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조국, 그리고 쇼팽의 <발라드>
일생을 오로지 피아노곡만 작곡했던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릭 쇼팽
(Frederic Chopin,1810-1849)은 폴란드 바르샤바의 젤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났다. 음악 신동이었던 쇼팽은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공부를 시작, 유럽 음악의 중심지인 베를린과 빈에서도 수학했다. 대중의 찬사와 엄청난 관심 속에서 프랑스로 연주 여행을 하던 쇼팽은 고국 폴란드에서 일어난 혁명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의 지배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폴란드 국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던 것이다. 쇼팽은 혁명이 성공해 조국 폴란드가 스스로의 주권을 다시 찾기 바랐지만, 혁명군은 러시아 군대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엄청난 수의 폴란드인들은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고, 쇼팽 역시 그대로 프랑스에 머물게 되었다.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기원하면서…갈 수 없는 고국을 항상 그리워했던 쇼팽은 폴란드의 민족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Adam Bernard Mickiewicz, 1798-1855)의 시에 매료되어 어딜 가든 그의 시집을 가지고 다녔다. 민족정신과 애국심이 끓어 넘치는 미츠키에비치의 시에 감명 받은 쇼팽은 이를 토대로 <네 개의 발라드>를 작곡하였다. 1번은 ‘콘라트 발렌로트’, 2번은 ‘윌리스의 호수’, ‘3번은 물의 요정’, 그리고 4번은 ‘버드리의 세 형제’라는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
슈필만, 그의 노트 ‘도시의 죽음’
쇼팽의 네 개의 발라드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제1번 Op. 23은 2003년에 개봉된 영화 ‘더 피아니스트’에 삽입되어 영화의 성공에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더 피아니스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대학살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폴란드인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슈필만 (Wladyslaw Szpilman, 1911-2000)’의 자서전을 영화화한 것이다. 종전 후 슈필만은 6년간의 자신의 생존기를 담은 일기로 ‘도시의 죽음(Smierc Miasta)’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판하려고 했다. 하지만 공산당의 검열에 발목이 붙들려 무산되었다가 50년이 지난 1998년에 비로소 ‘피아니스트’라는 이름으로 출판에 성공하게 되었다. 영화 ‘더 피아니스트’는 제32회 아카데미 감독상·남우 주연상· 각색상, 제55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그리고 제28회 세자르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 주연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로만 폴란스키의 선택
아우슈비츠로 가는 기차에서 어머니의 손에 의해 밖으로 던져져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유태계 폴란드인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1933- )감독. 슈필만의 자서전을 만나게 된 그에게 영화 ‘더 피아니스트’의 제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운명이었다. 그는 슈필만이었고, 슈필만은 그였다. 이에 더해 살벌한 전쟁과 죽음의 현장, 폐허, 비참함을 뚫고 영화 내내 흐르던 쇼팽의 피아노 음악은 관객의 애절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영화에 삽입되었던 쇼팽의 피아노곡들 중 관객의 가슴을 가장 뜨겁게 사로잡았던 ‘발라드 1번’. 영화 속 그 장면으로 잠시 들어가 본다.
종전을 2개월 앞둔 어느 날, 은신처에 숨어 있던 슈필만은 독일 장교 빌헬름 호젠펠트(Wilhelm Hosenfeld, 1895- 1952) 대위에게 발각되어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채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하게 되었는데……
슈필만은 오랜 굶주림으로 인한 허기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억누르며 연주를 시작한다.
차디찬 건반위에서 앙상한 손가락으로 어눌하게…
‘ 정신차려! 이 자는 살인의 갈등으로 흔들린다! 초인적 정신력으로 손끝에 영혼을 담아 몰아지경의 연주를…… 마쳤다…죽여야 하는 자와 죽어야 하는 자는 피 끓는 애국 청년 쇼팽의 예술혼과 함께 하나가 된다.갈등은 끝났고, 결심은 굳혀졌다.
아……! 살았다……!!
종전 후 슈필만은 자신을 살려 준 호젠펠트 대위를 찾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1945년 스탈린그라드의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한 호젠펠트 대위의 소식을 들은 슈필만은 평생을 두고 스스로를 자책했다고 한다.
폴란스키의 ‘촉’
감독 폴란스키는 ‘더 피아니스트’의 크랭크인 당시 슈필만의 자서전에 최대한 근거해 제작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호젠펠트 앞에서 슈필만이 실제로 연주했던 곡은 쇼팽의
‘발라드 1번’이 아닌 ‘녹턴 C# 단조’였다. 슈필만은 그러한 역사적 진실을 그의 자서전에 이렇게 서술했다.
“나는 거의 2년 반 동안이나 연주를 하지 못했다. 손가락은 뻣뻣했고, 켜켜이 때로 뒤덮여 있었으며 은신해 있는 건물에 불이 나는 바람에 손톱도 깎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유리 창도 없는 방안에 방치된 피아노는 기계 장치가 습기로 팽창되어 건반이 아주 뻑뻑했다. 나는 쇼팽의 야상곡 C#단조를 쳤다………………….(중략)…………………………… 연주를 끝내자 그 침묵은 전보다 한 층 더 음울하고 괴괴했다. 거리 어딘가에서 고양이 울 음소리가 들려왔다. 건물 밖에서 총성과 함께 사납게 짖어대는 독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폴란스키 감독은 왜 ‘녹턴’ 대신 ‘발라드’를 선택한 것일까? 오랜 분석이 필요 없을 듯해 보인다. 밤의 세레나데 성격을 지닌 쇼팽의 ‘녹턴 C# 단조’는 영화의 절정에 삽입되기엔 극적인 힘이 부족하다. 반면에 쇼팽의 ‘발라드 1번’은 초반의 호소력 짙은 주제선율이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폭발적인 남성적 에너지로 진화하는 한편의 ‘드라마’다. 아니, ‘젊은 남자의 애끓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더 나아가 곡 전체에 흐르는 애절함과 분노는 고향을 한없이 그리워하며 폴란드의 독립을 간절히 염원했던 쇼팽의 ‘조국애’를 그리는 듯하다. 그리고 스러져가는 조국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면서도 마지막까지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슈필만의 발라드’ 속에서 쇼팽의 그 ‘애국심’은 부활했다.
폴란스키의 ‘촉’은 말했던 것이다. 그의 영화적 상상력에 힘을 실어줄 드라마틱한 음악적 주인공은 ‘녹턴’이 아닌 ‘발라드 1번’이었다는 것을.
♬발라드: 12세기 프랑스 남부 음유시인들의 노래에서 시작된 것으로 당시엔 ‘춤’과 ‘이야기’ 중심의 ‘성악 발라드’였다. 이것은 중세와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며 춤이 소멸되고, ‘이야기를 담은 시’의 형태로 변형되었다. 현재의 피아노 발라드는 19세기에 이르러 악기로만 연주하게 된 ‘기악 발라드’의 형식을 계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