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는 하노이와 호찌민의 환경적, 문화적 차이를 이곳에서 생활하시는 교민들의 입장에서 살펴봤다. 애초 하노이 교민사회의 흔적을 찾아서 시작한 일인데, 하다보니 아예 베트남과 한국의 관계의 시작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해서 이참에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맺음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본 후 근 현대사의 흔적을 따라가며 지금의 교민사회 형성까지 올라가 보자.
베트남-한국 관계에 관한 기록
[ 최초의 교류 – 고려시대 ]
안남국(安南國, 현 베트남)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아주 오래전이지만, 직접적인 관계가 시작된 것은 고려 인종 5년인 1127년이다. 당시는 안남국의 첫 독립국가인 리왕조(1009~1225) 제5대 임금인 신종이 재위하던 때였다.
정선 이(李) 씨 세보에 의하면 시조인 이양흔은 리왕조 제4대 임금인 인종의 셋째 아들로 형과 왕위 다툼을 벌이다 실패해 북송으로 피신했으며, 금나라가 침입하자 이를 피해 고려로 망명했다. 경주를 거쳐 강원도 정선에 자리를 잡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고증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 학계의 인정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그에 반하여 화산 이씨의 경우 확실한 고증이 남아 있다.
현재 한국의 화산 이 씨는 안남국 왕자의 후손들로 시작된 성씨다. 화산이씨의 시조인 이용산은 베트남 리 왕조(이조)의 개국황제인 이태조 이공온(李公蘊·Lý Công Uẩn)의 7대손으로, 1226년 정란에 왕족들이 살해당하자 화를 피하기 위해 측근들을 데리고 바다에서 표류~ 황해도 옹진군 화산면에 정착했다고 전한다. 당시의 고려 고종은 이를 측은히 여겨, 그에게 그 지역의 땅을 주었으며, 그를 화산군으로 봉해져서 정착을 도왔으며, 원나라 침입 때 지역 주민들과 함께, 몽고군과 싸워 전과를 올렸으며, 이후 그의 후손들이 이용상을 시조로 받들어, 본관을 화산으로 삼았다.
이 역사적 기록은 베트남 정부로 부터 인정을 받아, 베트남 정부는 1995년 이들을 정식으로 베트남에 초대하여 도무오이 당서기장을 비롯한 베트남의 지도급 인사들이 직접 환대를 하고 그들에게 베트남인과 동등한 법적 대우를 부여하고 또 왕손으로 인정을 함으로써 화산이씨가 베트남 옛 황실의 후계자임을 확인했다. 현재도 베트남 인사가 한국을 방문할 경우, 화산 이씨를 방문하는 것도 관례가 되어, 화산 이씨가 양국 관계에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베트남 정부는 해마다 리 왕조가 출범한 음력 3월 15일이면, 종친회장을 비롯한 종친회 간부들을 기념식에 초청하여 행사를 진행한다. 2002년 12월 베트남의 하노이 오페라 극장에서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된 이용상 왕자의 일대기를 공연했다. 베트남 수교 후 2005년 경에 베트남에 진출한 골든 브릿지 증권사의 사장이 화산 이씨 종친회 운영위원으로 있는 이상준씨였다는 것이 교민사회의 화제로 등장 했던
적이 있었다.
[ 조선시대의 베트남과 교류 ]
조선왕조실록에도 안남국에 대한 기록이 여러 차례 있는데, 대부분은 중국에 다녀 온 사신이 안남국 사신에게 들은 정세나 중국과의 관계 등을 보고한 내용이다.
