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베트남에 와서 만난 가장 당황스런 문화 중 하나가 바로 너무나 여유로운 시간 관념이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 특히 남부 베트남에서는 시간을 지킨다는 일이 그리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는 않는 듯합니다. 아마도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는 더운 기후 탓인 듯 싶은데 그래도 요즘이 어떤 세대입니까? 일분 일초가 다르게 달리는 인터넷 시대에 과연 이런 여유로움이 이들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 인가 하는 점에서는 의문이 따릅니다.
네덜란드의 사회심리학자 기어트 홉스테드는 불확실성 회피 문화가 강한 나라의 사람일수록 시간관념이 철저하다고 보았습니다, 즉 예측이 불가능한 일에 대해 참는 정도에 따라 시간관념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시간 관념이 다른 이유를 짚어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적은 곳일수록 시간관념이 희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보다 미래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다는 면에서 구조적으로 시간관념이 희박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의 도출이 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시간관념은 나라와 문화에 따라 다릅니다. 한국인들은 한때 시간관념이 없어 ‘코리안 타임’이라는 악명을 얻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보다 시간관념이 철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산업화가 작용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농경 사회에서는 자연재해를 제외하고는 불가측한 미래가 별로 없습니다. 계절에 따라 씨뿌리고 경작하고 추수하는 미래가 뻔히 보이는 시대에서는 시간을 칼같이 지킬 일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죠. 농사일이란게 하루 이틀 늦어 지거나 이르게 한다고 크게 달라질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확실한 미래가 없습니다. 그러니 시간에 대한 단위가 큽니다. 초단위가 아니라 날짜 단위가 일반입니다. 코리언 타임은 이때 조성된 것입니다. 이렇게 한가하던 시간의 단위가 산업 혁명을 거치며 세상이 공업화가 되자 자연스럽게 시간의 관념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는 인터넷이 등장하며 사람들이 인식하는 시간의 속도는 그야말로 초고속으로 변화합니다.
대체로 인터넷이 일반화된 원년을 윈도우 95가 출현한 1995년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후에 미국에서 인터넷 인구가 5천 만명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5년입니다. 이는 라디오의 38년, TV에 13년, 케이블 TV가 10년 걸린 것에 비해 엄청 빠른 것입니다. 이제는 인터넷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인터넷에 의존하는 인류의 삶은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요즘 일년동안 모아지는 정보의 양은 지난 시대 100년동안 모아지는 정보의 양보다 많다고 하니 그야말로 우리는 초고속 속도의 삶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세계의 증권시장을 보면 그 속도를 실감합니다. 증권거래를 위한 시간은 그야말로 초단위로 달라집니다. 일분 일초가 늦거나 빠른 이유로 엄청난 금액이 이익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손실로 증발하기도 합니다.
베트남의 시간관념이 단지 일반 국민들 뿐만 아니라 기관의 운영 관리에서도 느슨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증권 거래소입니다. 베트남의 증권 거래는 일일단위 거래가 불가 합니다, 일단 구입을 하면 3일이 지나야 다시 거래를 할 수 있다고 하니 분 단위로 사고 파는 거래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환경입니다. 물론 이런 환경이 조성된 타당한 이유가 있겠지만 21세기 시대에 이렇게 느긋한 시장환경이 마땅한가 하는 의문에는 답변이 궁색해집니다. 증권거래를 일례로 들었지만 이렇게 베트남인이 인식하는 시간은 전반적으로 한가롭기 짝이 없습니다. 너무나 한가로워 이렇게 살아도 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까 우려가 되기도 합니다.
출근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베트남 직원을 만난 적 있나요? 시간을 정한 만남에서 제시간에 맞춰 등장하는 베트남 사람이 몇이나 되던가요? 제시간에 시작하는 결혼식을 구경한 적이 있나요? 회식이 제 시간에 시작하던가요? 거의모든 면에서 이들에게 투철한 시간관념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한국인 관리자가 겪는 일상에서 이들의 시간관념을 만나 볼까요? 근무시간 전에 출근하는 베트남 직원이 얼마나 되던가요? 그나마 잘 지키는 경우라 하더라도 근무시간에 맞춰 출근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근무시간과 출근시간이 동일합니다. 이들은 근무시간에 맞쳐 출근을 한 후 그제서야 화장실도 가고 아침도 먹고, 립스틱도 바르고 합니다. 출근시간과 근무시간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하긴 이것도 양호한 경우입니다. 대부분 5분 정도 늦는 것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퇴근 시간 역시 맘대로 입니다. 업무가 종료되기 한 30 분 전부터 퇴근 준비를 마칩니다. 그리고 10여분 전에 문을 나섭니다. 시간을 전통시장에서 과일값 흥정하듯 가볍게 다룹니다. 이러면서 초과 근무 수당에 대하여는 눈에 불을 켜고 따집니다. 유일하게 투철한 시간 관념이 발휘되는 경우입니다.
시간관념이 약하다는 것은 약속에 대한 관념 역시 분명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시간은 . 약속의 기초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약속이 있던 가요?, 시간을 정하지 않은 거래가 있던가요? 하다못해 연인사이의 사랑도 영원히 사랑하겠다느니, 머리가 파 뿌리가 될 때까지 라던지, 관념적이라도 시간을 조건으로 합니다. 그러니 시간을 안 지킨다는 것은 아무런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바 없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실례를 들지않더라도 시간은 반드시 귀중하게 다루어져야 하고, 무엇보다 시간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할 자명한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갖고 있는 가장 확실한 재산은 무엇인가요?
바로 주어진 시간 아닌가요? 모든 피조물에게 있어 삶의 가치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 가로 가늠됩니다. 자유의지의 삶을 사는 인간은 더욱 그러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간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약속을 하고 늦게 나타나는 것은 잠정적 살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남의 시간을 빼앗는다는 것은 바로 타인의 생명을 짤라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 비약이 과한가요? 아닙니다. 결코 지나친 비약이 아닙니다. 그만큼 시간은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입니다. 시간관념이 약하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자연스럽게 기피인물이 됩니다. 실제로 시간을 안 지키는 사람과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은 극도의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아주 피곤한 일입니다. 이런 관계는 무엇보다 자신을 불가측의 미래에 빠트리며, 아찔한 스릴과 거북한 혼란이 뒤엉킨 카오스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그런 카오스, 즐길 만 한가요? 행운을 빕니다.
어찌보면 시간은 우리 삶의 모든 것입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전부 담고 있는 것이 시간이죠. 자신의 시간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모든 삶의 과제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평소에 인사말처럼 건내는 “요즘 어떻게 지내?” 하는 말이 실상은 엄청 무거운 질문인 셈이군요.
“자네 제대로 살고 있나?” 하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시간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시간은 묻지 않았는 데도 말을 해주는 수다쟁이다.
– 그리스의 시인 에우리피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