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한 해가 시작되었다. 저문 해는 기별 없이 사라졌고 새해는 침묵 속에 성큼 다가섰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은 우리의 동의도 없이 나이란 값에 숫자를 차근차근 더해 가고 있다. 물러간 한 해를 돌이켜 볼 때 해 놓은 것 하나 없이 세월만 죽이고 있다는 푸념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새해의 새로운 결심들은 우리에게 늘 희망을 안겨 준다. 이렇듯 연말연시는 비관과 낙관적 생각이 항상 교차하곤 한다.
예전부터 삶을 긍정적으로 낙관적으로 바라보란 말을 지겹도록 들어 왔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이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 사건들로 가득 찬 불가사의한 곳이라는 비관론이 한 때 내 마음속 깊이 자리잡은 적이 있었다. 뜻대로 되는 일도 없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려 해도 부닥치는 반대가 너무도 많아 이 세상이 마치 나를 조롱하며 화를 돋우려고 만들어진 것 같이 보일 때가 있었다.
소설 속 염세주의자 마르틴의 다음 말은 내겐 마치 진리처럼 들리곤 했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걱정과 번민 속에서 허우적거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권태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생겨 먹었다고! 그러니 인간은 어디서나 불행할 수 밖에 없으니 인내심을 갖고 모든 것을 감내하는 수 밖에 없다!>라고. 이에 대해 주인공 캉디드는 <이 세상은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가장 최선의 상태이며 그런 불행들은 좋은 풍경그림에 있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반박한다.
사생아 출신인 주인공 캉디드는 한 영주의 도움으로 독일 베스트팔렌의 에덴동산 같은 성(城)에서 살게 되는데 그 영주의 귀한 딸을 흠모했다는 죄목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후 그는 우연찮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숱한 고초를 겪고 세상사 온갖 부조리를 경험하지만 그의 삶에 대한 태도는 늘 낙관론을 견지한다. 이 작품은 마치 유년시절에 읽은 <80일간의 세계일주>와 같이 쉽고 빠르고 재미있게 읽히지만 작가 볼테르의 세상 풍자와 철학적 사유가 깊이 담긴 훌륭한 고전 작품이다. 루소,몽테스키외와 더불어 프랑스 계몽주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그는 작품을 통해 대중들에게 낙관적인 인생관을 제시하고자 했다. 물론 그도 악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더욱 큰 선(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점에서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연말에 달랏으로 여행 갔을 때 일이다. 이른 아침 호숫가에서 싸늘한 가을정취를 즐기며 산책하고 있는데 맞은 편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베트남 남자가 느릿느릿 걸어 오고 있었다. 그의 겨드랑이 양쪽엔 목발이 끼여 있었으며 청바지를 입은 다리 한 쪽은 땅 위를 질질 끌며 힘겨운 걸음을 하는 소아마비 장애인이었다. 순간 나를 그 자리에서 붙들어 맨 것은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띤 그의 밝은 얼굴이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지 호수를 바라보며 목발에 의지해 시종 웃는 얼굴로 사색에 잠긴 듯 했다. 산책 후 돌아오는 길에 나는 요즘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얼굴을 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호텔 방안 큰 거울 앞에서 내 얼굴을 들여다 보니 지난 세월 동안 근심과 욕망에 시달려 주름만 깊게 패여 가고 있었다. 때론 삶을 혐오하면서도 그것에 너무 집착해 온 결과인 듯 했다. 얼마 전 이집트 피라미드 위에 눈이 내렸듯이, ‘이곳 사이공 강가에도 그런 로맨틱한 풍경이 펼쳐진다면 과연 이 세상과 화해할 수 있을까’를 상상하며 나는 거울 앞에 미소 지어 본다. <이 세상은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가장 최선의 상태>라는 캉디드 철학을 믿으며 ‘새해는 활짝 웃는 얼굴로 세상과 타인을 대면하겠다’고 사이공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다짐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