『태종실록』 13권 1407년 4월 8일 첫 번째 기사는 편전에서 국방대책을 논의한 내용이다. 안남국이 반역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명의 황제가 아예 안만국의 국민의 국민을 무차별 살상하고 안남국을 정벌해버린 것에 대하여 명 황제의 옹렬함을 질시하고 그 경계를 강화할 것을 태종이 지시한다. 임금이 안남국의 정세를 훤히 꿰뚫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간접적이나마 교류가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 30년인 1597년 30대 초반의 젊은 관료였던 이수광은 진위사로 북경에 파견되어 50여 일동안 사신단 숙소인 옥하관에 머물렀는데, 여기서 역시 안남국 사신으로 온 풍극관을 만났다. 서로 필담을 나누며 시를 주고받았다. 이수광이 풍극관의 책에 서문도 써준다. 귀국한 풍극관은 이수광의 한시를 널리 퍼뜨렸고, 그결과 안남국에서는 이수광의 시집은 돈 주고도 사지 못할 만큼 인기였고, 유생들의 좋은 공부 자료가 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가 노예생활을 하다, 어느 무역상의 눈에 뛰여 1604년부터 세 차례나 안남국을 방문하고 귀국한 조완벽에 의해 국내에 전해졌다. 이수광의 시가 얼마 인기였는지는 조선왕조실록, 이지항의 『표주록』, 안정복의 『목천현지』 등을 통해 전해지고 있으며,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상세히 소개되었다.
『숙종실록』 23권 1691년 12월 5일 첫 번째 기사는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 온 민암과 강석빈의 보고이다. 임금이 민암에게 물었다. 이번에 안남 사신도 왔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옷을 입었던가. 머리에는 검은 사모를 쓰고…중략…행동거지는 가벼웠으나, 제법 예양을 갖추었습니다. 또한 안남 사신에게 이수광의 시를 알고 있느냐 물었는데, 능히 알고 있어 함께 암송까지 했습니다. 풍극관에게 시를 지어준지 94년이 지난해로 이때까지 이수광의 시가 여전히 인기였음을 확인한 것이다.
실록에는 이후로도 안남국의 기후특성, 제도와 문화, 주변국과의 관계, 역사 등이 담긴 사신들의 종합보고서부터 안남국 사신이 북경에 왔다가 대한(大寒) 추위에 얼어 죽었다(1796년 1월 10일 첫 번째 기사)는 내용까지 다양한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조선과 베트남은 ”사상적으로는 한자 문화권 안에 있지만 정치적으로 독립 된 중화제국의 변경 독립 국가”라는 점을 공유하였기 때문에 서로의 정치적, 문화적 상황에 대한 상호관심을 유지하는 정도의 관계였다. 즉, 베트남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는 없었지만, 고려시대와 같이 명나라, 청나라로 간 조선 사신들과 중국에 온 베트남 사신들이 서로 교류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를 통하여 베트남 정세를 조선에서 파악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687년에는 24명의 조선인들이 제주도에서 풍랑을 만나 베트남까지 표류후 귀국한 사건이 있었다. 베트남 측에서는 이들을 돌려보내면서 외교 문서들을 동봉해서 보냈으나, 조선 측에서는 베트남의 직접적인 교류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미천한 외교 관계에 비해 베트남의 정세는 꽤 신속하게 조선 조정에 보고되었다.
개화기 때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는 베트남을 보면서 일종의 반면교사로 삼았으며, 베트남의 몰락 과정을 적은 중국 정치가 양계초의 ‘월남망국사’가 한글로 번역되어서 국내에 출판되기도 하였다. (참조: 국가 기록원)
[ 근, 현대의 기록 ]
2018년 9월 30일에는 1920년 전후로 한국의 임시정부 요인들과 당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청년 호찌민이 파리에서 약소국의 설움과 독립에의 열망을 나누었다는 내용이 프랑스 정부자료로 처음 확인되었다.
또한 청년 호찌민이 1929년 소련에서 국제레닌대학교에 유학했을 시절에 박헌영과 만나 교류했고 친분관계를 쌓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세계 제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일본의 강점기를 경험하고, 또 전쟁의 종식과 함께 양국은 각자 독립과 분단의 길을 걸으며 동병상련의 관계를 형성한다.
