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3,Saturday

와신상담과 서시이야기(3)

| 지난이야기 |

서시가 태어난 BC 506년 월 나라는 초 나라를 공격하던 오 나라의 뒷통수를 치더니 오·월 두 나라는 철천지 원수로 변합니다. 와신상담 도광양회로 대변되는 오·월은 서시를 이용한 인류 최초의 미인계를 사용합니다.

 

범려는 백비를 통한 이간책으로 오왕 부차를 충동질 했고, 서시는 미인계로 한 몫 했습니다. 그러나 범려와 서시는 오자서가 죽은 날 마음이 무겁습니다. 오자서가 자결한 칼을 세상 사람들은 “촉루검”이라 부르는데 이는 “눈물을 흘리는 칼” 이란 뜻 입니다. 범려는 “훗날 촉루검은 부차를 향할 것이다” 라고 예언 하는데 그 예언은 적중해서 오자서가 죽은 2년 후 오왕 부차도 촉루검으로 자결합니다.
한편, 오왕 부차는 서시와 꿈같은 시간을 보냅니다. 서시의 요청으로 회계산 깊은 곳에 고소대를 지어서 부차와 서시 둘만의 공간을 만들었는데, 복도 밑에 크기가 다른 항아리를 넣고 마루의 틈을 조금 만들어서 서시가 걸을때마다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나도록 했습니다. 이를 “향섭랑”이라 합니다. 훗날 중국의 황제들은 고소대의 향섭랑을 흉내내서 복도 및 회랑을 만들었는데 이는 사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객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입니다. 중국의 권력자들은 자객 공포증이 있는지 조선의 경복궁을 모방하여 만든 자금성에 나무가 없습니다. 다른 것은 전부 경복궁을 모방했으나 나무가 있으면 자객이 은신할 수 있다고 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하네요.
서시는 범려가 지시한 마지막 임무를 수행합니다. “대왕께서 소녀 곁에만 계시면 정사는 어찌합니까. 무릇 영웅은 내치와 외치를 겸해야 하는 법인데, 대왕께서 패자의 역할을 다 하시려면 외방도 잘 평정 하셔야 합니다.” 당시 제나라와 노나라의 국경분쟁을 평정하라는 뜻입니다. 옛날에 초나라 재상 자원이 형수 도화부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 정나라를 정벌 했듯이, 오왕 부차는 서시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강대국인 제나라 정벌에 나섭니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을 미인에게 빠지면 이성이 마비되나 봅니다.
보통은 미인계가 성공하기 어렵죠. 왜냐하면 미인계가 성공하려면 남자가 여자에게 푹 빠져야 하고 자기에게 푹 빠져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남자 그것도 일국의 왕, 보통은 이 경우 여자도 남자를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순간 미인계는 실패합니다. 아마도 서시는 부차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네요. 15세 소녀 시절 만났던 범려가 서시의 마음을 잡고 있었던 것 일까요 ? 오나라 10만 주력부대가 제나라 정벌에 나서게 되자 범려는 월왕 구천에게 오나라 공격을 건의합니다.
12년 동안 절치부심 하던 월왕 구천은 드디어 복수전에 나섭니다. 월왕 구천이 오 나라를 공격할 즈음에 오왕 부차는 제 나라와 노나라의 국경 분쟁을 힘으로 억누르고 오·제·노 3국 임금이 회담을 하고 있었는데, 회담장에 파발이 당도하여 월 나라의 침입을 알립니다. 그러나 오왕 부차는 사흘을 더 머물며 자신의 패자 지위를 확고히 한 후 오 나라로 회군합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오왕 부차의 행동은 외침을 받은 임금의 행동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월나라의 군사력을 가볍게 봤거나 자신의 대변까지 먹으면서 자신에게 충성했던 구천이 변심할 수 없다고 생각한 듯 합니다. 오왕 부차가 급히 회군하여 전세를 살펴보니, 오나라 군대가 일방적으로 밀리는 형세라 오왕 부차는 철갑 기병을 보내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나 월 나라의 궁수들에게 전멸을 당합니다.
회계산으로 숨은 오왕 부차는 서시와 함께 동굴(서시동)에 숨어 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비를 보내 월왕 구천의 경우처럼 자신도 월왕의 노예로 살겠다고 하며 목숨을 구걸합니다.
오왕 부차의 애원을 들은 월왕 구천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도 오왕 부차를 노예로 부려 자신이 받은 치욕을 되갚아 주고 싶었으나 범려는 극구 반대하며 부차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 합니다. “대왕께서 한갓 분풀이에 집착하면 제 2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을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범려의 말을 들은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에게 자결할 것을 전합니다.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충간을 무시한 자신을 한없이 뉘우치며 오자서가 자결한 “촉루검”으로 자신도 오자서를 따라 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비단으로 얼굴을 세겹 감싸라고 합니다. “나는 죽어서 오자서를 만나면 얼굴을 마주 할 자신이 없다.” 오왕 부차가 남긴 마지막 유언입니다.
한편, 간신 백비는 월왕 구천과 범려에게 아부하며 오나라 신하들과 함께 월왕 구천에게 충성 맹세를 합니다. 그러나 월왕 구천은 백비에게 말합니다, “너는 나에게 너무 많은 뇌물을 먹었다, 너도 부차를 따라 가거라,” 라며 참형에 처할 것을 명령합니다. 하지만 백비는 “대왕께 받은 뇌물은 전부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대왕께서 오늘의 승리에 소인의 힘도 작용 했으니 낙향하여 남은 여생을 보내도록 선처 하소서” 라며 애원 했으나 월왕 구천은 냉정하게 백비를 죽입니다.
