축가,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정림건축 베트남 법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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