북부 베트남에 한국인의 등장
베트남의 북부지역에 한국인 등장은 일본의 한국 강점기 시대, 일반 노무자 및 일본군 관련으로 베트남에 온 한국인으로 추정되며, 어느 사적 기록에는 하노이에 약 100여명의 한국인이 1946년에도 남아서 한인회를 세웠다고 하지만, 교차검증 및 실증자료 부족으로 없는 기록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남부 베트남의 한국인 사회 형성
·남부 지역의 경우, 북부지역과는 달리 대한민국 과 베트남의 관계는 1956년 대한민국과-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이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시작된다.
·1965년 베트남전 참전으로 교민수가 불어나기 시작하여, 1968년 경에는 주월한국군을 제외한 노무자 및 그 외 민간인 인구는 약 15000명대로 불어나며 대규모의 교민사회가 군인가족과 군속 등을 중심으로 형성되나 북베트남군의 승리로 끝난 전쟁 종식과 함께 자연스럽게 그 자취는 사라진다.
북부와 남부 한인사회 형성의 근원적 차이
·남부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한인들의 역사는 1975년 이전에 베트남에 거주했던 인원들이 냉전이 붕괴되고 북방정책의 성공 그리고 경제 개방이 되면서 다시 베트남으로 회귀하는 형태가 초창기 교민들의 특징이었다.
·이와는 달리 북부 하노이는 정부권력의 중심지라는 점과, 대규모투자 수행시 정치권력이 필요한 특성상 대기업 위주의 주재원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통일 후 교민사회의 형성 과정
베트남의 한인사회 형성은 크게 1992년 수교를 중심으로 전과 후로 나눠진다.
< 수교 전 >
·1992년 이전부터 한국대기업을 중심으로 베트남 진출이 서서히 고려중이었으나, 1992년까지 베트남은 여행금지국가로 분류되있어서 방문조차 어려운 실정이었다.
·1981년 남베트남 억류된 마지막 교민이 나간뒤, 19992년 이전까지 공식기록상 북부 하노이에 온 유일한 한국인은 시장 조사차 나온 대우측 인사가 전부였을 정도다. 그러나 기록에 남지 않은 한국인사들의 방문은 이번 조사를 통해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1989년 경부터 대우 종합상사를 중심으로 시장조사가 진행되었는데, 당시 소련 및 북한, 구 사회주의권 개방에 따라 새로운 시장을 조사하기 위한 전수조사의 일환으로 베트남도 시장조사를 진행된 것으로 사려 된다.
·당시 포항제철(현 포스코)도 1990년 시장조사를 시작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있다.
·1991년 2월 당시 대우종합상사 캐나다 지사장 (김주성) 대우 베트남 지사장 발령이 공식적으로 보도됨으로 당시 김주성사장은 수교 전에 사업목적으로 베트남 하노이에 정식 입국을 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그 해 대우는 하노이 신도시 건설 사업권을 획득하며 한국의 대우라는 이름을 베트남 관료들에게 심어준다.
·같은 해 1991년 중순, 포스코도 베트남 사무실을 하노이에 개설하며 사업을 시작한다.
·1992년에는 방림방적이 하노이 외곽지역에 대규모 방적 공장을 세운다. 그룹사 차원에서 다각도의 사업을 시도하며 접근한 여타 대기업과 다르게 섬유 공장을 하나를 세우는 투자를 결행한 것이 흥미롭다.
< 1992년 한국-베트남 수교 후 >
·1994년 금성사(현 LG전자), 베트남 컬러TV 합작희양서를 체결후 베트남 본격 진출한다. 남부지역이 주로 중소기업 및 섬유업체 등의 임가공업 진출이 활발하게 시작되면서 남부에서는 1994년 부터 교민 1세대가 생겨나는데, 이들은 주로 중 소규모의 봉제 섬유관련자과 월남전쟁 전에 이곳에 거주했다가 다시 돌아온 회귀자로 이루어 졌다.
