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가 좀 익숙해지고 싱글 오버 스코어를 기록하는데 별 어려움이 생기지 않는 수준이 되면 이말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그렇다 이 말은 사실 보기 플레이어 이상을 치는 골퍼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전 세계 골퍼 중에 보기 플레이보다 잘 치는 골퍼가 고작 10%에도 못 미친다고 하니 사실 이 말은 전체 90%의 골퍼에게는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보기 플레이를 제대로 넘지 못하는 골퍼는 퍼트는 문제가 아니다. 그들에게 문제의 대부분은 가장 긴 클럽인 드라이버에서 발생한다. 초보골퍼의 가장 큰 문제는 아무래도 긴 클럽들이다. 하지만 그들도 이 말은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왜?
왜냐하면 누구든지 고작 보기 플레이를 최종 목적으로 골프를 즐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실 골프가 좀 익숙해지면 가장 먼저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은 드라이버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충분한 거리를 만들어 내려면 아무리 멀리 쳐도 만족할 수는 없지만 일단 공을 때리는 데에는 어려움은 사라진다. 일단 티 위에 올려 놓고 치는 샷이니 가장 쉬운 스윙 중에 하나가 된다. 정확성보다는 거리에 염두는 주고 하는 샷이라 그렇다. 그러니 드라이버는 쇼고 퍼트는 돈이라는 말은 바로 그런 점을 전제로 한 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언젠가 드라이버가 쇼라는 말이 자신에게 적용될 날을 기대하며 이 말을 한 인물이 누군지 한 번 살펴보자.
이 말을 남긴 사람은 보비 로크라는 남아프리카 선수인데 이 선수는 이 말 외에도 몇 가지 기록 될 만한 흥미거리를 남겼다. 이 선수는 1917년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에 태어난 선수로 본명은 아서 달시 로크였다. 이 선수는 어려서부터 골프 천재였다. 그는 16살 이븐파를 기록했는데 당시에는 이븐파는 프로선수들도 쉽게 넘보지 못하는 스코어였는데 그는 16살의 주니어 시절에 이미 그 기록을 넘겼다. 이븐파가 당시에는 왜 그리 힘든 스코어였냐 하면, 짐작하건대 골프장의 관리가 지금 같지 않은 탓이고 공이나 클럽 역시 지금처럼 훌륭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이것을 증명하는 다른 얘기가 있다.
파보다 한타 더 치는 것을 보기하고 하는데 이말의 유래를 보면 당시 골프가 지금보다 훨신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기라는 말에 대한 유래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한가지는 당시 골프장에서는 보기 플레이를 하는 것 자체가 엄청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보기를 하면 잘 친 스토어로 인정을 받았는데 그 당시 한 군인 대령 출신의 친구가 보기 플레이를 할 만큼 잘 쳤다고 한다. 그 친구 이름이 보기 대령이라 그 후부터 파보다 한 타 더 친 스코어를 보기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있다. 또 다른 얘기는 보기맨이라는 노래, 어둠 속에서 어린아이들을 잡아간다는 보기 맨이라는 노래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보기라는 스코어는 어려운 스코어였다고 하니 보기 플레이어들 너무 기 죽을 필요가 없다. 아무튼 이 전설들은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시라. 믿고나 말거나 이다. 다시 보비 로크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 선수의 이름이 본명과 달리 왜 보비로크로 되었냐 하면 이 선수가 가장 좋아하던 선수가 보비 존스였는데 보비 존스처럼 골프를 잘 친다는 뜻에서 사람들이 보비로크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그의 이름으로 남았다고 한다.
이 선수는 당시 선수들에 비해 월등한 실력을 지녔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보비로크는 샘 스니드와 친선 경기를 하며 돈을 벌었는데 번번히 보비로크에게 패하던 샘 스니드는 그의 실력이 아까워 미국 PGA에 초대를 하고 1947년 보비로크는 미국 무대에 첫 선을 보인다.
그런데 그는 데뷔하는 해 무려 6승을 거둔다. 그가 남긴 기록 중에서 진기한 것을 몇 가지 꼽으면, 첫해 6승 중 4승은 5주 안에 거둔 것이고 그 다음해 거둔 시카고 빅토리 내셔날 대회에서는 2위와 부려 16타의 차이를 내면 우승을 하며 세계 최고를 자부하던 미국 선수들을 모두 부끄럽게 만들어 버린다. 아마 타이거가 한창 잘 나갈 때의 모습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그러나 그렇게 잘나가던 로크는 2년 후 1949년 영국의 디 오픈에서 우승을 한 후 참가를 약속한 다음 대회에 출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국 PGA에서 제적을 당한다.
젠장 그런 이유로 제적을 당하면 미쉘위 같은 애는 5번도 넘게 제적을 당했을 것이다. 물론 이건 핑계일 뿐이다. 미국의 옹졸함이 배어있는 처사였다.
미국 애들 가만히 보면 자신들이 최고가 아닌 것을 못 참아 한다. 예전에 우리 한국 여자 선수들이 미국의 LPGA를 휩쓸자 별 이상한 이유를 붙여 출전을 제한하려 했던 것 기억하시는가? 미국 아그들 자존심에 금이 가자 염치도 사라진 것이다. 여론의 따가운 눈총이 부끄러웠는지 1951년 제재를 풀기는 했지만 로크는 다시는 미국 부대에 나타나지 않고 유럽무대에서 활약을 한다.
그는 최초로 디 오픈 대회를 4번이나 우승한 선수다.
그리고 1960년 자국에서 딸의 출산 소식으로 차를 몰고 집으로 달려가던 로크는 기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한다.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그의 재능은 사고와 함께 사라지고 만 후였다.
그렇게 대중에게 잊혀져 간 비운의 골퍼는 1987년 그의 나이 70에 뇌 수막염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남긴 족적을 좀 보자.
그는 퍼터를 전 생애를 통털어 L자형 퍼터 하나만 사용하였는데 그의 퍼트 실력은 아무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탁월했다. 같은 남아프리카 골프의 전설 게리 플레이어는 “내 목숨이 달린 6피트(1.8미터) 거리의 퍼트가 남았다면 그런 나는 보비로크에게 퍼터를 건네겠다” 라는 말로 그의 퍼트 실력을 공인시켰다. 그의 퍼트 실력은 정확함을 넘어 예술의 경지에 다 달았다고 한다.
퍼트만 잘 한 것이 아니다. 모든 샷에서 따라 갈 자가 없었다고 한다. 페어웨이 외의 러프를 거의 밟지 않고 다닌 선수이고 그리고 특기할 만한 사실은 드로우 샷을 의도적으로 구사한 최초의 골퍼라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선수다. 그가 샘 스니드와 친선경기를 하며 돈을 벌었다고 했는데 당시 그들은 14번의 게임을 했는데 보비로크가 무려 12번을 승리했다고 한다.
샘 스니드가 누구인가. PGA사상 최다승인 82 회 우승으로 아직도 깨지지 않은 기록을 갖고 있는 기록의 사나이다. 그도 보비로크에게는 항복을 한 셈이다.
그는 패션에서도 남 달랐다고 한다. 빵모자에 루즈팬츠 등으로 화려한 패션 감각도 보였다고 하니 참으로 재능 넘치는 선수가 제대로 빛을 못보고 사라진 듯하여 안타깝다.
다음 호에는 샘 스니드를 좀 찾아볼까요? 별다른 이슈가 없으면 그렇게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