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3,Saturday

전종길의 역사더하기 – 서시 이야기

전설이 된 미녀 서시와 관련된 고사성어 이야기

| 지난 내용 줄거리 (종합) |
춘추시대 미녀 도화부인은 남자들이 한번 보기만해도 넋을 잃을 정도의 미모 입니다. 따라서 남자들은 도화부인을 차지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한 싸움을 많이 했습니다. 자신의 미모 때문에 첫번째 남편 식 나라 임금과 형부 채나라 임금은 도화부인을 차지 하려는 초 문왕에게 나라를 통째로 잃고 목숨까지 부지하지 못했습니다. 두번째 남편 초 문왕과 대화 없이 10년을 살았고 초 문왕이 죽자 시동생인 초 나라 재상 자원은 형수인 도화부인을 강제로 범하고 그 댓가로 자원과 그 일가족은 비참하게 살육 당합니다. 도화부인은 자신의 미모를 저주하며 다시는 남자 앞에 나타나지 않고 숨어서 지냅니다. 이렇듯 역사에 기록된 미녀들은 여자로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춘추시대 최고의 미녀로는 단연 서시를 꼽는데요. 서시는 4천년 중국 역사에서 뽑은 4대 미녀 중 첫번째로 등장하는 미녀입니다. 서시는 BC 506년 월나라 저라산 기슭 저라촌에서 태어났고 성은 “시” 이름은 “이광” 즉 “시 이광” 입니다. 이렇게 “시 이광”을 서시라고 부르는 이유는 저라촌에 사는 시씨들은 동촌과 서촌, 즉 동쪽 마을과 서쪽 마을로 갈라져 살았는데 서시는 서촌에 살았던 이유로 “서시(西施)”라고 불렀죠. 즉 저라촌 서촌에 사는 “시씨”라는 뜻입니다

서시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아버지는 나무꾼이고 어머니는 동네 빨래와 삯 바느질을 해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정도입니다. 서시는 어릴때 부터 어머니를 도와 냇가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곤 했는데 빨래하는 서시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물고기들이 넋을 잃고 보다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버려 강 바닥으로 가라 앉았다고 하여 서시를 ” 침어미인(沈魚美人)” 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서시는 가슴에 통증이 있어 자주 가슴에 손을 얹고 얼굴을 찡그리며 다녔는데 서시의 찡그리는 모습 마저도 너무 아름다워서 서촌 마을 여인들이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얼굴을 찡그리며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못 생긴 한 여인이 남자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서시가 입던 옷을 입고 가슴에 손을 얹고 얼굴을 찡그리며 하루종일 동네를 돌아 다녔는데 동네 남자들이 모두 집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여기서 “효빈(效顰 / 분수도 모르고 남의 흉내를 낸다)” 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겼습니다. (조선이 낳은 천재 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자주 인용하던 고사)
서시가 살던 시대는 와신상담으로 유명한 오나라와 월나라의 30년 전쟁을 하던 춘추시대 말기입니다. 아버지 오왕 합려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오왕 부차는 3년간 장작 위에서 잠을 자고,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에게 전쟁에 패하고, 부차의 노예가 된 후, 치욕을 갚기 위해서 부차의 대변을 먹고, 19년간 쓸개를 핧으며 복수를 위해 사는 흥미진진 하고도 살벌한 시대에 서시가 살았습니다.
월왕 구천은 월족 여인 서시의 도움으로 마지막 전쟁에서 이겨 부차를 죽입니다.
베트남 역사에서 월족은 베트남 민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요 어떤 학자는 서시는 베트남 사람의 조상이고 월왕 구천이 지배하던 장강(양자강) 이남은 베트남 영토라고 주장합니다.
서시 이야기 말미에 고대 중국의 월족과 베트남은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영토는 어디까지 인지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서시가 살던 시대에는 수 많은 영웅들이 활약했던 시대입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복수의 화신 “오자서” 손자병법을 쓴 “손무” 삼취삼산(三聚三散)의 ” 범려” 등 3명이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3명의 주역들 활약을 살펴봅시다.

