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개혁파는 대비 안씨를 겁박하여 이성계를 고려 제35대 국왕으로 등극시킵니다. 등극 후 첫 어명은 국호는 고려라 하고 직제와 의례는 고려의 것을 따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성계는 대궐인 수창궁에 기거하지 않고 한 달간 사저에서 출퇴근한 유일한 국왕입니다. 그러나 한 달 후 새 왕조 창업을 본격화합니다. 우선 국호를 정하는데 명나라에 국호를 선택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조선과 화령 둘 중 선택을 요청하는데 조선은 단군조선의 후예라는 뜻이라고 밝혔고 화령은 이성계의 고향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정도전은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해놓고 명나라에 요청서를 보낸 결과 국호는 조선으로 결정 한다는 명나라의 답서가 도착하여 조선이라는 국호가 탄생합니다.
조선은 고려와 전혀 다른 문화를 만들어 갑니다. 국호 제정에서 보듯이 중국을(여기서는 한족을 뜻함) 종주국으로 받드는 사대외교를 펼치는데 이는 성리학의 중화사상의 영향 때문입니다. 과거 고구려나 고려의 자부심은 사라졌죠. 그러면 성리학이 변화시킨 우리의 문화는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봅시다. 우선 사상적으로 성리학의 중화사상을 추종하여 중국 한족은 문화민족이며 주변의 나라는 전부 오랑캐인데 우리 동이족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온 이념이 소(小) 중화 즉 작은 한족 = 동이족 입니다. 이러한 소중화 이론은 조선 초기에는 없었고 조선 중기 정몽주의 학풍을 이어받은 사림파들이 백성들에게 교육 시킨 내용입니다. 그래서 중국을 대국이라 부르고 우리는 소국이라 부르게 된 이유입니다. 물론 땅 넓이로 표현한 뜻이 아니고 국민들의 품성을 표현한 뜻이니 참 애통합니다. 여기에 일제의 식민지 교육이 더해져서 요즘도 우리 국민을 비하하고 외국인을 칭찬하는 풍조가 생긴 원인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단점을 보완하는 의미를 지닌 우리의 자성론 같으면 좋은 일이나 자기 국민을 비하하고 비난하는 국가는 우리 말고는 잘 없죠.
다음으로 신분제도와 연관된 정치를 살펴보죠. 조선 초기의 신분제도는 양천제 즉 양인과 노비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85% 양인은 조세와 국방의 의무를 지고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진출할 자격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사림파들이 신분제도를 네가지로 만들고 이는 하늘이 정한 것이라 사람이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성종 이후 대과는 5% 양반의 특권이 되고 곧이어 양반은 조세와 병역의무를 면제시켰는데 이는 법률에 규정할 수 없어서 관습으로 제도화시킵니다. 조선시대의 관습은 법보다 우선하는 경우가 많았죠. 이러한 관습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어 축첩제도의 금지, 여성의 상속권 등 최근까지 법을 무시한 관습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소수의 양반들만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게 만든 집단 이기주의나 특혜는 다른 형태로 변질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양반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반 수는 줄이고 자신들의 재산인 노비는 늘여야 하므로 유교 이념에 어긋나는 제도를 만드는데 바로 종모법입니다. 조선은 부계사회인데 신분은 모계를 따르죠. 노비들은 종모법에 따르니 숫자가 늘어가고 서얼들 역시 증가합니다. (서=어머니가 평민, 얼=어머니가 노비) 그러나 이러한 양반들의 노력에도 양반의 수는 증가합니다. 그 이유는 군역과 세금을 면제 받기 위해서입니다. 숙종 때 재정 부족을 매우기 위해 판매가 시작된 공명첩은 (보직 없는 벼슬) 양민의 감소로 재정 부족은 더욱 심해지고 군인의 감소로 국방력의 약화를 초래합니다. 그리고 양반이 되려는 욕구가 넘쳐나서 족보 판매 및 족보 위조 등으로 조선 초 5% 양반은 조선 후기 70% 1900년 초반에는 90%까지 증가합니다. 현재는 양반의 후손이 아닌 사람은 거의 없는 듯 합니다. 아직도 혈통을 따지는 성리학의 유산이 살아있는 듯하네요.
