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이야기 |
베트남의 토착세력이 세운 반랑국은 월족들의 남하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중국 월 나라의 멸망으로 월 나라의 지배 계층들이 남하 하면서 반랑국과 국경을 맞대고 서서히 베트남에 영향을 끼칩니다. 베트남의 첫 번째 국호 남비엣은 이렇게 남하한 월족 즉 남월족에 의해 건국됩니다. 그리고 연이어 진나라 시황제의 중국 통일과 한족들의 국가 한 나라가 안정되면서 베트남은 중국의 파도에 휩쓸려 갑니다.
건국신화란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요 ?
우리나라의 삼국유사 처럼 [영남척괴열전], [월사략]은 베트남의 건국신화를 다루고 있는데요, 민간에 구전되어 오던 반랑 (Văn Lang) 왕국의 건국 이야기를 역사책에 기록한 것입니다.
바다의 신 ‘락롱(Lạc Long Quân)’과 산의 신 ‘어우꺼 (Âu Cơ)’가 결혼하여 알을 낳았는데 알에서 백명의 아들이 나왔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백명의 아들 중 장남이 베트남의 시조인 “흥브엉” 입니다. 그리고 백명의 아들이 현재 베트남 민족인 백월족의 조상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건국신화는 사실 일까요? 아니면 거짓 일까요? 이러한 문제를 규명하는 사람들이 역사학자인데요, 보통의 경우 건국신화 자체는 사실입니다. 다만 다소 과장이 되어 있습니다.
건국 과정을 과장하는 이유는 약 3천년 전 국가가 태동될 때, 철저한 계급사회였기 때문에 일반 평민들과 출생부터 다르게 포장하는것입니다. 즉 왕족이나 귀족을 신격화해서 평민들의 복종을 유도할 수도 있고, 또한 후대에 와서 자기 민족의 조상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 민족적 자긍심을 유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베트남의 고대 청동기 유물과 중국의 기록을 살펴보면 반랑왕국은 실존했던 국가입니다. 다만 건국연대가 좀 의문입니다. 건국신화에 나오는 BC 2876년 보다 좀 늦게 건국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베트남이 중국의 역사서에 등장하는 시기는 BC 5세기 즉 지금부터 약 2,500년 전입니다. 당시에는 교통 수단이나 활발한 문화교류가 잘 없던 시절이라 국가가 건국되고 200~300년 정도 지나야 이웃 나라에 알려지고 교류가 있던 것을 감안하면 BC 7~8세기 즉, 지금부터 약 2800년 전 반랑국 건국이 있었다고 추측 됩니다.
우리의 고조선은 BC 7세기 경 중국 사서에 등장합니다. 따라서 고조선은 약 3천년 전 건국된 국가라고 추측 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조선은 잘못된 국명입니다. 처음 건국 당시에는 “조선”입니다. 나중에 위만이 조선의 왕위를 찬탈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왕까지 조선을 통치합니다. 게다가 이성계가 건국한 나라도 조선이라 우리는 편의상 단군조선 혹은 고조선이라 부릅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하면서도 고조선이라 표현한 것을 두고 역사 다큐 방송을 진행하던 앵커가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하면서 고조선이라 표현한 것은 이성계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는 연대를 착각하고 말한 것입니다.
일연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년대 보다 100년 먼저 삼국유사를 저술 했습니다. 일연은 위만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표현했었고 그 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여 이제는 고조선이라 표현하지 않으면 혼돈을 주게 되니 자연스럽게 고조선 혹은 단군조선이란 표현을 하게 된 것입니다.
