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년 1월 고려의 부패세력 이인임 일파를 제거한 최영과 이성계는 고려의 국정을 장악합니다. 그러나 한 달 후 벌어지는 철령위 사건으로 고려는 다시 위기를 맞고 최영은 요정정벌로 응수합니다. 정도전의 계책에 따라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신흥사대부는 개혁을 추진하는데 재산권이 걸린 토지제도의 개혁에 대한 입장 차이가 너무 커서 신흥사대부는 급진개혁파와 온건 개혁파로 갈라집니다. 우리나라 정치 역사 최초의 분당사태가 발생합니다. 역성혁명을 진행하던 급진개혁파는 정몽주에 의해 마지막 반격을 받았으나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이고 1392년 조선은 건국됩니다.
이인임 일파를 제거한 최영과 이성계는 시중(총리)과 수시중 (부총리)을 맡아 고려의 국정을 장악합니다. 그리고 최영은 우왕의 장인이 됩니다. (최영의 서녀는 우왕의 후궁인 영비) 이인임이 경계한 이성계를 최영은 국정 파트너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성계는 전쟁에 나가면 항상 승리해서 국가에 공이 많았으나 권문세족들과 다르게 토지수탈 등 부패로부터 자유로운 군인이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최영은 이성계를 중용하고 같은 이유로 이인임은 이성계를 배척합니다. 즉 이인임은 자신과 출신 성분이 다르고 다른 사람처럼 적당히 부패도 저질러야 다루기 쉬운데 이성계는 큰 야망을 위해 자제하는 모습을 느낀 것 같습니다. 정사의 기록처럼 이성계의 인품이 훌륭한 것인지 야사의 기록처럼 정도전의 조언에 의한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성계를 보는 시각은 최영과 이인임 정반대였죠. 부패세력을 척결한 고려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는데 외부에서 위기가 닥칩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인데 뜬금없이 철령 이북의 땅을 반환하라는 철령위 사건을 일으킵니다. 내우외환이 끝없이 반복되는 고려말의 상황이네요.
그러면 철령위 사건을 좀 알아볼까요? 몽골이 고려를 지배하던 시절 몽골은 고려의 동북 면(지금의 함경남도와 압록강 중류지역)을 강탈하여 쌍성총관부라 칭하고 몽골의 직할지로 만들었는데 공민왕과 이자춘(이성계의 부친)의 연합작전으로 1356년 다시 고려영토로 편입됩니다. 주원장은 쌍성총관부 영토는 원나라가 통치하던 몽골의 영토이고 명나라는 원나라를 물리쳤으니 원나라의 땅은 전부 명나라의 소유라는 주장을 합니다. 이를 철령위 사건이라 칭하는 이유는 철령 이북의 땅을 반환하라는 명나라의 요구서에 근거하여 철령위 사건이라 합니다. 이에 고려조정은 전쟁과 영토양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강직한 무관 최영과 24세 젊은 우왕은 선제공격 즉 전쟁을 선택합니다.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이성계 일파는 4불가론을 주장하면서 전쟁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최영은 국정 파트너인 이성계를 설득하지 않고 요동정벌을 강행합니다. 최영의 공백을 두려워한 우왕은 최영의 출전을 만류하여 이성계를 견제할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로 임명하고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에 임명하여 고려 정예병 5만 요동으로 출진합니다.
역사적인 사건 위화도 회군은 우발적인 사건일까요? 아니면 계획된 사건일까요? 물론 조선왕조실록은 계획된 사건이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믿기 힘듭니다. 내용을 좀 봅시다. 최영의 성격을 잘 아는 정도전 일파는 거부될 줄 알면서 4불가론을 주장하여 명분을 쌓고 요동 출전 후 이성계의 가족을 고향인 화령으로 피신시킨 것, 그리고 왕의 특사를 억류시키고 3번의 회군 상소를 올린 것 관료들은 위화도 회군 후 우왕보다 이성계를 더 추종한 점 등은 반역하려는 의도가 짙은 위화도 회군입니다. 위화도 회군 후 정도전은 발 빠르게 국정을 장악합니다. 그러나 우왕은 내시를 거느리고 이성계의 집을 습격하다 실패하여 강제퇴위 당하고 9세의 어린 우왕의 아들 창왕이 등극하는데 이는 이색과 손잡은 조민수의 작품이죠. 조민수는 이인임 일파로 부패 관료였으나, 이성계 견제를 위해 요동정벌 당시 좌군 도통사로 임명된 사람인데 회군 후 정권에 대한 욕심을 부린 사건이 창왕 등극입니다.