양반들은 관직 외 직업을 가질 수 없어서 관직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는데 이는 승자독식 구조의 당파싸움으로 연결됩니다. 조선 중기 선조 때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고 다시 분열되어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쪼개지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쪼개져서 이른바 4색 당파가 출현합니다. 이러한 원인은 양반 수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한 관직이 그 이유죠. 그리고 조선은 총 칼로 지배하는 독재 군주나 무사 정치가 아니라 문관 정치를 했기 때문에 언로가 발달하고 토론이 많은 것도 당파싸움의 또 다른 원인이 됩니다. 일본의 무사정치 혹은 독재정치는 무조건 복종만 가능할 뿐 토론이나 당파싸움은 없죠. 일본은 조선합병 후 4색 당파는 조선의 민족성이 열등하여 생겼고 자립할 능력이 없는 민족이므로 옛날부터 식민지배를 받아왔고 현재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민지 교육을 우리에게 주입 시켰습니다. 성리학의 단점을 잘 파고들었으나 이는 일본의 악행을 합리화시킨 궤변이며 억지 이론입니다.
성리학자들은 백성을 무지렁이로 보고 훈화의 대상으로 취급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신분은 하늘이 준것 이라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들이 누리는 특혜는 지극히 마땅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정치인들 성리학 유산을 잘 물려받아서 병역, 세금, 각종 이권 개입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합니다. 조선시대 경제는 국가의 통제를 많이 받았는데 이는 정경유착을 발전시킵니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정경유착으로 처벌받은 관료는 한 명도 없습니다. 대형 부조리가 터질 때 마다 부정에 개입된 정치가들은 “과거는 잊고 앞으로 잘하자”, “잘못된 제도를 고치겠다” 요즘도 많이 듣는 말이죠. 그러나 불법행위를 처벌하지 않으면 반드시 재발합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성리학 문화는 전부 단점입니다 이제 장점도 살펴봅시다.
성리학은 교육을 통해 인간의 품성과 능력개발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근면 절약 저축을 강조하고 가난한 이웃을 보살피는 나눔의 미덕을 가르쳤는데 이는 우리의 큰 자산이 되어 세계가 놀라는 경제 기적을 만들었죠. 우리 민족의 평가는 엇갈린 경우가 많은데 이를 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은둔의 나라 조선”에 기술된 오페르트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갑자기 손목시계가 고장 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조선의 기술자를 찾아갔는데 그는 시계를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한참 시계를 들여다보던 그는 시계를 열고 고장 난 원인을 찾고 고쳤다. 나는 조선인의 대단한 능력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조선의 관료들은 백성들을 쥐어짜는 수단으로 권력을 사용한다. 조선의 백성은 착하고 부지런하나 상류층들은 이권을 챙기고 백성을 괴롭힌다.”
세계가 보는 우리의 모습 중 하나의 사례입니다. 조선은 상위 5%가 이끌어 온 국가인데 그들은 청렴 정직하지 못했고 이중적 처신을 일삼고 있어 세계의 비난을 받았는데 이를 우리 민족 전체로 비화시킨 측면이 많습니다. 물론 개념 없는 소수의 백성도 존재했지만 조선의 백성들은 성리학의 장점을 잘 계승한 민족입니다. 성리학은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은 현실 구복의 이념을 지니고 있어 우리는 다른 민족보다 더 부지런한 측면이 있습니다. 아마도 정치 및 상류층만 각성하면 더 나은 역사를 창조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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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오페르트(1832~1903)
1866년(조선 고종 3) 2월 당시 쇄국(鎖國) 중이던 한국과의 통상의 길을 개척할 목적으로 두 차례나 입국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하고 돌아갔다.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했다고 역사교과서에 소개된 인물
「은둔의 나라 조선」
‘은둔의 나라 조선’에는 여러명의 저자가 쓴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주로 선교사들의 글이다.
내용은 공통된 것이 많은데 주로 조선 지배층의 오만과 독선, 이기심 그리고 집단 이기주의 등 지배층의 부패와 백성들은 착하고 부지런하며 두뇌가 우수한 민족으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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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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