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古典)이란 ‘누구나 들어서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읽어 본 적 없는 책’이라 들었던 적이 있다. 맞장구를 쳤다. 다독가(多讀家)를 자처하거나 학문에 뜻이 있지 않고서야 두꺼운 고전을 무릎을 쳐가며 처음부터 끝까지 읽진 않는다. 지적 허영에 멋으로 허리춤에 끼고 다니거나 낮잠에 베개용으로 쓸 때 가치가 발하는 책들이 고전이다.
이번 호에 소개할 책은 누군가의 허리춤에 그리고 달콤한 낮잠의 책상 베개로 가장 많이 사용됐던 책이 아닐까 한다.
격주로 고전을 골라 서평을 쓰기로 한 다음부터 하루 하루 고전(苦戰)을 면치 못하고 있다. 현대인의 기준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고 무용한 것 같은 고전에서 인위적인 유용함을 뽑아내려 애썼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기로 한다. 우리는 주어진 삶을 살면 되고 자기 몫의 삶을 살면 그것으로 족하다. 남들이 봐서 근사한 삶이나, 훌륭하거나 위대한 사람이 되려 애쓰는 어리석음을 일찍이 버리기로 한다. 우리는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남아 있는 질문이 새벽 불면을 붙잡는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전은 ‘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 퇴색되지 않을 만큼 견딜 수 있었던 인류의 근육이며 신경체계’다. 무수한 시대를 건너오며 살아 남은 강력한 힘을 가진 책이다. 이 힘에 한번 짓눌리게 되면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실존의 의구심과 가치전도의 황망함에 시달린다. 자신이 이제껏 배우고 익힌 모든 지식과 사회적, 인도적(人道的) 가치들이 붕괴되고 다시 세워지는 일이 반복된다. 반복되는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가 더러는 미물(微物)에도 미치지 못하는 때가 있고 더러는 광막한 우주와 내통하는 당사자로 곧추 세워지는 때도 있다. 감히 니체를 소개하게 된 배경엔 이러한 존재의 롤러코스터가 극명하여 읽고 나면 정신이 몽롱해지는 그래서 무진장 살아지게 하는 뽕맛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독을 나누기 위해서다.
니체는 1844년에 태어나 1900년에 죽었다. 19세기를 온전히 살았다. 철학의 끝을 마지막까지 파고드는 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말년의 고통이었으니 악화된 건강과 정신분열 증세로 1979년 스위스 바젤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면서부터 20여년간 정신병원에서 고독하게 보내다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가장 극렬하게 기독교를 반대했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 도덕과 비윤리 등 인류가 알고 있는 정언명령의 가치를 뒤집고 진정한 生철학 추구했다. 19 세기 가장 뛰어난 철학자로 니체를 꼽는데 아무도 주저하지 않는다. 20세기 철학자 들뢰즈는 니체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철학사를 뒤적이다 마음이 끌리는 철학자를 만나면 그 철학자를 뒤에서 덮쳐 계간(鷄姦) 했다. 예를 들면 칸트 철학에 대한 주해서(註解書)는 칸트를 뒤에서 덮쳐서 만들어 낸 칸트와 나의 사생아인데, 아마 칸트가 본다면 놀라 자빠질 만큼 끔찍한 얼굴을 가진 사생아일 테다. 그런데 니체를 뒤에서 덮쳐 사생아를 만들려고 하니, 어느새 니체가 자신을 덮치고 있더라.” 니체가 이미 자신의 사유체계를 완전히 정복하고 있어 어떠한 흠집이나 논리적 허점을 짚어 내려 해도 빠져나가고 우회해서 무찔러 들어오니 그를 극복해 낼 재간이 없었다는 말이겠다. 이를테면 자신이 니체의 사생아였다.
아니나 다를까 니체는 얄밉기 그지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며 펀치를 맞고 나가 떨어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얄미운 것은 그때마다 다시 일으킨다. 그리곤 또 카운터 펀치를 날리는 것이다.
책으로 들어가자. 우선 ‘차라투스트라’는 사람의 이름이다. 페르시아 고대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배화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사람이다.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는 조로아스터(Zoroaster)의 영어식 발음이다. 기원전 6세기경 인물로 전해진다. 니체는 제목에 대해 자신의 또 다른 저서 ‘이 사람을 보라’에서 ‘도덕’을 인류 최초로 창조하며 온 인류에 치명적인 오류를 선사했기 때문이라 서술한 바 있다.
