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부는 고정 관념이다. 그리고 나는 고정관념이 얼마나 깨기 어려운 것인지를 잘 안다. 되돌아 보면 나는 내가 가진 고정관념들과 평생 전쟁을 치르고 살아왔다고해도 과언이 아닌데 지금도 이겼다는 확신이 전혀 없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들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고 고개가 끄덕여지더라도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 하지만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르던 신념이라고 부르던 상관 없이 최소한 교육에 있어서는 기존의 고정 관념을 반드시 넘어서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다.
원래 고정 관념이 깨기 어려운 이유는 생물학적인 이유가 있다. 원래 환경 변화는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일어나기 때문에 생명체의 입장에서는 환경을 고정적인 것으로 보고 성장기간 중 경험을 통해 생존 원칙과 환경 대응을 배우고 이를 고정적으로 평생 적용한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의 번창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환경이 변화하기 훨씬 이전에 기존 세대들은 모두 죽어 사라지고 새로 태어난 세대가 계속 변화해 가는 환경에 새롭게 적응하기 때문이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여러 실험을 통해 입증되었듯 인간은 성장기에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살아갈 세상과 평생을 지배할 생존 원칙과 가치관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 청소년기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고정 관념은 바로 자신이 이해하는 세상과 생존 원칙의 연장 선상에 있기 때문에 깨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 스스로 생존 환경을 변화시키는 동물이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환경 변화의 속도와 정도가 급격해지고 있다. 그래서 현대의 인류는 수십억 년 생명의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기존 세대가 죽고 사라지기 전에 생존 환경이 구조적으로 변화해 가는 상황에 처해진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은 성장기의 눈에 머물러 세상을 계속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원래 이런 급격한 환경 변화 상황에서 생명의 법칙은 빠른 세대 교체를 통해 생명을 보존한다. 다시 말해 기존 세대가 배웠던 것을 다시 배우고 적응하기 보다는 빨리 죽고 사리지도록 조정해서 위기를 극복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의 수명은 줄기는 커녕 오히려 크게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세대간 갈등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서 사실상의 생존 투쟁으로 격화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향하고 있다. 만약 스스로 자각하고 변화를 꾀하지 않는다면 상황은 정말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 새로운 생존 환경에서 성공적으로 적응할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것은 생명의 법칙에 의거해서 존재의 기회를 얻은 모든 생명체에게 부여된 거의 유일한 존재 목적이자 의무인 존재의 기회를 지속하고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많은 고정관념을 재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최소한 다음 세대를 준비시키는 부분에서는 절대적으로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공부라는 고정 관념부터 버려야만 한다. 그리고 그 첫번째 단계는 공부하면 책을 읽거나 교실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생각부터 깨야 한다. 배운다는 것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이다. 얼마전 4-5살난 아이들 몇 명이 떠들며 노는 것을 우연히 목격할 기회가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그 아이들이 각기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가 뒤죽박죽 난무하지만 아이들이 노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러던 중 한국 아이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뒤를 보며 ‘이코’를 외쳤다. ‘이코’는 일본말로 ‘가자’라는 말인데 아마도 뒤에
있던 여자 아이가 일본 아이였던 모양이다. 나는 한동안 이 광경을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내 눈에 비친 아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다만 원하는 행동을 위해서 무슨 말을 던져야 하는지를 체험적으로 알 뿐이었다. 다시 말해 외국어를 한다거나 배운다는 생각없이 경험적으로 외국어를 축적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배운다는 것, 즉 공부의 본질이다.
배움은 살아 숨쉬는 모든 순간 순간에 적용되어야 하는 훈련된 습관이자 삶의 경험 방식이다. 그래서 교육은 배우는 습관을 키우는 것이 그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공부라는 것은 배우는 습관을 체계화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은 체험적으로 무엇인가를 배우고 축적하는 습관이다. 한마디로 배우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무엇에서든 배우고 어디서든 배운다. 위의 경우, 아이들이 일본어나 중국어를 유창하게 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노는데 필요한 어휘의 양이 적어서 그것이 하나의 언어적 체계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어진 환경과 상황이 언어를 제대로 습득할 수 있을 만한 정도의 경험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불행히도 인간은 평생에 걸쳐 이런 환경과 상황에서 산다. 그래서 배우는 습관이 필요한 것이다. 배우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같은 환경과 상황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축적하기 때문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차이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사실 교육이 배우는 습관을 키우고 심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 그리스인들이 이론화하고 로마인들이 실천했고 공자와 같은 위대한 성현들이 제시한 교육 철학이자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나는 공자를 좋아하고 존경한다. 특히 교육자로의 공자에게는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공자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그의 교육 철학과 방법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성장하던 시절은 유교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컸고 공자왈 맹자왈 떠드는 것이 비현실적인 탁상공론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어서 나 역시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에 공자를 재발견 하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내가 이해하게된 것은 사상가로의 공자와 교육자로의 공자를 나누어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공자의 놀라운 통찰에 경외감을 갖고 존경하지만 그의 사상에 오류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공자 이후 25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인류가 축적한 엄청난 양의 지식 덕분이다. 누군가는 평생에 걸쳐 발견해 내고 정리한 지식을 나는 책 한권 달랑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롭고 엄청난 혜택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공자와 우리가 일반적으로 유학이라고 부르는 주자학을 완전히 별개로 생각한다. 내가 배움이 많이 부족해서인지 주자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점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여 독자들 중에도 내가 가졌던 공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거나 공자는 현실적으로 별로 쓰임새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 보길 바라며 이번 글을 마무리한다. 다음번부터는 배우는 습관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한 동 준
윌리암스 대학교 경제학, 수학 전공 / 전 아메리칸 하이어 에듀코리아 대표 / 청담어학원 ‘NAVI’ 프로그램 개발
BCM k-12.com 헤드 컨설턴트/ 현 유테카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