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내립니다.
오늘 어땠소 하며 빗물이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며 인사를 보냅니다. 고마워.
베트남은 기본적으로 물과 상당히 가깝습니다. .
베트남에 들어 올 때 하늘에서 내려다 본 베트남의 국토는 물과 땅이 서로 몸을 숨기듯이 엮인 채 수평선과 지평선이 맞손을 잡습니다.
비를 기준으로 일년을 우기와 건기 나누고, 비가 오고 멈춰서기도 하면 그제서야 계절이 조금 움직입니다.
덕분에 그런지 베트남에 들어와서 물과 더욱 친해진듯합니다. 하긴 열대 동남아에 와서 하루에도 두어 번 씩 샤워를 하는 것으로 생활을 시작해야하니 물과 거리를 둘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익숙한 비가 거리를 채웁니다.
날이 어두워가는데 비는 안 멈춥니다.
혹시 또 누군가 집을 나설까 두려운 모양입니다.
어스름 저녁 부터 시름없이 내리는 비. 내일도 내리오소, 연일두고 오소서
퇴근후 창밖의 빗물을 구경하다 그냥 밤이 됩니다.
빗소리가 왜 이리 구슬프던지요. 하늘의 어둠이 빗물을 숨기고 그 숨은 어둠 저편에서 시(詩)가 한조각씩 영화의 나레이션처럼 풀려나옵니다.
무슨 얘기를 쓸까, 텅 비어있을 것이 분명한 안스러운 머리통을 귀에 대고 흔들어 봅니다. 꼭 빈 깡통 소리는 들어봐야 아나요? 그런 쇼를 해가면서 다시 만난 것이 이병기님의 <비> 라는 시 입니다.
회사업무를 마치고 들어왔지만 비는 여전히 내리고 특별히 나갈 곳도 없으면서 공연히 비를 핑계삼아 시간을 죽이다가 그 시의 장면과 비슷한 기시감을 느낀 듯 합니다.
예전부터 좋아해서 귀에 익히던 시입니다. 이 시를 읽으며 연상되는 장면은, 그 당시, 일본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의 모습이 비춰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21세기 동남아의 베트남 호치민에서 부족한 재주로 글을 써서 먹고 살려는 또 다른 가장의 얼굴이 연상되기도합니다. 자기연민을 담은 푸념입니다.
이번 호 칼럼 주제도 못 정하고 이런 저런 책이나 뒤적이다 우연히 손에 잡힌 시집에서 이병기님의 시를 생각했습니다. 본 것이 아니라 비슷한 분위기의 낡은 시집들 속 어딘가에 아무렇지 않게 누워있을 듯한 그 모습을 생각한 것뿐입니다.
외국에 나오면 한국에서와의 생활이 좀 달라지는 부분들이 있지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집안의 경조사 참여입니다. 집안 경조사를 절대의무에서 선택으로 바꾸어주니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그리고 또 책을 안보고 공부도 좀 덜 해도 걸리는게 없어요. 역시 자유로운 익명의 땅이 외국입니다. 외국에서의 독서? 고국에서도 원래 책 읽는 취미가 없는데 입시문제로 억지로 독서를 해왔다면 이제는 부독의 자유를 즐길만 합니다.
비가 오는 이국의 늦은 오후, 교민잡지 칼럼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비>라는 글이 등장하게 된 이유도 사실은 이국생활과 시라는 문학장르가 그런대로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런데 실재 일상에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이 시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오랜만에 외국에서 한글로 된 시를 하나 읽어보고, 한글은 비를 어떻게 그리고 한국인은 비와 어떻게 친해지는지 살펴볼까요?
시(詩)란 운문이 있는 글을 의미합니다.
노래 가사는 아니지만 운율이 있는 언어를 압축 사용하여 표현한 문학작품입니다. 그래서 시를 쓴 시인 외에는 그 시에 대하여 정확하게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많은 단어가 생략되고 의역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공부할 이병기 님의 시, 비는 좀 다릅니다. 조금만 신경써서 읽어보면 그 알싸한 배경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이병기님은 박근혜정부시절, 국정원장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정치인이자 문인입니다.
아마도 이 시에 적힌 사건도 나라 일이라고 해야 어울릴 듯합니다. 정치를 하시는 분이니 그 역시 당연합니다.
나랏 일로 기약없는 먼길을 떠나려 어젯 밤부터 말없이 짐만 챙기시던 님,
가지말라, 떠나지 말라고 울며 매달리고 싶지만 나랏 일이라는 말에 아낙은 입술이 마른다. 다행인지 그날 새벽녁부터 비가 시름없이 내리면서 님의 발 길을 잡습니다. 봉짐 하나가 전부인 내 님을 비가 붙잡습니다.
자는 동안 비가 그치면 울님도 떠날세라
늦도록 뒤척이며 빗물만 감시합니다.
어제처럼 오늘도 내리시고, 오늘처럼 내일도 내리소서
저 비가 언제가는 멈추겠죠. 그래도 내릴만큼 내리소서.
내 님 떠나지 말라고 대놓고 청하지도 못하는 아낙의 신세,
그래, 대놓고 말릴 수 있는 비, 자네가 많이 부럽소
밤새 님을 지키다가 꿈에서 님을 만난다. 사내는 아낙이 잡은 소매를 뿌리치고 떠난다.
못 가신다. 안 가신다. 눈물이 밀려나와 벙어리 된 가슴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아린 가슴, 보이지않는 아침, 그 어둠의 눈물 사이로 반가운 빗소리가 파고든다.
빗소리에 잡힌 봉짐이 방구석에 있는 것을 보고는 슬픈 눈망울을 닦으며 눈을 도로 감는다.
일본 강점기 시절에서나 나올 것같은 장면이다. 나라잃은 설음을 봉짐하나에 매 달아놓고 떠난다 떠나신다. 우리님 떠나신다. 나라를 구하는 내님에게 필요한 것이 고작 봉짐 하나뿐이니..
이 시는 참 가슴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사내로 태어나서 나라를 위해 이 한 목숨 던지겠다는 사내와 그의 아낙.
나라 잃어 서러운 사내들과 밖의 일이라며 입도 벙끗 못하는 조선의 아낙.
그런데, 요즘 이런 시구에 잡힌 장면들, 나라를 잃은 국민의 서러움, 마치 실체인양, 언젠가 본 것같은 기시감(데쟈뷰)이 자꾸 생겨납니다. 오래전 우리 조상님들이 그랜듯이 오늘날 또 그 치역의 역사가 다시 가동하려나 봅니다.
슬픈 사연으로 살아가는 한국의 사내와 그 가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