훗날 1975년 베트남이 통일 되었을 때, 북 베트남의 뇌물을 받고 남 베트남의 기밀을 팔아 먹은 남 베트남의 고급 공무원 60여명이 사형 당한 사례와 동일 합니다.
오 나라 점령 후 모든 처리를 마친 월왕 구천은 서시의 처리 문제로 고민합니다. 월왕 구천의 부인 월 대부인은 서시의 치명적인 미색은 나라를 기울게 한다며 무거운 돌을 매달아 서시를 바다에 던졌다고 사마천의 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오월세가 하고 월절서에는 다른 기록이 존재합니다. 그 내용은 범려의 이야기에서 살펴 보겠습니다.
와신상담의 진정한 승자는 범려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제 범려에 대해서 알아 봅시다. 범려는 초 나라 완 땅의 삼호라는 마을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즉 범려는 완 삼호 출신이고 초나라 사람 입니다. 범려와 문종은 같은 고향 출신으로 친구 사이 입니다.
젊은 범려와 문종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어떤 결정을 할까 고민하다 신흥국인 오 월 두 나라 중 하나를 택해 승부를 걸기로 의기투합 했습니다. 그러나 오 나라는 오자서와 손무라는 걸출한 영웅들이 있고 또한 인재들도 많아서 신생국 월 나라로 갑니다.
월왕 윤상과 아들 구천의 인정을 받은 범려와 문종은 월왕 윤상이 죽고 구천이 임금이 되자 범려는 책사로 문종은 행정가로 빛을 발휘합니다. “와신상담”은 범려의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 나라가 멸망하고 구천이 춘추시대 다섯번째 패자가 되자 범려는 구천에게 상소를 올려 물러날 것을 청합니다. “소신은 과거 주군께서 치욕을 당해도 보고만 있었으니 그 죄가 진실로 큽니다. 이제 물러나서 한가로운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하며 만류하는 구천은 두고 떠날 차비를 합니다. 그리고 문종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우리 주군은 함께 고생을 할 수는 있으나 함께 즐거움을 누리기는 어렵다. 또한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 법이니 나와 함께 떠나자.” 여기서 그 유명한 [토사구팽] 이라는 고사성어가 탄생 합니다.
한고조 유방의 일등공신 한신이 여태후에게 죽을때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는 토사구팽은 한신보다 300년 먼저 범려가 했던 말 입니다. 또한 한고조 유방의 책사 장자방 (장량)이 [존명불상(尊名不祥 )]이라고 말하며 은둔한 것도 범려가 말한 고사를 상기 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문종은 그동안 고생만 하고 재상 직을 버리기 아쉬워 남아 있다가 범려가 떠난 6년 후 의심 많은 구천에게 칼을 받고 자결 합니다.
야사에는 범려가 서시를 살리려고 서시를 데리고 구천의 곁을 떠났다고 합니다. 또한 제 나라로 간 범려는 “치이자이”로 개명 했으며 천부적인 상재를 발휘해 천금을 벌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다시 노 나라로 떠났고, 노 나라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돈을 벌어 나눠주는 노블리제 오블리주를 실천한 최초의 사람으로 기록됩니다. 그리고 치이자이는 (범려) 항상 젊은 부인을 데리고 다녔는데 천하에 짝이 없는 절색이라 기록되어 있어서 젊은 부인은 서시라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범려는 54살때 24살의 서시를 데리고 떠났으며 88세 사망할 때까지 항상 서시와 함께 다녔다고 하니 비록 나이 차이는 많으나 능력있고 자기를 아껴주는 범려로 인해 서시도 행복한 인생을 보냈다고 느껴집니다. 중국에서 범려는 상신(商神 / 장사의 신) 상성(商聖 / 장사의 성인) 삼취삼산의 노블리제 오블리주 (세번 취하고 세번 나누어 주다. 즉, 세번 천금을 벌어 세번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다.) 신화를 만든 성인입니다.
고려 말 성리학자 이제현의 시 한수 소개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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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라산 나무꾼 예쁜 딸은 이팔청춘
옥 같은 살결은 분도 연지도 일 없네
오나라 궁전의 환락은 언제 끝나나?
월왕 구천은 상담(嘗膽)하고 있는데
고소성 꼭대기는 가을 풀이 가득하고
성 아래에는 강물이 철썩이는데
치이 조각배는 지금 어디에 있는고

*치이 조각배 – 치이는 범려의 개명한 이름이며, 치이 조각배는 범려와 서시가 월 나라를 탈출할 때 타고 간 배

 

| 다음 이야기 |
중국의 정세 변화에 따라 월족들의 대이동이 시작되고 현재의 베트남 하노이 부근까지 진출하여 베트남 역사를 역동적으로 변화시킵니다. 또한 우리나라도 중국통일 후 이주민의 유입으로 고조선은 진통을 겪으며 또한 발전을 합니다. 이렇듯 닮은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를 비교하며 양국의 고대사를 살펴봅시다.

 

토사구팽 (兎死狗烹)
필요할 때 요긴하게 써 먹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혹하게 버린다는 뜻

존명불상 (尊名不祥)
이름이 높아지면 상서롭지 못하다는 뜻

삼취삼산(三聚三散)
범려가 재산을 세 번 모아 세 번 나누었다는 뜻으로 부자가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재산을 유용하게 베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선행을 비유하는 성어

*오월세가
오나라와 월나라의 임금에 대해서 기록한 역사책

*월절서
중국 후한의 원강(袁康)이 지었다고 알려진 책으로, 고대 오와 월의 흥망을 기록한 역사서

 


전 종 길 /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 (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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