흔히 베트남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째, 몽고와 세 차례의 전쟁, 둘째 프랑스와 독립전쟁, 셋째 남북 통일전쟁 중 미국의 개입으로 확전된 미국과의 전쟁, 넷째 1979년 중국의 침략을 물리친 중국과의 전쟁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베트남은 세계 4대 강국을 물리친 나라라고 알고 있으며 베트남 국민들 역시 이부분에 대해 자긍심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베트남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전쟁에 시달렸습니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전쟁의 역사까지 비슷합니다. 베트남이 한 무제의 침략으로 중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까지 700년 동안, 베트남은 항상 중국의 남진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식민지배 천년간 간헐적인 독립전쟁 등 베트남은 중세에 이르기까지 항상 중국과 전쟁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은 침략을 받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중세시대 수 백년간 참파 왕국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현재의 베트남 중부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합니다. 그리고 베트남 남부까지 점령한 것은 불과 170년 전 입니다. 가히 베트남 역사는 전쟁의 역사, 베트남은 전쟁의 국가라고 표현할만 합니다. 천년 동안 변치 않는 베트남의 정책이 있는데 바로 [북거남진] 입니다. 이는 북쪽은 거부하면서 막고 남쪽으로 진출하는 정책인데 오랜 세월동안 일관된 [북거남진] 정책은 오늘의 베트남 영토를 만든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힘쎈 나라 중국에게 침략 받으면 지구전을 펴면서 막아내고, 상대적으로 약한 남쪽을 공격하는 [북거남진] 정책은 남들이 보면 좀 이중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자국의 이익이 우선되어야 하는 국가정책으로는 아주 효율적인 정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베트남처럼 전쟁을 많이 한 국가이지만 근대와 현대에는 베트남 보다 전쟁을 적게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앞으로 전개될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를 살펴보면 쉽고 흥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반랑국의 건국 이야기로 갑니다. 반랑국은 15개의 큰 촌락 락비엣(Lạc Việt) 출현으로 이들 촌락은 서로 충돌과 협력을 통해 발전합니다. 그 중 세력이 가장 큰 부락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치게 되는데 이는 외부의 침략에 공동 대응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른 바 ‘부족국가의 출현’이라 짐작됩니다. 반랑국은 철저한 계급 사회였고 제정일치 사회입니다. 대부분의 고대국가는 종교 지도자가 정치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고조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초기의 반랑국은 15개의 촌장들의 복종을 받는 공동체 최고 수장 정도의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촌장들을 락후에 임명하고 락후들은 종전의 지배권을 인정받아 자치권을 행사했을 것입니다.
하노이에서 서북으로 70km 정도 떨어져 있는 비엣찌(Việt Chi) 라는 작은 도시가 반랑국의 초기 수도입니다. 북에서 흐르는 홍강과 남쪽의 다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배를 타고 내려가면 곧장 홍강델타에 도달 하므로 수로가 발달하여 초기 도읍지로 적합한 곳 입니다. 비엣찌(Việt Chì) 에는 15세기에 지은 흥붕(Hưng Vương) 사당이 있어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평화로운 토착사회 반랑국에 변화가 생깁니다. BC 307년 월 나라가 멸망하고 월 나라의 지배층들은 중국 남부로 이동하는데 자신들이 거느리던 가신들과 노비, 소작농들을 데리고 이주 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지금의 운남성과 광서성에 정착한 이들을 우리는 남월이라 부릅니다. 이들은 반랑국과 가까이 있으므로 반랑국에 상당한 위협을 끼쳤다고 생각됩니다.
반랑국과 남월의 사이에는 어우비엣(Âu Việt)이라고 부르는 부락이 있었는데 이후 이들이 반랑국을 몰아내고 어우락(Âu Lạc)왕조를 세운 민족입니다. 어우비엣(Âu Việt)은 남하한 월나라 유민들과 국경을 맞대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월족들은 중국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이용하여 어우비엣(Âu Việt)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상호 협력했을 가능성이 많은데 세력이 커진 어우비엣(Âu Việt)은 BC 257년 반랑국을 몰아내고 어우락(Âu Lạc)왕조를 세웁니다.
[영남척괴열전]의 기록에 의하면 18대 흥왕의 딸 미랑과 혼인 하려다 실패한 어우비엣(Âu Việt)의 툭왕은 복수를 다짐합니다. 툭왕은 반랑국을 멸망시켜 자신의 복수를 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습니다. 그 후 툭왕의 손자 툭판이 반랑국을 멸망시킵니다. 반랑국 마지막 왕 18대 흥브엉은 우물에 투신 자결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툭판은 어우락(Âu Lạc) 왕조의 시조 안즈엉(An Dương)왕 입니다.
