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있는 것인가요?
사람들은 모두 정해진 운명대로 사는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운명은 진짜 있는 것일까요?
운명이란 사전적 의미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 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를 이르는 말입니다. 즉 이말은 우리의 사는 삶의 형태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말이죠. 과연 그럴까요?
저는 일단 주어진 운명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정해진 운명대로 사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특정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적합하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을 인정하면 큰 틀의 운명은 있다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주물주가 모든 개인에게 각각 다른 성향과 재능을 심어주었다면 그들의 삶의 길이 다를 수밖에 없고, 각자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운명이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문제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있습니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면 운명의 줄기를 심었지만 동시에 자유로운 사고의 힘을 부여함으로 스스로 그 운명을 찾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애초 주어진 운명보다 자유로운 사고에 의한 선택을 더 우선시 한것 입니다.
자유의지와 운명은 서로 상충되는 개념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미 길을 정해놓은 운명과 그것마저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 이 요소가 서로 모습을 대놓고 드러내는 순간 인간의 삶은 해답없는 갈등에 빠집니다. 다행하게도 신은 이런 갈등을 최소화시키고자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영역에 운명을 심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통해 그 운명을 찾아가라고 프로그래밍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운명은 어떤 모습으로 심어져 있나요? 바로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무의식의 영역에 남겨두었습니다. 무의식에 영역 속에 심어진 운명은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스스로 인지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가끔씩 관심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왠지 관심이 가는 것,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꾸 관심이 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이 심어둔 운명의 흔적이 분명합니다.
자신에게 늘 붙어 다니던 관심거리를 살펴보면 자신의 운명의 줄이 조금 보입니다. 많은 관심사 중에 재미를 느끼고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운명의 줄기에 달려있는 그대의 직업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그에 따른 역할을 거부할 수 없다면 이는 하늘이 그대에게 주신 그대의 소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관심은 삶의 시작입니다. 관심 없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정, 일, 사랑, 취미, 친구 모두 관심으로 출발합니다. 관심은 모든 결과물의 시작입니다. 관심이 없는 삶은 영향분이 없는 증류수로 키운 식물과 다를바 없이 무가치합니다.
인간은 관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창조해내지 못하고 풍부해지지도 못한다. -디오도어 루빈
윗 문장은 별다른 사족이 필요없는 진리, 그 자체입니다.
이렇게 모든 세상사는 관심에서 출발합니다.
우리의 운명의 소재도 관심이 그 길을 인도합니다.
관심의 반대말은 무관심입니다. 관심이 정(바른)운명이라면, 무관심은 부정의 운명입니다. 무관심이 만드는 운명은 가혹합니다.요즘 저기 동북아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운과 같이 말입니다. 그 나라, 경제는 바닥을 헤매는데 최저임금을 일방적으로 올리는 등 기업의 기를 죽이는 정책만 만들어 갑니다. 헬기 추락으로 사망한 국군의 장례식이 열리는 동안 청와대에서는 영화 관람에 환호합니다. 이제 거의 적화통일을 이루었다고 자축하는 분위기 같습니다. 최전방의 전투사단을 철수하고 드론으로 대처하겠다는 항복 전략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니 적화통일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 시대에 가장 무능한 조정이 인조반정으로 득세한 무리였지요. 배우지 못하고 무능한 반정의 무리들이 조정을 뒤흔들다 두번의 호란을 불러 나라를 작살냅니다. 요즘 딱 그 모습입니다, 박 정권 탄핵으로 득세한 무도하고 무능한 건달들이 나라를 실험실 비이커처럼 흔들어 댑니다. 그 안에 있는 국민의 삶은 거덜이 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바로 여러분의 무관심이 만들었습니다. 정치인이 가져야 할 기본적 덕목이나 조건, 사회정의 등에 무관심하여 무도한 건달들이 득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에 대한 무관심은 악을 준동하게 만듭니다. 이런 상황을 3천 년 전 플라톤이 이미 예견했습니다.
착한 사람들이 일반 문제를 무관심하게 대한 형벌은 악한 사람들의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플라톤
무관심이 만들어 내는 부정의 예는 우리 호찌민 교민사회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베트남 교민사회는 고질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교민사회가 나뉘어 있다는 것이죠. 크게 자영업자와 기업파견자들로 나눠져 있습니다. 기업 파견자들은 한시적인 근무 기간이라 그런지 교민사회에 일체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무관심한 듯 보입니다. 관심을 가지면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된다고 기피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부 자영업자들이 중심이 되어 한인회를 만들다 보니 기업파견자는 물론이고 대다수의 교민들은 관심을 안보입니다. 자연적으로 그들 만의 자유로운 리그가 됩니다.
무관심은 부정적인 면을 드러낸다고 했죠.
이제는 전입가경, 한 자리에 두 명이 들어가 난장을 치며 완벽한 흙탕물을 만듭니다. 아무도 그 구정물에 자신의 귀한 갓끈을 씻으려 하지 않습니다, 땀내나는 발만 담그려 하죠. 일반 교민과의 사이는 더욱 멀어집니다. 얼마 전 몽골에서 열린 한상대회에서 호찌민 한인회장 두분이 참석했다가 두 분 다 대회장에서 쫓겨나는 망신을 당했다는 소식을 바람이 전해주더군요. 거참 그리 험한 꼴을 보면서 그 자리에 앉겠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젠 그 자리는 명예도 이권도 사라진지 오래된 것 같은데. 지금은 먼저 내려오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 아닌가요?
하긴 일급고수들의 속내를 글이나 쓰는 촌부가 알 리가 없지요. 아무튼, 이게 요즘 우리 동네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런 난장을 누가 만들었는가?
바로 그대의 무관심입니다. 버나드 쇼가 일갈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저지르는 가장 큰 죄는 그들에 대한 미움이 아니다. 무관심이야말로 가장 큰 죄다. 무관심은 비인간성을 대표하는 반인간적인 감정이다. -버나드 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