BC 523년 초 나라 평왕은 태자 건의 신부가 될 진 나라 공주 맹영을 자신의 첩으로 삼고 맹영의 잉첩(귀족의 딸이 출가할 때 데리고 오는 시녀 – 고대 중국의 풍습) 중 한명을 태자의 배필로 정합니다. 간신 비무기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초 평왕을 꼬드겨서 생긴 사건 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태자가 임금이 되면 자신을 죽일 것 같아 비무기는 불안합니다. 그래서 후환을 없애기 위해 태자와 태자의 스승 오사와 두 아들 오상 오원(오자서)을 모함합니다. 평소 학식있는 명문가의 후손 오사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비무기는 태자와 오사가 역모를 한다고 모함하여 오사를 하옥 시킵니다. 초 평왕은 편지를 보내 두 아들을 부르면 살려 주겠다고 오사를 설득합니다. 오사는 말합니다 “큰 아들 오상은 천성이 착해서 아버지가 부르면 죽는 것을 알고도 올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작은 아들 자서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오사는 임금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죠.
오사의 편지를 받은 오상은 말합니다. “내가 가더라도 아버지의 목숨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버지가 부르는데 둘 다 가지않으면 불효가 될 것이고 둘 다 가서 죽으면 치욕을 씻지 못할 것 아니냐. 이 또한 천하의 비웃음 거리가 된다. 너는 가거라 너라면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가서 함께 죽겠다” 두 형제는 울면서 서로 네 번 절하고 이승에서 영원한 이별을 합니다. 저승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 두 형제는 그날 밤 서로 다른 길을 갑니다. 오사의 예언대로 오자서는 도망치고 오상만 옵니다. 오사는 한탄합니다.
” 자서가 도망 갔으니 장차 초 나라는 큰 환란에 빠지겠구나”
초 나라를 빠져 나간 오자서는 오 나라로 도망가서 “와신상담(臥薪嘗膽)” 사건 발생의 주역이 됩니다.
오 나라에 도착한 오자서는 복수에 마음이 급했지만 차분하게 일을 진행합니다. 신분이 천한 백정 전제의 능력을 알아본 오자서는 전제와 결의 형제를 맺고 지극정성을 다 합니다. 오 나라 왕위계승의 문제점을 파악한 오자서는 관상 잘 보는 피리에게 부탁하여 공자 “광”을 만납니다. 공자 광을 만난 오자서는 ” 저는 오자서라고 합니다. 제가 공자의 소원을 풀어 드릴테니 공자께서는 제 소원을 풀어 주시지요.”라고 합니다.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뜻을 같이 합니다.
공자 광의 생일에 초대받은 오왕 요는 자객 전제에게 살해 당 합니다. 신분을 초월한 오자서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전제는 비수를 잉어찜 속에 숨기고 들어가 왕을 살해하고 호위 무사들에게 죽음을 당한 자객 전제는 사기 “자객열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당시 사용했던 비수를 사람들은 ” 어장검(魚腸劍) “이라 부릅니다.
BC 513년 공자 광은 오 나라 제 24대 왕으로 등극하니 그가 바로 오왕 “합려” 입니다. 합려의 일등공신 오자서는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 합니다.
한편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는 오자서가 오 나라 재상으로 등용 되었다는 말을 듣고 오자서를 만나러 옵니다. 몇 마디 대화로 서로를 알아본 두 영웅은 금세 의기투합하고, 오자서는 오왕 합려에게 손무를 천거합니다. 병법의 귀재 손무를 만난 합려는 손무의 용병술을 직접 보기를 원하자, 손무는 “저는 궁녀들도 절도있는 군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 합니다. 즉석에서 2명의 후궁과 100명의 궁녀를 모아놓고 훈련을 시키는데 궁녀들은 깔깔 거리며 군령을 무시하자 손무는 1차 경고 후 다시 군령을 내려도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손무는 지휘관 격인 후궁 둘을 참수하라 명령합니다. 총애하는 후궁 두명이 죽게 되자 합려는 손무에게 명령을 거둘 것을 요구합니다. 손무는 전장에 나간 장수는 왕의 명령도 거역할 수 있는 “곤외의 권한”을 거론하며 사형을 집행합니다. 그리고 ” 일벌백계(一罰百戒) “의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일벌백계”는 손무가 만든 고사성어 입니다. 손무의 예언대로 사형집행 후 궁녀들은 마치 잘 훈련된 군인 처럼 움직입니다.
