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異邦人)- 이 곳 이국 땅, 베트남에 넘어 와 살면서 우린 늘 스스로 이방인이란 느낌으로 살아 간다. 거주증과는 느낌이 다른 또 하나의 신분증을 마음속에 가지고 산다. 한국에서는 흘러 넘치는 정보를 차단하고 싶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피로함을 주지만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 이 곳은 어쩐지 발가벗고 사는 듯한 느낌마저 갖게 한다. 습기 없는 한낮의 뜨거운 열기, 벌떼처럼 아스팔트 위를 가볍게 날아다니는 오토바이, 귀에는 익었으나 이해 불가한 이 나라의 슬픈 언어! 하지만 이 모든 낯선 풍경들은 언제나 우리 자신을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 볼 수 있게 해 줘서 좋다. 비록 계절의 변화가 없어 시간의 정체성 속에 가끔 혼돈을 가져다 주긴 하지만 말이다.
모처럼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를 때나 인터넷 서점에서 서핑 할 때 우린 내용도 모른 채 소설 제목에 매료되어 선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내용은 막상 밋밋한 경우를 맛보는 경험을 누구나 한번 쯤은 겪었을 것이다. 카뮈의 < 이방인>-노벨문학상(1957년) 수상작가의 작품이란 선입견을 떠나서 제목이 참으로 매력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얼핏 읽어보면 다소 이해가 쉽지는 않지만 작품의 구조와 카뮈가 의도하고자 했던 바를 이해하고 보면 누구나 걸작임을 인정할 것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여느 소설 속의 주인공과 달리 사건에 깊숙이 관여하지 않고 그저 이 세상을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바라 볼 뿐이다. 어머니의 장례식 (엄마가 죽어도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자동차도 그대로 달리고 구름도 흘러가고 바람은 불고, 우리 엄마가 죽었는데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과 그 의식을 치르고 난 뒤 예전 직장동료였던 여자친구와의 동침 그리고 해변가에서 우연히 아랍인에 대한 적의를 가지고 저지른 살인, 그 후 일련의 재판 과정! 법정에서조차 그의 태도는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카뮈는 뫼르소를 통해 삶이란 현실 속에서 소외된 철저한 이방인을 제시하며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 앞에서 인간의 노력이란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일깨워 준다. 1942년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카뮈는 젊은 무명작가에 불과했으나 낯선 인물과 독창적인 형식으로 현대 프랑스 문단에 이방인처럼 나타나 20세기 지성이자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가로 추앙 받고 있다.
설 연휴를 틈 타 나는 지금 파리에서 스위스 베른으로 넘어가는 열차 안에서 차창 밖의 낯선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기대했던 눈 대신 하루 종일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지난 4일간 파리에 머무는 동안 파리지앵(Parisien)들은 하나같이 모두 이방인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오래되고 웅장한 옛 건물들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은 우울하게 길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마치 떠다니는 듯한 표류물처럼 보여졌다. 그 느낌의 원인은 분명 위압적이며 예술적인 건물로 뒤덮인 거대한 도시 속에 그들 모두는 100년 뒤에 흔적도 없이 거리에서 살아 질 먼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저 모두가 잠시 스쳐 지나 갈 뿐 지금 이 시간 어두운 파리 지하철을 바쁘게 오가는 인파들 모두가 시간의 간격을 두고 영원히 지하에 묻힐 것이다. 우린 낯선 곳에 태어나서 잠시 익숙해 질 뿐 다시 낯선 곳으로 옮겨 가고 결국엔 생각지도 못한 낯선 죽음의 자리에 영원히 정착해야 된다고 보면 이 낯선 지구 어디에서든 우리 모두는 이방인이 아니겠는가? 소설 마지막 문단을 인용하자면 “인간은 모두 사형수”이다. 삶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확신이 인간을 사형수로 만들어 놓는다. 주인공 뫼르소의 길을 따라 가보면 분명 그 길이 바로 우리 자신의 길임을 깨우칠 것이다. (참고로 카뮈는 1960년1월4일 시골에서 파리로 돌아가는 길에서 교통사고로 차 안에서 즉사했다)
작성자 : 박동중 – 영남대 영문과 졸업/조흥은행 안국동 근무, 現 창작활동 및 백산비나 근무중 (frog091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