반랑왕국을 멸망시키고 건국된 어우락(Âu Lạc)왕국은 반랑왕국의 제도를 대부분 수용하고 락후와 락장들의 지배권을 인정하여 나라를 안정시켜 갔습니다. 이것은 어우락(Âu Lạc)왕조 까지는 중국인들의 통치가 아니라 베트남 토착세력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 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남하한 월족의 영향으로 중국 문명은 많이 흡수된 듯 합니다. 어떤 학자는 안즈엉(툭판) 왕은 중국 사천지방 출신이라고 합니다. 사천지방과 베트남은 중간에 험준한 산악 지방이 너무나 많아서 당시의 교통수단으로 교류는 쉽지 않습니다. 만약 중국과 교류를 했다면, 남하한 월족 유민과 교류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우락(Âu Lạc)왕조 다음에 출현하는 남비엣(Nam Việt)은 중국계가 베트남을 통치한 국가입니다.
당시 어우락(Âu Lạc)은 까오방(Cao Bang)에 도읍지가 있었는데 반랑국을 몰아낸 후 하노이 북부 평야 지역 꼬라성에 도읍하고 성벽을 축조 했는데, 이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꼬라성을 축조할 때 중국문화를 경험하지 못한 토착민들은 웅장한 성벽을 보고 경악을 했을 것입니다.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는 140개가 넘는 국가들이 550년간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시대입니다. 따라서 무기 제조나 용병술이 발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어우락(Âu Lạc)왕조의 시조 안즈엉(An Dương,툭반)은 이러한 중국의 우수한 무기제조 능력을 전수 받아 반랑국을 몰아냈을 것입니다.
그러면 반랑국은 아주 사라졌을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당시의 영역은 하노이 북부와 곡창지대인 홍강델타 정도로 추정 되므로 반랑국의 유민들은 현재의 닌빈(Nhỉnh Binh)지역으로 옮겨서 어우락(Âu Lạc)왕조와 공존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호아르(Hòa Lư)에 가면 반랑국의 궁궐이 있는데 아마도 사료를 보고 최근에 건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호아르(Hòa Lư),짱안(Trang An), 닌빈(Nhinh Binh)지역은 분지처럼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역입니다. 따라서 외부 침략에 대한 방어가 용이하고 적당량의 농토, 농업용수 등 생존에 필요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아마도 반랑국 유민들이 백년 가까이 숨어 지낼 수 있었는 듯 합니다.
어우락(Âu Lạc)왕조는 80년의 단명으로 끝납니다. 멸망 원인은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가 오령산맥을 넘어 남쪽 변경을 공략했는데, 진의 공격을 받은 남월이 못 버티고 판시팡 산맥을 넘어 현재의 베트남 영토로 들어온 것입니다.
| 다음 이야기 |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가 망국 월 나라 유민들이 살던 변방을 공격합니다. 베트남 천년전쟁의 시작입니다. 진 나라 군대를 막으며 남쪽으로 내려가던 월 나라 유민들은 판시팡 산맥을 넘어 현재의 베트남 영토에 도착하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봅시다.
참고사항
[ 영남척괴열전 ]
15세기 후반 후기 레(Lê)왕조의 고위직을 지낸 무경이 저술한 베트남 역사서로 민간에 구전되던 많은 건국 신화들을 체계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 월사략 ]
14세기 후반 쩐(Trần)왕조 시대에 출판 되었으며 반랑국 부터 리왕조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트남 최고의 역사서 [대월사기전서] 편찬에 기초가 된 역사서이며, 현재 베트남에 없고 중국 사고전서에 보관되어 있는데 명나라가 베트남을 지배할 때 가져가서 북경에 보관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사고전서 도서목록에 “이 책의 원제는 대월사략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책의 본래 이름은 “대월사략”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중화사상에 사로잡혀 있던 명 나라 관리들에 의해 [대]자가 생략 되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