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부이비엔(Bùi Viện) 스트리트를 포따이(Phố Tây)라고 부른다. 포는 지역을 의미하고 따이는 서양을 의미한다. 그래서 포 따이란 서양인 거리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다른 말로 배낭족의 거리로도 불린다. 그 곳에는 외국인 지역 답게 외국 배낭 여행객를 위한 호텔, 모텔, 홈스테이, 식당, 등 여러 서비스 업체가 즐비하다. 다른 곳보다 서비스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에 돈 없는 서양의 배낭족들이 몰려 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곳이다. 거기에 전통적으로 1군의 중심이기도 하고 서구의 명절인 할로윈 데이( 10월 31일 밤) 및 년말 년시 밤에 많은 인파가 몰려들면서 서구인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도 이 거리가 외국인 거리로 형성된 이유 중에 하나다.
호치민시 정부는 워킹 스트리트의 전면 실시를 8월 19일로 정하고 7월 15일부터 시험 운영에 들어갔다. 주말마다 저녁 오후 5시부터 새벽 2시까지 차량 동행을 금지하고 대신 거리에 민속음악과 국제음악 공연을 펼치며 시민들의 반응을 조사하고 있다.
워킹스트리트 오픈
부이비엔이 호치민의 또 다른 명소로 자리를 잡자, 최근 호치민 시에서는 이 거리에 차량 동행을 제한하여 진정한 관광 거리로 만들고있다. 좀처럼 거리를 걷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호치민에서 위킹스트리트가 탄생한 것이다. 기자는 이 특별한 거리 부이비엔을 찾았다.
많은 시민들과 관광객들은 워킹 스트리트가 만들어지면 호치민 시가 더욱 매력적인 도시로 변화될 것이라며 크게 환영하는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Joseph Fisher(36살, 미국인)씨는 이번에 실시하는 워킹 스트리트 출발은 이 거리에 있는 식당 호텔 클럽 바 등 모든 서비스 영역의 발전을 가져올 것이며 이 거리의 안전한 통행은 더욱 많은 관광객들이 이 거리를 찾을 것이라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한편 인근 주변 주민들의 의견은 찬반으로 갈리고 있다.
그곳에서 작은 수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휘(Huệ)씨는 이곳 교통 상황이 너무 복잡해서 고객을 맞이하는데 여러 애로점이 많았는데 교통 통제가 이루어진 후에는 그런 불편이 사라져 너무나 좋다며 워킹 스트리트 출연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또한 부이비엔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응엔 티 킨냔(Nguyễn Thị Kim Ngân, 23살)씨는 차량 통행금지로 손님이 많이 줄었다 그러나 일단 들어온 손님들은 좋아하는 것 같다. 지금은 전체적으로 영업에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이 정책이 정착되고 시민들이 익숙해지면 괜찮아 지리라 기대를 한다며 조건부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이곳에서 거주하고 있는 주민인 밤티디엔(Phạm Thị Duyên)씨는 기본적으로 차량을 타고 움직이는 것에 지장이 많다. 이곳 주민들을 위해 주민 차량에 한하여 통행할 수 있는 스티커라도 발행하는 것을 고려해주기를 원한다고 불편을 호소했다. 과연 이번에 파격적으로 시행되는 워킹 스트리트, 과연 호치민의 또 다른 명소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주민들의 통행권을 침해하는 오류가 될지 두고 볼 일이지만 주민들의 불편을 해소는 방안을 마련한다면 모두에게 환영 받는 모범적인 정책이 될 것 같다.
그럼 이번 주말 저녁에는 한가한 차림으로 그곳으로 나가서 매연 없는 거리의 카페라도 앉아 볼까요. 유럽 어느 도시의 카페 분위기라도 생겨날까?
부이비엔(Bùi Viện)의 역사:
부이비엔(Bùi Viện, 1839 – 1878)의 별명은 Mạnh Dực(만떡)이라고 한다. 19세기 응엔(Nguyễn) 왕조 치하의 개혁가, 외교가로, 타이빈( Thái Bình)성의 엄격한 유교 집안출신이다. 뜨득(Tự Đức)황제는 일찍이 그를 ‘나랏일을 집안일 처럼 여긴 자’라고 치하 한바 있다.
1873년 경 나라의 이권을 노리는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압력이 날로 거세지는 상황이 닥치자 몇몇 대신들은 프랑스를 견제할 강력한 외국세력인 미국과의 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부이비엔을 그곳으로 보내자고 제안한다. 당시 부이비엔은 하이퐁(Hải Phòng)항구를 건설하고 각 성마다 무역상사를 세우는 등 나라의 발전을 위해 대외적으로 많은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보다 적임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왕과 조정의 부탁을 받자마자 후에 성, Thuận An 해구 (당시 이곳은 영국의 점령지로 아시아와 서구를 잇는 교량역할을 하고 있었음)에 머물며 미국영사와 사귀는 등 미국대통령을 만날 기회를 엿보았다. 이후 그는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 마침내 그란트 (Ulysses Grant) 대통령 (제위기간, 1868 – 1876)을 만나게 된다. 당시 멕시코에서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미국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타국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나라간의 협력은 간단한 듯 보였다. 하지만 국서가 없다는 이유로 양 나라간의 정식 문서 교환은 뒤로 미루어지고 만다. 1875년, 부이비엔은 뜨득황제의 전관대사로 다시 한 번 더 미국을 방문하지만 이미 프랑스와 미국은 친구가 된 상태, 프랑스를 쳐서 베트남을 돕는다는 제안은 정중히 거절당하고 만다. 그의 외교가 베트남 역사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하였어도 그는 베트남 최초의 외교가로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