·반면 북부지역은 수교 이전부터 베트남 진출을 기획한 대기업의 출신들로 한인 커뮤니티가 시작되면 양 지역이 극명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물꼬를 튼 베트남 항공의 한국 노선 취항
·1995년 6월 대기업 상사의 진출로 인하여 수요가 발생하자, 김포-하노이 노선을 베트남 항공 (주2회) 취항을 시작한다. 이는 이미 1993년 김포-호찌민에 이은 2번째 한국 직항 노선으로 이 항로의 개설은 한국과 베트남의 본격적인 관계맺음의 신호탄이 된다. 그전까지는 하노이 사람들은 호치민이나 홍콩을 경유하는 노선을 이용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또한, 2003년에는 서울-하노이 노선에 국적기인 대한항공, 아시아나 항공이 취항에 참여를 시작하였고, 2004년에는 본격적인 기업 진출과 더불어 하롱베이 등의 관광 붐으로 인하여 수요가 급증하여, 하노이와 한국의 국제 노선이 호찌민 노선보다 많은 1일 3회로 성장하며 하노이에 한국인의 관광 및 상용 목적의 입국이 증가하기 시작함.
한국의 IMF위기로 진출 정체와 그에 따른 문제점 노출
·이후 한국의 외환위기 등으로 베트남의 한국기업 진출은 2000년대 초반까지 정체된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또한 그 여파로 한국에서 실패를 맛본 사람들이 목적없이 대규모로 호찌민으로 유입되면서 호찌민 한인사회는 문화 충돌에 따른 혼란기를 겪게된다.
·IMF는 베트남의 한인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불어왔다. 그 변화는 양극화다. 오늘 내일하며 부도를 넘기며 연명하던 봉제품 수출공장은 하루밤 사이에 돈 벼락을 맞아 비명을 지르는 만면, 한국에서 완전히 털려 쪽박을 찬 사람들과 그로 인한 범죄자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특히 호찌민 한인사회는 그야말로 뿌리를 알 수 없는 로터스 사회로 접어든다.
IMF 이후 교민사회의 양적 증가에 따른 변화와 한인회 운영
·IMF이후 급격히 증가한 교민의 유입은 양 지역 교민사회에 급격한 변화를 불러온다.
·하노이의 경우 오히려 기업의 진출이 둔화되며 정체를 이루지만 한국의 모기업에 사라지면서 귀국하지 않고 베트남에서 자기 사업을 시도하는 자영업자가 새롭게 생겨난다. 그들이 한인회에 유입되면서 하노이 한인회 역시 파견자와 자영업자의 조정국면이 생겨나며 과도기를 겪는다. 하노이 한인회가 교민들의 중심이 되는 계기는 2001년 자영업을 하던 이중열 4대 회장이 들어서면서 전제 교민을 상대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후 김정인, 최봉식, 구본수 회장을 거쳐 10대 고상구회장 체제에 들어서며 세계 최우수 한인회로 선정되는 등 하노이 한인회는 전성기를 맞는다.
·반면 호찌민은 다양한 부류의 유입으로 극도의 혼란기를 맞는다. 별다른 활동이 없는 한인회에 교민의 관심이 없을 시기, 유일하게 관심을 갖고 있는 원로들의 지나친 한인회 개입은 존경 받을 수 없는 회장과 무자격 회장 등을 만들어 내며 교민들이 한인회를 기피하는 현상이 일반화된다. 이런 불화의 조짐을 만들어 낸 것은 호찌민 총영사관이 제 5대 장기호 회장의 사적 기행을 이유로 그를 불신임하며 김지영 총영사가 한인회 당연직 고문에서 사퇴하고 그 여파로 장기호 회장이 중도 사퇴를 하게되는데 그것으로 한인회의 구심점이 사라지면서 지탱할 수 있는 힘을 잃는다. 더구나 박승호 회장이 학력시비로 또 중도 퇴진을 하자, 한인회에 대한 극심한 불신이 교민사회 전반에 깔린다. 그 후 등장한 회장들 역시 정관변조를 비롯하여 허위학력 시비 등에 휘말리면서 호찌민 한인회의 정상적 활동은 사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