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중언부언] 사랑, 자비

 

비엣남의 최대의 명절 뗏 연휴가 끝나자 분주한 일상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이 하노이에서 열리면서 세계인의 관심이 비엣남 하노이로 집중됩니다.
비엣남의 수도 하노이에 이 중요한 회담이 열림으로 국제적인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북미회담이 하노이에서 열리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있습니다. 1995년 미국의 경제 제재가 풀리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하게 된 비엣남을 세계에 드러내며 미국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효과를 낳고, 또 한편으로는 요즘 심각한 대립각을 보이는 중국에 대한 시위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비엣남의 하노이는 이 기회로 세계인의 머리에 다시금 각인되는 계기가 될 듯합니다.
이 글이 실린 책이 나올 때는 이미 정상회담 결과가 나왔겠지요. 부디 그 결과가 좋게 나와 한반도에 영구적 평화와 상생의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이렇게 분주한 마당에 호찌민에서는 한인회 재건을 위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본지는 새해 아침 이충근 회장의 전격적 사퇴로 사태해결의 물꼬가 열렸다고 보도했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모든 교민들이 김규회장 측도 사퇴를 하고 처음부터 다시 새로운 장을 만들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는데, 김규회장은 이 흐름에 동조할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그는 이충근씨가 자신과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사퇴를 하고 자신에게 뒤를 따르라 하는 모양새가 된 것에 대하여 실망하며 그가 만든 장에 올라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필자와의 전화 연결을 통해 본지와 인터뷰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지만 사퇴를 조건으로는 하라는 본지의 주문을 거절하여 본지와의 인터뷰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2월 23일 뿌린 성명서라는 내용을 보면, 그는 새 회장을 뽑으면 새 회장에게 자신이 한인회장으로서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의사인데, 이는 자신이 적법한 한인회장이었다는 것을 인정받겠다는 의도로 보여집니다. 그러면 사태 해결을 위해 회장 사퇴라는 용기있는 결단을 내린 이충근씨의 기록은 어찌되나요? 혼자 분규를 일으킨 인간으로 남습니까? 뭔가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부분에 대하여는 영사관이 공식적인 의견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사실 이 건에 대한 언급을 하면 기분이 우울해집니다. 그래서 아예 언급도 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가 사는 삶의 터전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외면도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싶은것만 하며 살수는 없다는 생각에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하긴 이런 혼란은 여기만 있는 것은 아니죠. 한국은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갈등이 지속되고 있죠. 그런 짓거리를 보면 속이 뒤집어 집니다. 그들의 행태를 보고 있자면 분노가 넘어 살의마저 일어나지만, 그들과 같은 인간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를 갚는 것은 나의 일이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 고 하였느니라.” (롬 12:19)

이런 성경 말씀을 읽으며 분노를 눌러봅니다.
제발 주님 주무시지만 말고 이 나라를 좀 보살펴주옵소서.
이런 부끄러운 현상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은 없을 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좀 엉뚱하긴 하지만, 우리 한국인은 기본적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덜한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인은 그동안 나라를 발전시키느라고 일만 하면서 인성적으로 훈련하지 못한 탓에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여 이렇게 매번 서로 죽일 듯이 다투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우리에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그 사랑에 대한 공부를 한 번 해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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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유명한 ‘사랑의 장’이 있습니다. 단 한 문장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급히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모든 것은 참으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 4-7)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가 안 잡인다면 이 구절을 반복하여 읽어보는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한 이 사랑은 영국의 제임스킹의 성경에서는 LOVE 대신 CHARITY 로 표현합니다. 즉, 자비입니다. 불교의 자비와 같은 말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피박 받으실 때 하시는 말씀, “주여 이들이 저희가 하는 일을 모릅니다. 이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하는 말씀이 바로 자비입니다. 부처님이 인간이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로 무지를 들며 ‘무지가 죄다’ 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자비심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렇게 사랑이라는 말을 자비로 바꾸어 보면 그 실체가 조금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즉, 사랑은 자비, 모든 이를 긍율히 여김입니다.
이 성구는 단지 사랑의 정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품는 방법과 실천하는 길을 알려줍니다. 이 성구를 다시 읽어보면,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랑의 덕목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즉, 인내입니다. 그리고 “친절하며”, 하고 다음 문장을 이끌어 내는데, 시기, 자랑, 교만, 무례, 사익, 분노, 불의에 대하여 부정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으로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하며 또 다시 인내를 강조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랑의 마음을 가지려면 인내가 필수조건입니다. 모든 것은 인내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을성, 이것이 사랑의 마음을 품고 사는 이들의 공통적 성품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친절’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시기, 자랑, 교만, 무례, 분노, 불의 등을 부정하지만 이는 차별 없는 친절에 대한 표현입니다. 조건없는 인내와 차별없는 친절을 말하고자 다른 부정적인 개념을 가져왔습니다.
이 두 가지 조건, 인내와 친절. 이것이 사랑을 품고 또 실천하는 방법이라면 우리 한국인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한국인은 인내, 참을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빨리빨리’가 우리 한국인의 특징적 성향으로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우리는 기다리지 못합니다. 오래 참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행동 강령이 친절입니다. 그것도 차별 없는 친절입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친절한가요?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한국인이 친절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호의를 가진 사람에게만 친절합니다, 우리는 관계없는 이에게는 친절은 커녕 관심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한국인이 낮선 사람에게 미소의 친절을 보이는 이가 있던가요? 가뭄에 콩나듯이 보인다면 우리는 사랑을 가뭄에 콩나듯이 실천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우리 한국인은 현실적으로 사랑의 마음을 지니거나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성품을 지닌 민족입니다.
이렇게, 하기 어려운 성품이기에 더욱 사랑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라도 배워야 합니다. 모든 것을 인내하며 모든 이에게 차별 없는 친절을 행하는 사회, 그것이 바로 사랑이 넘치는 사회입니다.
지금 하노이에서 북미 회담을 하는 두 정상의 마음에도 이렇게 인류에 대한 사랑이 작용하여 부디 슬기로운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을 기원합니다, 또한 호찌민의 분규도 서로에 대한 배려를 바탕으로 정의로운 결론을 도출하시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기대하기 힘든일이긴 하나, 한국의 정치판도 이런 사랑의 실천으로 달라진 모습을 보이면 좋겠습니다.
한국에서는 벌써 봄이 오는 모양입니다. 우리 국민들의 마음에도 봄꽃 같은 밝은 평화가 깃들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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