‘모두를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이라는 부제로 책은 시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10년 동안 산 속에서 고독한 성찰로 얻은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하산한다. 하산하여 만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맞닥뜨리는 갖가지 환경에 대한 니체 취향의 독특한 철학적 사유를 데려다 놓은 것이 책의 구성이다. 총 4부로 나누어져 있고 1부에서 니체는 ‘초인(超人)사상’을 설파한다. 니체는 “자유롭게 죽고, 죽을 때는 자유로울 것. 더 이상 긍정할 수 없을 때는 거룩하게 부정하”는 것이 초인의 도덕으로 여긴다. 지상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가치를 전복시키고 진정 자유로운 인간 즉 초인이 될 것을 강조하는데 초인이 되기까지 가장 큰 걸림돌로 니체는 배후세계론자를 지목한다. 배후세계론자는 니체가 만든 말이다. 세계의 배후에 초월적이거니 형이상학적인 것, 또는 종교적인 무엇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경멸적으로 가리키고 있다. 말하자면 나는 나지, 신이 좌지우지 하는 나는 내가 아니다, 하늘과 나 사이에 인간이 만들어낸 사유, 가치, 종교는 인간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고 무의미를 넘어 유익하지 않다고 말한다. 초인은 이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어서 인간의 허황된 논리 너머에 서 있으라고 니체는 명령한다. 나는 여기에서 엎어졌었다. 그러나 니체는 이내 일으켜 세웠으니 “가장 좋지 못한 것은 왜소(矮小)한 생각들이다. 진실로, 왜소한 생각을 하는 것보다는 악행을 하는 편이 더 낫다. 그대에게도 위대한 길은 아직 남아 있다.”라며 작아진 용기를 북돋았다.
안다. 니체를 소개하기엔 내 소양이 부족할뿐더러 지면도 허락하지 않는다. 책에는 우리에게 주는 주옥 같은 말이 많다. 책의 2~4부를 통째로 옮겨 적으며 감탄해 마지 않았던 문장들을 이곳에 소개할까 한다. 잠시 기가 막힌 니체의 문장에 빠져보자. 인용하는 문장은 부북스 출판사 2011년 12월 발행본에서 발췌했음을 밝혀둔다.
사족) 같은 제목으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음악이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깨달음을 얻고 난 뒤 첫 하산할 때의 장대한 영광을 웅장하게 연주한다. 책 마지막을 조용히 덮으며 듣고 있노라면 방안 가득 퍼지는 광배의 빛을 경험할 수 있다. 세계적인 마에스트로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들어보시기를 권한다.
•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복종하는 자이다. 스스로 복종할 수 없는 자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것이 살아 있는 것의 본성이다. 명령하는 것이 복종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모든 명령 속에는 시험과 모험이 들어 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자는 명령을 내릴 때면 항상 거기에 자기 자신을 건다. 그렇다. 내가 삶 자체의 심장 속으로 파고들었는지, 그 심장의 뿌리까지 파고 들어갔는지를 진지하게 검토해 보라!” (p. 176)
• “모든 신들은 시인들이 꾸며낸 비유이고 시인들이 늘어놓은 궤변이다. 실로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높이 끌어 올린다. 구름의 나라로. 우리는 그 구름들 위에 우리의 알록달록한 헛껍데기를 올려놓고 그것들을 신이며 초인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들은 바로 이런 구름 의자 자리에 앉혀 놓기 딱 알맞게 가볍지 않은가.” (p. 197)
• “덕이란 소심하게 만드는 것, 길들이는 것이다. 그들은 늑대를 개로 만들고 인간 자체를 인간이 가장 잘 길든 가축으로 만든다.” (p. 258)
• “모든 작은 것들은 자기 자신들의 왜소함에 대해 죄가 없다.” (p. 284)
• “오늘날은 천민들의 것이다. 여기서 무엇이 크고 무엇이 작은지를 누가 알겠는가. 그런 곳에서 누가 위대함을 성공적으로 찾겠는가. 오직 바보만이 찾을 것이다. 바보만이 성공한다.” (p. 389)
• “교황이 실직 失職 했다는 것은 그가 섬기던 기독교의 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p. 390)
• “나는 배웠다. 현명한 바보들이 말을 더 잘한다. 정녕 작은 것, 가장 여린 것, 가장 가벼운 것, 도마뱀의 바스락거림, 숨 한 번 쉬는 것, 한 번의 움직임, 눈 한 번 깜박임, 이런 사소한 것들이 최고의 행복을 만드는 것이다. 쉿 조용히 하라.” (p. 420)
• “차라투스트라는 유일한 인간, 최초의 인간으로서 묻는다 “인간은 어떻게 극복되는가?” 오 형제들이여 내가 인간에게서 사랑할 수 있는 점은 인간은 하나의 과정過程이며 몰락이라는 것이다.” (p. 435)
• “극복하라. 그대 더 높은 인간들이여. 작은 덕들을, 왜소한 영리함을, 모래알 같은 신중함을, 개미처럼 부지런히 기어 다니는 것을, 가엾은 안일함을, 최대다수의 행복을! 그리고 복종하느니 차라리 절망하라.” (p. 436)
장재용 작가, 산악인, 경영혁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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