1389년 창왕 등극 후 대제학 조준은 조민수의 부패를 조사하여 탄핵하고 귀양 보냅니다. 그리고 흥왕사에 모인 신흥사대부 대표 9명은 폐가입진을 결의하여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공손하게 양위한 왕) 고려 34대 국왕으로 옹립합니다. 폐가입진이란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뜻인데 즉 우왕과 창왕은 공민왕의 후손이 아니라 신돈의 후손이므로 폐위시킨다고 발표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신우 신창으로 기록됩니다. 위화도 회군 후 두 번이나 국왕을 폐위시킨 행위는 명백한 반역이지만 절의파라 칭하는 온건 개혁파는 급진개혁파 주장에 찬성하고 협조 잘하다가 재산권이 걸린 과전법 시행에는 목숨 걸고 투쟁합니다. 이색은 과거 토지 분쟁 때 권문세족끼리 합의한 전례가 있으니 지금도 전국의 토지 소유자를 모아서 서로 양보해서 원만한 합의를 거쳐 과전법을 시행하자고 주장합니다.
이색의 주장 “고려말 토지소유권 분쟁 때 합의한 전례”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아봅시다. 부패가 극심하던 충혜왕 시절 부패한 권력자들은 백성들의 토지를 강탈하고 농민들은 권력자의 노비로 전락하는 사건이 많이 발생했는데요. 서로 경쟁적으로 토지를 강탈한 결과 한 필지의 토지에 주인이 여러 명, 심지어 7~8명의 지주가 발생했습니다. 당연히 지주들의 소작료 징수에 문제가 발생했고 이를 해결하고자 7~8명의 지주가 모여서 합의를 하는데 합의한 내용이 가관입니다. 소작인의 몫을 25%로 하고 75%는 지주들의 권력서열에 따라 분배했는데 합의 시 토지의 원주인 농민은 참석시키지 않고 토지를 강탈한 강도끼리 합의한 사례입니다. 이러한 전례를 이색은 참고하자는 주장이며 또한 이색은 이러한 전례를 관습법으로 보고 조종의 법은 함부로 고치는 게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농민들은 생계유지가 불가능해서 자진하여 권력자의 노비로 들어갑니다. 노비의 증가는 양민의 감소를 초래하고 또한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합니다. 당시 하급관료와 군인 녹봉을 지급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이에 불만을 가진 군인들은 녹봉이 보장된 권문세족의 사병으로 들어갔다. 또한 권문세족들은 늘어난 노비로 사병을 양성하여 국가의 정식 군인보다 사병이 더 많았습니다.
위화도 회군으로 군사력을 장악한 신흥사대부는 개혁을 추진하는데 사회 전반에 걸쳐 신속하게 처리합니다. 경제 분야의 과전법, 조세제도의 개혁 정치 분야의 과거제도 개선(문음 제도의 축소)으로 관직의 상속을 막고 부패 방지법 시행 그리고 사회분야의 노비법과 불교의 폐단 정리 등 개혁이 숨 가쁘게 진행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 과정에서 서로의 입장 차이로 신흥사대부는 급진개혁파 온건개혁파로 분당사태가 발생합니다. 위화도 회군 후 일련의 개혁은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질적 양적으로 성공한 개혁으로 인정됩니다. 이색 정몽주 원천석 이숭인 길재등 이른바 고려의 절의파로 불리는 이들은 역모의 혐의가 짙은 위화도 회군 및 두 명의 군주를 폐위시키는데 협조합니다. 게다가 군주를 폐위시킨 대가로 공신 작호까지 받습니다. 그러나 재산권이 걸린 과전법 시행에는 목숨 걸고 반대하다 고려를 지키자는 슬로건을 걸고 절의파로 변하는 변화무쌍한 정치인들의 속성은 현재의 정치인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킨 과전법은 국가제정의 확보와 백성의 생존권 보장을 확보하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조선건국은 유혈사태 없는 양위형식의 역성혁명인데 이는 세계사에도 찾기 힘든 희귀한 경우입니다. 왕위 찬탈에 저항 없이 왕권을 넘겨준 공양왕도 아들과 함께 사약을 받습니다. 권력의 속성을 보여준 사건 같네요. 그러나 마지막 저항은 있었습니다. 세자를 마중 가던 이성계는 낙마하여 병석에 누워 있었고 이방원은 모친(신의왕후 한씨)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하고 있을때 정몽주는 반격을 합니다. 정도전 조준 윤소종 남은 등 급진개혁파의 핵심인물을 탄핵하여 극형에 처하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고려의 국운이 다했는지 심약한 공양왕은 결정을 유보하고 이들을 유배 조치합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강비는 시묘살이하는 이방원을 호출하고 이방원은 정몽주를 살해하여 대세를 만회합니다. 이방원의 과감한 성격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죠. 드디어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고려 제35대 국왕으로 등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