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가 방문한 다섯 번째 별은 별들 중에서도 아주 작았고 이상한 별이었다. 그곳에는 가로등불을 켜고 끄는 점등인 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고, 가로등 하나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별은 그 둘만으로도 꽉 차는 별이었다. 어린 왕자는 궁금해졌다. 이런 작은 별에 가로등과 점등인이 무슨 소용이람? 별이 작다 보니 아침이 빨리 왔고 밤도 금방 찾아왔다. 등불을 켜고 끄기를 반복하는 점등인에게도 쉴 틈이 없었다. 어린 왕자가 물었다.
” 안녕하세요, 아저씨. 그런데 어째서 방금 가로등을 끄셨나요? ”
” 안녕, 명령이란다.”
” 그게 무슨 명령인데요? ”
” 가로등을 끄라는 명령이지. 잘 자거라. ”
” 그런데 왜 바로 다시 불을 켰나요? ”
” 명령 때문이야. ”
” 이해할 수가 없어요. ”
” 이해하려고 할 것도 없어. 명령은 그냥 명령이니까. 잘 잤니? ”
한국에서 설계실에 근무할 때였다. 많은 날들을 밤낮 없이 바쁘게 일하던 시절이었다. 프로젝트는 이어졌고 마감 일정은 항상 촉박했다. 시간을 아껴야 하니 사무실에 가장 먼저 출근해 불을 켰고, 직원들이 모두 돌아간 텅 빈 사무실에서 마지막까지 도면 검토를 마치고 사무실의 불을 내리고 나와야 했다. 일을 마치고 주차장까지 걷는 그 길지 않은 걸음에는 밤공기의 약간은 느슨하고 촉촉한 기분과 더불어 하루를 잘 마쳤다 하는 일종의 안도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럴 때 차 앞에 잠시 멈춰 서서 하루의 쌓인 피로를 떨구어 내듯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때마다 아, 어둠의 베일 위로 반짝이던 별들, 등불처럼 흔들리며 흐릿한 윤곽 속에 빛을 흘리던 그 별들. 나는 밤하늘을 올려보며 저 별마다 점등인이 살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들도 나와 같이 일하면서 어느 별의 누구는 등을 켜고 다른 별의 어느 점등인은 불을 내리는 상상. 그러므로 나 또한 한 사람의 점등인이 되어 이 별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
그렇다면 저 별에 사는 이들도 나의 별을 보고 있을까. 어린 왕자가 방문했던 별보다 수백 배, 수천 배 커다란 지구라는 푸른 별에서 수없이 켜지고 꺼지는 등불의 향연을 보고 있을까. 이 별에 나와 같은 수많은 점등인들이 살고 있음을 그들도 알고 있을까.
돌아오는 밤길에 우리의 삶은 무엇으로 인해 이렇게 바쁠까 생각했다. 그것이 명령이라면 명령이겠다. 세상이 주는 명령, 삶을 지속하기위해 감당해야 하는 명령,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구조적 문제이니 운운하는 복잡한 진단을 거들어 말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삶은, 아니 점등인이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은 끝이 없이 반복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것은 우리의 생이 다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런데 더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해가 지나도 등을 켜고 끄는 삶 속에서 여유를 찾기는 커녕 점점 더 고단한 일상의 짐이 늘어만 갈 것이라는 우려가 확신처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일들은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점등인은 붉은색 바둑판 무늬가 그려진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 나는 힘든 직업을 가지고 있단다. 예전에는 할 만 했었어. 아침에는 가로등을 끄고 저녁에는 다시 켜면 되었으니까. 나도 가로등이 꺼진 낮 시간엔 쉴 수가 있었고 밤엔 잘 수 있었거든….”
” 그럼 그때 이후로 명령이 바뀐 건가요? ”
” 명령이 바뀐 적은 없었어. 그게 정말 비극인거야! 해가 갈수록 별은 더 빨리 돌고 있는데, 명령은 바뀌지 않았단다! ”
어린 왕자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점등인이 마음에 들었다.
‘ 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임금님이나 허영쟁이나 장사꾼이나 술꾼 보다는 덜 어리석다. 적어도 그가 하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니까. 가로등을 켤 때는 별 하나를, 꽃 한 송이를 더 태어나게 하는 것이나 같은 거야. 그가 가로등을 끌 때면 그 꽃들이나 별들을 잠들게 하는 거고. 이건 매우 아름다운 일이다. 아름다우니까 정말로 이로운 거야.’
점등인의 삶은 어쩌면 어린 왕자가 여행 중에 만나 본 다른 별의 사람들에게는 무시당할 정도로 의미 없어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를 어리석다 말할 수 없는 것은 그가 하는 단순하고 반복되는 일상의 행위가 그가 모르는 곳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어린 왕자를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고단함에는 의미가 있다. 가로등을 켜고 끄는 단순한 일, 반복되는 일, 끝을 모르는 그 일이 꽃을 피우고 별을 깨우는 일이었으니까.
우리의 삶도, 우리 부모들의 삶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그 전의 세대도, 또 그 앞의 세대도. 이어 달리기 하듯 세대를 이어가며 바통을 넘긴 현실에 대한 성실함이 비록 보잘 것 없고 의미 없는 삶의 방편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지난 세대를 부정하기 보다는 분별하는 지혜가 더욱 필요하다. 우리 부모도, 우리도 모두가 무엇인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점등인처럼 살아온 사람들이기에 그렇다. 이 곳 베트남에서 점등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반복된 일상이 그가 속한 기업만을 살찌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을 평안하게 하고 그들과 관계된 이 땅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윤택하게 한다. 그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며 일하는 사이에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다리를 지어가고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기업인들이 폄하 받는 분위기이지만 이 또한 우리가 건너야 할 과정이고 치뤄야 할 값이다. 대가가 없이 얻어지는 일상의 평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권리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자기 역할을 다하는 기업인들을 어찌 이 땅의 점등인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이 자기의 사업으로 일구며 살아가는 것이든, 한국의 회사의 명으로 기업을 영위하고 있든, 현지에서의 성취를 위해 벌이는 그들의 치열한 싸움과 노고의 땀방울은 헛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이 땅 한 켠의 등을 밝히고 등을 끄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 모이면 모일수록 불은 밝아지고 더 많은 꽃이 피어난다.
오래전의 그 날 돌아오는 밤길의 상념들이 만든 무거운 마음을 털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점등인의 별에 사는 그들도 이 별을 보고 있을 것이란 확신, 지구라는 별에 사는 나와 같은 수많은 점등인들이 있음을 그들도 알고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 점등인의 별에 사는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이 우주에 당신과 같은 내가, 우리가 불을 켜고 불을 끄고 있다. 우리의 일은 의미 없는 반복이 아니다. 우리는 알지 못했지만 우리의 일로 인해 그대의 별에 핀 꽃이 잠을 깨고 그대의 별이 잠이 든다. 이 곳 베트남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별을 재우고 우리의 별을 깨운다. / 夢先生
박지훈
건축가,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 정림건축 베트남 법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