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에서 솟아 오른 한 줄기 ‘빛’
『1988년 가을, 아름다운 사내아이를 낳았습니다.
출산의 기쁨에 젖은 채 행복한 첫째 달이 지나갑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눈을 뜨지 않는 내 아이… 어디가 아픈 걸까요? 불안한 맘 부여잡고 의사에게로 향합니다. 진단결과는 ‘소안구 장애’.안구가 성장하지 않는다고요? 평생 앞을 볼 수 없다고요?믿을 수 없습니다… 믿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 제게 이런 일이……』
몇 달 동안이나 삶을 포기한 사람처럼 절망의 수렁에 빠져있던 엄마는 아기가 생후 8개월을 맞을 무렵, 러시아 피아니스트 ‘부닌’이 연주하는 쇼팽의 ‘영웅 폴로네이즈’에 맞춰 손발을 활발히 움직이는 아기를 보게 된다. 특이한 움직임이었다. 다른 CD에는 반응하지 않고 오로지 ‘부닌’의 쇼팽 연주에만 반응했다. 예의 주시하던 엄마는 아기가 두 살이 넘어 혼자 앉을 수 있게 되자 장난감 피아노를 사 주었다. 그 후 어느 날인가 자신이 항상 흥얼거리던 멜로디를 건반에서 재현하는 아기를 목격한다. 이게 가능한 건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배운 적 없는 피아노를…!! 기적이었다. 엄마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만난 것 같았다.
스승 ‘카와카미’, 아이의 눈이 되어주다
엄마는 아이가 4살이 되자 피아노 수업을 시작했고, 6살이 되었을 때 ‘마사히로 카와카미(Masahiro Kawakami)’를 스승으로 초빙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수학한 카와카미는 당시 29세의 열정적인 신예 피아니스트로, 천재적인 ‘귀’와 ‘손’의 감각을 가진 이 아이에게 맞는 피아노 교육은 ‘듣고 따라 치기’임을 발견한다. 발전이 덜 되어있던 ‘점자 악보’ 는 레파토리에 한계가 있었고, 한번 들으면 그대로 따라 치는 이 아이에게는 그러한 점자 악보를 읽는 시간보다 듣고 따라 치는 시간이 훨씬 짧았던 것이다. 스승 카와카미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그는 레슨곡을 작은 악절 단위로 세분하여 양손을 따로 연주, 녹음했다. 템포나 악상기호 및 아티큘레이션(표현) 등을 최대한 악보에 근거했고, 모든 멜로디를 직접 노래로도 불러 녹음했다. 또한, 모든 녹음내용은 아이에게 구두로 설명해 주었고, 아이가 악곡에 대한 자신만의 느낌을 찾을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한 여름의 에어컨 소리, 한 겨울의 히터 소리도 음들의 세밀한 뉘앙스에 방해가 될세라 철저히 켜지 않았다. 심지어 아내의 발자국 소리도 방해가 될까 우려해 녹음시에는 작업실 근처에 오지 못하게 하였다. 5분길이 곡 녹음이 약 한 시간 이상 소요되는 긴 작업이었지만 스폰지처럼 쭉쭉 레슨내용을 빨아들이는 이 ‘신동’을 생각하면 그저 힘이 났다고 카와카미(현재 도쿄대 교수)는 회상한다. 아이의 눈이 되어준 스승 카와카미의 정성과 사랑에 힘입어 아이는 너무나도 다양한 피아노 레파토리를 ‘마음의 눈’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기적’을 알리다
아이의 이름은 바로 ‘노부유키 츠지이(Nobuyuki Tsujii)’. 2009년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열린 제13회 ‘반 클라이번(Van Cliburn) 국제 콩쿨’에서 20살의 일본 청년 ‘노부유키 츠지이’는 시각장애인으로서는 최초로 우승을 하게 되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기적의 순간이었다.
1962년부터 4년마다 열려온 미국 최고의 반 클라이번 콩쿨은 러시아의 ‘차이콥스키’ 콩쿨과 대등한 세계 최고 권위의 콩쿨이다. 세계 6개 도시 예선을 통과한 29명의 피아니스트들은 제 1라운드에서 ‘50분 길이의 리사이틀’을 하고 결과에 따라 12명만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한다. 이 12명 중에서 6명만이 ‘현대음악과 지정곡이 포함된 60분간의 리사이틀’과 ‘현악 4중주단과의 협연’을 통해 결승에 진출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6명의 결승 주자들은 ‘제임스 콘론(James Conlon)’이 지휘하는 ‘포트워스 교향악단’과 ‘2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고 ‘50분 길이의 리사이틀’을 하게 된다. 마라톤과 같은 어마어마한 대장정이다. 이 긴 대장정을 뚫고 노부유키가 ‘우승’을 한 것이다. 앞을 볼 수 없는 노부유키가…
경연 초기, 부축을 받으며 무대에 등장한 노부유키를 본 관중들은 그의 몸 어딘가가 불편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악곡 중간 중간에도 건반에서 손을 떼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이상히 여겼을 것이다. 그들은 배꼽 앞 ‘가온 다’음을 중심축으로 삼아 각 프레이즈의 시작 부분 위치를 끊임없이 확인하느라 건반을 더듬고 있는 노부유키의 상황을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노부유키가 대회에서 보여준 기량은 실로 ‘기적’이었다. 제 1라운드에서 그가 연주한 < 쇼팽 연습곡(Etudes)>을 보고 있노라면 경이로운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피아니스트들의 초절적인 기교를 보여줘야 하는 최고 난이도의 쇼팽 연습곡. 노부유키는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흑백의 88개 건반을 마치 앞이 훤히 보이는 사람처럼 다룬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건반에서의 양손의 위치가 근거리이거나 비교적 쉬운 프레이즈에서는 최대한의 공간감을 조절해 어찌 해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엄청난 스피드와 함께 좌우로 도약하며 팔의 무게를 떨어뜨려야 하는 프레이즈들에서도 그는 거침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건반과 씨름했을까?
우승자를 가리는 마지막 관문인 결선에서 <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연주한 노부유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협주곡 연주에서는 지휘자와 협연자의 호흡이 상당히 중요하다. 사전 리허설 때 연주에 대한 의견들을 서로 교환하지만, 실제 경연에서 협연자들은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연주를 하게 되고, 이것은 리허설에서 약속한대로만 연주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위험 요소가 된다. 따라서 지휘자와 협연자는 본 연주에서 더욱 각별히 소리에 집중, 서로의 움직임을
‘눈’으로 읽으며 난이도 높은 프레이즈의 시작과 끝을 정교하게 맞추려고 노력한다. 노부유키에겐 완벽히 불리한 상황이지 않은가? 하지만 뛰어난 청각을 지닌 그는 지휘자의 숨소리를 추적하며 교향악단과의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주었다.
‘반 클라이번’ 콩쿨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노부유키. 기적의 중심에 서 있는 노부유키. 그가 마음으로 내려다 보는 건반은 정상인의 눈에 비친 ‘그것’과 동일해 보였다. 건반 앞의 그는 전맹이 아니었다. 전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