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바쯩 자매, 베트남 여성의 강인함을 전하다.
베트남 역사학자 레만탁(Lê Mạnh Thát)옹의 설명에 의하면 한 비엣전쟁은 후한의 폭정에 맞선 단순한 봉기의 차원이 아닌, 여성리더에 의한 최초의 독립전쟁이자 실제로 독립을 쟁취한 획기적인 사건이다. 베트남 사가들 특히 이 전쟁의 주인공인 하이바쯩 자매에 대해 한결같이 “중국 1 천년간의 지배기간 (B.C. 111~A.D. 938) 중 최초로 독립국가를 세운 여성지도자들이자 최초의 여왕(쯩짝)으로 평가한다. 쯩 자매가 세운 나라는 A.D. 40부터 3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당시 이들의 부대에는 무려 75 명의 여성장군이 있었는데,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거의 전무한 특별한 경우였다.
‘두 명의 쯩부인’이란 뜻으로, 쯩짝(Trưng Trắc ;徵側/징칙)과 쯩니(Trưng Nhị ;徵貳/징이)자매를 지칭하는 말이다. 베트남사기전서(Đại Việt Sử ký Toàn thư)의 기록에 따르면, 이중 쯩짝은 메린(Mê Linh;오늘날의 빈푹성)지역에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를 쯩느븡(Trưng Nữ Vương;쯩여왕)이라 불러 중국에 대한 자존감을 표현했다.
전쟁의 발단
지난 호에 소개한 대로 BC 179년 찌우다는 앙증브응 왕이 다스리는 어우락국을 빼앗고 남비엣에 복속시켰다. (훙브응시대 종말) BC 111년 전까지 찌우 왕조 역시 중국의 한나라에 복속되고 만다. 당시 한나라는 다시 이 지역을 야오찌 (북부)와 끄우쩡(그 아래), 녁남(중부) 세 부분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AD 8년 왕망이 한나라를 찬탈하고, 다시 유수가 그를 죽이고 제위에 올라 스스로 광부데 (Quang Vũ Đế;광무제)라 칭했다. (동한 시대)
폭정과 압제, 수치와 모욕의 나날들
AD 34년 야오찌(Giao Chi,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오늘날의 북부 베트남)로 파견된 후한의 또딘(Tô Định) 태수는 제일 먼저 양민들을 강제로 불러들여 노역을 시키고 군졸을 삼기도 했다. 게다가 중국인들이 대거 이곳으로 이주하여 땅을 차지하고 마을을 이루어 이곳 주민들과 서로 동화되어갔다. 한나라의 관리들은 기존의 통치자인 락뜨응이나 락허우(촌장)를 멸시하고 그들의 권리를 빼앗았으며 심지어 주민들이 보는 가운데 심한 모욕을 주기도 했다. 한편 한족은 복장에서 예식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주민들의 풍습과 습관까지도 강제로 바꾸려 했다. 백성들은 점차 더 가난해지고 억울한 일도 늘어만 갔다. 이중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일은 부녀자들이 겁탈을 당하거나 치욕을 당하는 것이었으며, 중세와 노역 역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 결과 한나라를 향한 증오심은 날이 갈수록 더 크게 불타올랐다.
봉기에서 해방의 날까지
봉기의 성지, 메린땅
이 시기에 메린(Mê Linh;지금의 하따이 성 부근) 지역의 여걸 쯩짝 (Trưng Trắc)은 쭈징지역 촌장의 아들 티삿 (Thi Sách)과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당시 이들은 의협심과 애국심이 남다른 데다 두 사람 다 한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무척 강했다.
전쟁의 도화선, 티삿의 죽음
봉기는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한나라 군대가 결혼식 준비로 들떠 있던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티삿을 죽임으로써 본격화된다. 당시 한나라 태수는 각 지역에서 이미 시작된 반란을 멈추라고 그를 협박했는데 결국 티삿이 이를 거부하자 그를 살해한 것이다. 마침내 그 소문이 두 자매의 귀에 들어갔고, 마침내 참아왔던 울분이 한꺼번에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두 자매는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애국심에 불타는 연설을 했다.
이때부터 수십 명씩 소규모로 저항하던 의병들이 두 자매의 부대에 가담하여 그들의 지휘를 받기 시작했다. 아뚜에서는 50여명의 처녀들로 구성된 의병들이 합류했는데, 이들은 활 솜씨가 백발백중인데다, 걸음은 바람같이 빨랐다. 메린 지역 외곽에서도 두 자매의 부대를 격렬하게 환호했으며, 고원지대나 산간지대의 소수민족들도 속속들이 몰려들었다. 이밖에도 동쪽지방 안빈 (An Biên-지금의 하이퐁)과 타이빈 (Thái Bình)에서는 레쩡(Lê Chân)과 박낭 (Bát Nàn)이, 북쪽에서는 탄티잉(Thanh Thiên), 남쪽 (하따이 지역)에서는 쭈뜩(Chú Tước)과 찐툭(Trinh Thục)등과 같은 여장군들이 동참했다.