총애하는 후궁 두명을 잃어 심드렁한 오왕 합려에게 오자서는 “후궁 두명과 병법의 천재를 서로 바꾸면 누가 이익입니까 ?” 라고 말 합니다.
손무는 오 나라 10만 군대를 지휘하는 대장군이 되어 재상 오자서와 함께 초 나라 정벌 준비에 몰두 합니다. 부국강병의 국가를 건설하기 바쁜 오자서에게 손님이 찾아 옵니다. 오자서와 비슷한 처지의 백비는 초 나라를 도망쳐 오자서에게 도움을 청 합니다. 당시 관상 잘 보는 피리는 백비는 “배반의 상”이니 도움을 주면 원수로 갚는다고 충고 했으나 오자서는 “동병상련”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서로 애틋한 감정을 가진다) 이라며 백비에게 많은 도움을 줍니다. 여기서 “동병상련” 고사성어가 생깁니다. 또한 훗날 백비의 배신으로 오자서는 죽고 서시를 이용한 범려의 “미인계”가 성공을 거두기도 합니다. 천하의 영웅 오자서도 작은 실수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하네요.
다시 초 나라에서 소식이 옵니다. 간신 비무기가 큰 죄를 지어 거열형을 (5필의 말에 사지와 목을 묶어 놓고 달려서 찢어 죽이는 형벌 흔히 육시처참 이라고 함) 당하고 초 평왕은 병이 들어 죽습니다. 소식을 들은 오자서는 초 평왕과 비무기를 자신이 직접 죽이지 못한 것이 애통해서 밤새 통곡을 합니다.
BC 506년 (월나라 미인 서시가 태어나던 해) 오 나라 10만 대군은 초 나라로 진격합니다. “전쟁이란 사전에 다 이겨 놓고 상대에게 승리를 확인 시키는 작업이다” 라는 손무의 이론대로 오 나라 군대는 연전 연승을 거두며 개전 3개월 후 초 나라 수도 “영”을 점령하고 오왕 합려는 초 나라 궁전에 입성합니다. 여기서 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오왕 합려는 화려한 초 나라 궁궐과 아름다운 미녀들에 취해 아무것도 하지를 않고, 오자서는 초 평왕의 무덤을 찾아 헤매고, 병사들은 약탈 강간을 합니다. 초 평왕은 오자서가 무서워 자신의 무덤을 호수 밑에 만들었는데 오자서는 기어코 초 평왕의 시체를 찾아 채찍으로 300대를 때리고 눈을 후벼 팝니다. 그리고 시체를 불에 태워서 그 가루를 들판에 뿌렸습니다. 죽은 자에게 너무 잔인 하다는 손무의 책망에 오자서는 갈길은 멀고 날은 저물어 도리에 어긋나는 줄 알면서 행한다는 ” 일모도원(日暮途遠) “, “도행역시(倒行逆施) ” 두개의 고사성어를 만듭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건만 엉망이 된 오 나라 군대에 손무는 깊은 실망을 하여 대장군 직을 내려놓고 고국 제 나라로 돌아 갑니다. 그후 손무는 역사 기록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전쟁은 결국 많은 인명을 해치는 일이라 자신의 병법서에 대한 회한이 많은 듯 합니다.
그때 오 나라에 부개의 반란과 월 나라 왕 윤상의 침략이 있어 오 나라 군대는 급히 귀국합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초 나라를 도운 월나라는 200년 후 자신들이 구해준 초 나라의 침략으로 멸망하니 역사는 참 아이러니 합니다. 망국 월족 유민들은 대 이동을 하여 일부는 현재의 베트남 영토 까지 들어 갔으며 반랑국의 멸망과 어우락 왕조의 성립에 관여가 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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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이야기 |
다음호 내용은 삼일절 100주년 특집입니다. 우리민족의 평화적 저항, 전세계의 귀감이 되어 중국의 5ㆍ4 운동과 인도의 무저항 운동의 효시가 된 삼일운동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삼일운동 특집 후에 서시 이야기와 베트남 민족 기원설로 넘어 갑니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
(주)하나로 축산 대표 /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

2 comments

  1. 여기 댓글 다는데 있네. 달아놓고 나면 보이지는 않네.
    이름과 멜주소를 넣어야 되네. 그렇게 해서 달았는데도 달린 댓글이 보이지 않네요.

  2. 잘 봤어요. 전교수님 …. 또 글 부탁드려요. 열렬 독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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