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회 – 마음에 품고 있는 회포
설명절을 쇠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생각보다 한국이 춥지는 않습니다. 날씨는 예년보다 따뜻한데 국민들 생활은 엄청 추워 보입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주변 상가에는 빈 상가를 임대한다는 푯말이 늘어났고, 서울 시내 거리의 빌딩 창에도 임대인을 찾는 붉은 글씨가 마치 무슨 상품 광고판처럼 건물 벽면에 내걸려있는데, 그 옆에는 정치인들의 신년인사 플랜카드가 경쟁을 하듯 나부끼고 있습니다. 참 아이러니하지요.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경제 실황을 확인하듯이, 임대라는 붉은 절규가 걸린 곳도 마다않고 환한 미소가 담긴 얼굴을 자랑스럽게 내거는 정치인들, 참으로 흐뭇하신 설을 맞이합니다.
섣달그믐 길고 긴 겨울밤을 가족들이 모여 밤을 세며 함께 기다리던 명절이 설이었죠. 만두, 떡, 부침개 등 풍족한 음식과 설빔, 그리고 세뱃돈이라는 남다른 풍요가 넘치는 명절이니까요. 세월이 지나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는 듯합니다. 경제적 부담으로 간혹 우울한 명절을 지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 이런 명절은 그런 부담을 감당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을 만나니까요.
우리는 어쩌면 명절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줄 모릅니다. 명절을 맞아 산지사방에 흩어져 있던 모든 가족들이 함께 모여 그간의 회포를 푸는 시간은 세상 그 무엇보다 귀중하지요. 더구나 우리처럼 외국 나가서 사는 가족이 점점 많아지는 나라에서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우리 명절은 가족의 만남이 전부가 분명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지난 양력 새해 첫날은 한국에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제외한 채 노모를 중심으로 4대손의가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세배를 드리고 신년 예배를 함께 하는 모습의 사진들을 실시간으로 받아보고 흐뭇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좀 외로웠습니다. 뭐 그리 중요한 일이 있다고 가족이 다 모이는 시간에 혼자 외국에서 지내고 있는가 하는 자문이 절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런 자문 끝에는 달래기 만만치 않은 외로움이 꼬리처럼 붙어다닙니다.
그래서 이번 음력 설에는 설을 몇일 앞두고 조금 일찍 한국행을 했습니다. 머지않아 백수가 되시는 노모에게 설에 세배를 올리는 일은 저에게 참으로 의미가 깊은 행사입니다. 아직도 정정하신 덕분에 같이 늙어가는 아들을 앉혀놓고 다리가 아프도록 한참 동안 덕담을 하시는 모친, 내년에도 또 이런 무릎 아픔이 계속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들 애와 조카 등 자녀들에게 세배를 받으며 의례적인 덕담을 몇 마디 하는데, 자칫하다가는 덕담이 아니라 책망이 되는 경우가 더러 발생하곤 합니다. 특히 결혼 안 한 자녀에게 가정을 이루라는 얘기는 그들에게는 결코 덕담이 아닌 듯합니다. 덕담하는 사람이 자녀의 속마음을 잘 모르기에 하는 소리 같기도 합니다. 왜 결혼을 회피하는지 속마음은 묻지 않고 그저 요구만 하죠. 사실 우리 부모는 자녀들을 잘 모르는듯 합니다. 이게 일반적인 경우이기도 하죠.
가족은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를 잘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신을 감추고, 부모는 자식에게 모범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줘야 하기때문에 실제와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속마음을 보이지 않는 환경에서는 오히려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를 잘 모르는 역설적인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어쩌면 우리는 BTS의 노래처럼 FAKE LOVE를 믿고 믿는 줄 모릅니다. 한번 스스로 돌아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녀가 부모인 자신에게 과연 몇 퍼센트의 속마음을 드러낸다고 생각하십니까? 결국 부모는 자식이 여는 마음의 퍼센트만큼만 자녀를 알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가족 간의 이해를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가족의 미래에 대한 설계를 함께 논의하는 행사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새해가 되면 사업체 운영에 대한 계획이나 개인의 목표는 열심히 잡지만, 가족을 단위로 한 목표나 계획을 잡지는 않는 듯합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나요? 가정의 계획, 이것을 만들려면 개인의 계획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가정의 경제를 공개합니다. 현재의 재산, 빚, 대출 등의 정보를 함께 공유하고, 그 쓰임새도 밝혀 결산을 같이 하고 앞으로 계획에 대한 논의를 한다면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안될까요? 아마 자녀나 부모 모두 스스로의 역할과 위치를 이해하는 데 엄청 도움이 될 듯합니다. 그런데 말처럼 실행이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가장의 주머니를 공개한다는 것, 보통 일이 아니죠. 그러나 그 무게만큼 가족이 진심을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추천합니다.
장기적 목표를 함께 만드는 것도 흥미로울 발상이 될 듯합니다. 미래의 일어날 장면을 공유한다면 각자의 역할 역시 정해집니다. 예를 들어, 20년 후, 큰 아이가 모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하는 행사가 열리는 데 그곳에 참석한 가족들 각자의 모습을 각자의 희망대로 그려넣는 것입니다.
신임 총장의 부모는 결혼 50주년 기념으로 크루저 여행 중이라 행사에 참석 못했고, 여동생은 음악을 함께 한 딸래미 둘과 3인조 현악단을 꾸려 오빠의 행사를 축하하는 음악을 담당하고 있었고, 삼촌은 500여 명의 내빈식사를 제공하는 캐터링 업체의 대표로 음식을 감시하고 있고, 남동생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국가의 초청으로 한국의 농업을 전수하느라 바쁜 관계로 참석하지 못하고 엽서만을 보내왔다.
뭐 이런 미래의 장면을 만들어 공유한다면 가족 모두가 서로의 꿈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고, 미래의 청사진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이 되기 위한 노력도 함께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미래는 상상 속에 살다가 의지에서 자라나 결국 현실이 됩니다. 그런 미래의 모습을 공유하는 가족이라면, 엉뚱한 덕담으로 썰렁한 분위기를 만드는 경우는 없을듯 합니다. 또 반성하며 이 글을 씁니다.
인간의 삶에는 반성하거나 후회할 일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흔히 하는 후회는 잘못된 정치인에 대한 지지입니다. 너무 근시안적인 시각으로 그들의 선동에 넘어가 덜컥 나라를 맡기고는 임기 내내 후회를 하곤 하지요. 그러나 정말 후회해서는 안될 일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가족을 만드는 일입니다. 가족이란 단순히 생산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기간 사랑의 교감이 이루어져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한번 기회를 놓치거나 실패를 하게 되면 충격도 크고 회복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후회를 남기지 않아야 합니다.
행복은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을 조건으로 이루어집니다. 혼자만 겪는 행복은 불행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나와 늘 함께 하는 가족이 있어야 행복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우리 같은 범인에게는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아무리 즐거운 명절도 가족이 없다면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잔인하게 외로움을 확인하는 불행한 시간이 될 뿐입니다.
후회란 천국을 바라보며 지옥을 맛보는 것이라고 하지요. 명절에 가족이 모여 서로 사랑을 확인하던 천국의 기억을 간직한 채 외롭게 혼자 명절을 보내는 지옥을 경험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아쉬운 설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다가오는 명절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며 가족들과 아쉬운 이별을 합니다. 돌아가는 가족들을 배웅하는 발길에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 치며 헤어지는 아쉬움을 엄격하게 달래줍니다.
역시 설은 겨울이 제격입니다.
이럴 때 함박눈이라도 흠뻑 내려준다면 헤어지는 아쉬움이 조금은 덜할 듯한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