파죽지세, 감격스런 해방
1년도 되지 않아 하이바쯩 부대에 합류한 의병수는 65개성에서 5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당시 야오찌의 인구는 74만명 정도) 메린은 본래 역대 훙브응이 통치하던 땅으로, 바로 이곳을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대군이 형성되었다. AD 40년 어느 봄날 하따이성 학(Hát) 강 근처에서 수많은 군사들이 항오를 벌인 가운데 두 자매는 하늘을 향해 제사를 올렸다. 이후 하이바쯩 자매의 의병들은 제일 먼저 한나라의 관아가 있던 메린(Mê Linh)을 초토화시키고 곧바로 한나라 식민통치의 중추적인 곳이자 또딘(Tô Định;당시 태수)이 다스렸던 루이러우(Luy Lâu)로 진격해 들어갔다. 두 자매는 다시 식량•무기 보급로인 꼬로아(Cổ Loa)를 먼저 점령하고 원병을 청하지 못하게 동서남북으로 의병을 매복시켜 퇴로를 차단했고, 마침내 하이바쯩 자매는 코끼리 등에 올라타고 루이러우로 입성, 감격스런 해방을 선포했다. 두 자매가 제일 먼저 한 일은 2년간 면세조처였다. 또한 훙브응(Hùng Vương)시대의 옛 관직이 회복되고 결혼, 장례, 복장, 그밖에 각종 풍습들이 되살아나는 등20년간 한나라의 폭정에 시달렸던 이 지역에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
후한과의 숙명의 대결
1차 침공 실패
이에 후한 광무제는 백전노장이요 불굴의 전사로 통하는 마빙(Mã Viện)장군과 루롱(Lưu Long) 장군을 앞세워 2만의 군사와 함께 대대적인 공세에 나선다. 마빙장군은 애초 수군을 두 갈래로 나누어 수로를 이용해 헙포(Hợp Phố)지역으로 침공해 들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첫번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숲속의 지형에 통달한 소수민족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작전을 변경, 바닷길을 이용해 밧당(Bạch Đằng) 강을 거슬러 올라가 꼬로아(Cổ Loa ;고대 베트남의 성도)지역 동부지역 공략했다. 처음에는 여장군 레쩡의 격렬한 반격에 많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마침내 2달 후 마빙의 군사들은 애오찌에 발을 디뎠다. 이에 하이바쯩 자매는 메린에서 이들을 치기위해 내려와 양군 사이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결국 마빙은 의병 수천명을 죽이고 만여명을 생포한다.
필사항전, 연속 패퇴
교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장비와 경험이 일천한 하이바쯩 군대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마침내 43년 3월 패퇴하고 만다. 당시 마빙장군은 의병 수천명의 목을 치고 수만명을 사로잡는다. 하이바쯩 자매는 또 다시 후퇴를 거듭하다 꼬로아에서 필사적인 항전체제에 돌입한다. 이에 마빙은 꼬로아 북쪽의 랑박(Lãng Bạc)에 기지를 만들고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다. AD43년 음력 3월 8일 결국 엄청난 손실을 입고 껌케 (Cấm Khê) 기지가 포위되자 두 자매는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학강에 뛰어 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43년 5월) 후한서에 따르면 한나라 병사들은 이곳에서 수천명 이상을 학살했다.
후한군의 퇴각
하지만 두 자매가 죽고 나서도 항쟁의 열기가 더욱 거세지자 결국 AD44년, 내 한나라 군대는 북으로 귀환하고 만다. “차라리 죽을 지언정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베트남민족의 불굴의 의지앞에 머리를 숙인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전쟁은 중세 천년동안 중국에 머리를 조아렸던 남성들이 분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특히 이들 두 자매는 중국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불세출의 여걸이자, 베트남 역사상, 아니 세계 역사상으로도 보기 드문 베트남 민족의 영웅이다.
(현재 두 자매를 기리기 위한 사당이 여러 곳에 있으며, 그 중에서도 빈푹성 메린 사당과 하노이 하이바쯩군의 사당에서는 매년 음력 3월 6일(여성의날) 성대한 의식이 벌어진다. 또한 호찌민시 중심부를 연결하는 길 이름 또한 하이바쯩거리로 많은 이들이 거리 이름으로 베트남 역사를 배우고, 그들의 위대한 업적을 영원히 기억하게 한다..
* 다음 호에는 Ba Trieu (Trieu Thi Trinh) 전쟁에 대하여 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