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레미제라블]이라는 뮤지컬 영화를 보았다.
빅토르 위고 (Victor Hugo, 1802~1885)의 불후의 대작, [레미제라블], 1862년 빅토르 위고의 60세가되는 해에 발간된 이 작품이 왜 이렇게 수백년이 지나도 아직도 회자되는가?
우리가 고작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장발장이 어린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쪽을 훔쳤다는 이유로 무려 19년간 감옥생활을 했다는 것이고 그 후에 정신차려 시장까지 올라가서 성공했다 뭐 그런 줄거리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뻔한 줄거리가 왜 수 백 년이 지나도 우리에게 아직도 깊은 감동을 선사하는 메시지가 있는가? 그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가?
빅토르 위고가 태어난 당시는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이 한창 전개 중인 시기였다. 프랑스 혁명의 구호는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였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사적 소유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고, 평등은 법 앞에서의 평등이다. 즉 사유재산의 자유는 자본주의를 의미하고 법 앞의 평등은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최상의 가치이다. 즉 그때부터 인간들의 정치 사상적 대립을 시작된 셈이다. 자유와 평등 중 어느 것에 더 무거운 가치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정치 체제가 갈라지고 서로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체재가 우월 하다고 떠들어대는 것이다. 이 구호는 단지 프랑스 혁명 당시의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중인 슬로건이지만 왜 수백 년이 지나고 나서도 아직도 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가?
빅토르 위고는 바로 이 부분을 직시하며 작품을 쓴 것으로 보인다. 즉, 세가지 구호 중 우리가 현재 구체적 이념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구호 <박애>에 대한 얘기를 쓴 것이다.
장발장이 고작 빵 한 쪽을 훔친 죄목으로 감옥에 들어간 것은 바로 자유의 욕구에 대한 절망적 체벌이자 법 앞에 평등하지 않은 시대의 침울함을 그린 것이다. 혁명은 계속되었지만 자유와 평등은 아직 낯설고 그 가치는 접점을 찾지 못하고 서로 갈등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감옥에서 나온 장발장에게는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할만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사회와 사람에 대한 분노로 얼음 장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굶주려 쓰러진 자신에게 잠자리를 제공한 미리엘 신부의 교회에서 은식기를 훔쳐 나오다 그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경찰에 의해 신부 앞에 끌려가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야 할 입장에 빠진다. 그러나 미리엘 신부는 은식기는 자신이 준 것이라며 교회에 남아있는 은촛대마저 함께 주며 그의 앞날에 축복을 빌어준다. 이것이 바로 빅토르위고가 쓰고 싶었던 박애라는 모습의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박애란 도대체 무엇인가?
스피노자는 에티카라는 저서에서 “박애 (Benevolentia)란 우리가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친절 하려고 하는 욕망이다“라고 말했다. 동양의 철학으로 따진다면 박애란 측은지심이다. 측은 지심, 불행에 빠진 사람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 연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박애는 연민과는 다르다.
연민은 자신의 처지와 다르게 불행에 빠진 사람에게 느끼는 우월적 감정이지만 박애는 스스로 동등한 자격으로 느끼는 연민이자, 자신의 살을 떼어내서 줄 수 있는, 의지가 담긴 실천적 사랑 이라고 구분할 수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박애를 의지가 있어야만 실천되는, 욕망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장발장은 미리엘 신부로부터 기대하지 않은 면죄의 박애를 받은 후 그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생을 보낸다.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가슴에 담아둔 채 이미 한 도시의 시장이라는 부유하고 높은 신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천한 신분의 여자가 남긴 그녀의 딸을 거두어주며 불행한 사람을 위한 삶, 즉 박애를 실천한다. 박애를 받는 대상에서 박애를 실천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
남루한 행색의 노숙자가 자신의 주위로 가까이 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접근을 꺼리며 피해가지만 지난 시절 자신도 굶주 리고 잠 잘 곳이 없이 길거리를 헤매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비록 차비밖에 없지만 그것을 털어 그 남루한 행색의 노숙자에게 줄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박애다.
자신과 다르게 불행에 빠진 사람을 보면 누구나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만 그 감정의 바탕에는 내가 저런 불행을 겪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저들보다 내가 처지가 좋다는 자부심이 깔려 있다. 이런 연민의 감정은 언제든지 자신의 처지가 여의치 않을 때 사라져버리고 마는 가변적 감정이라는 것이 지고한 사랑을 의미하는 박애와 다른 점이다.
타인에 대한 동등한 사랑 즉, 박애야말로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의 대결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안이라는 것을 빅토르 위고가 쓰고 싶었던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베트남은 우리보다 물질적으로 부족하고 여러 방면에서 모자란점이 많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는 그 불편에 대한 불평을 늘어 놓으며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또 한편 불우한 환경의 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펼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전에 베트남보다 훨씬 어려운 시절을 오랫동안 보냈다. 그런 우리가 이제 와서 조금 사는게 나아졌다고 베트남 생활에 대한 불평을 늘어 놓거나 우리보다 불우한 베트남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가난하던 때를 생각해서 그들과 동일한 심정으로 그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이다. 봉사활동을 하는 마음 역시 마찬가지다. 나와 다른 그들의 처지가 불쌍해서 도와주는 연민이 아니라 우리가 어렵던 시절을 상기하며 예전의 자신을 보살피듯 그들에게 친절과 사랑의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 진정한 봉사활동이 아닐까 싶다. 남아도는 옷을 건네 주는 것이 아니라 한 벌 뿐인 자신의 옷을 헐벗은 사람에게 벗어주는 것이 박애다. 우리 마음에 우월함의 시혜와 같은 연민이 아니라 동질함의 친절이라는 박애정신이 심어질 때 사유재산의 자유를 내세우는 자본주의 한국인과 법 앞에 평등을 우선의 가치로 내세우는 사회주의 베트남 사람들과의 진정한 화합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레미제라블 즉,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소설은 바로 박애라는 지고한 사랑이 주제가 되었기 때문에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작품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유,평등 그리고 박애
하노이를 다녀와서 하노이 교민사회에 대한 언급을 하며 칼럼을 써서 보냈더니 편집진에서 보기 좋게 퇴짜를 낸다. 이미 하노이 한인 회장 인터뷰가 실려있는데 거기에 또 하노이 교민사회에 대한 언급을 칼럼으로 다루는 것은 중복이고 더불어 잡지를 대표하는 메인 칼 럼인데, 설을 앞에 두고 뭔가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메시지 정도는 전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조언인지 협박인지 모를 충고를 계속하는 바람에 마감을 몇 시간 앞두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기는 했는데 한숨부터 새어 나온다. 이미 마감을 하고 있는 과정에 도깨비 방망이 두드리듯이 뚝딱 새 글을 내놓으라고? 인스턴트 라면을 끓이는 것처럼 불 위에 물만 올려 놓으 면 되듯이 글도 그렇게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거라도 안쓰면 효용도가 떨어지는 주필로 밥줄이 끊어질 줄도 모르니 뭔가 다른 내용의 글을 내 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