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말이다. 좀 더 가보자.
“나는 일주일에 28시간 잠을 자고 28시간 독서를 한다. 당신은 어떤 노력을 하는가?”
하루에 잠을 4시간씩 만 자며 공부하고 노력한다는 이사람, 과연 어떤 분인가?
이 말에 오버랩되는 인물에 소시어 패스처럼 혹은 광대처럼 혹은 거의 지옥 불에서 방금 빠져 나온 듯한 모습으로 괴성을 지르는 도널드 트럼프의 모습이 그려지는가? 그럴 리가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멋진 말들은 바로 이번에 45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트럼프의 발언이다. 이 멋진 말을 한 친구가 이번에는 대중을 향해 선동적인 발언을 내 놓는다.
“자 나가서 투표를 하세요, 그리고 나를 뽑아서 브랙시트의 10배 충격을 만들어봅시다” 그렇다 그의 말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세계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제는 세계는 도널드 트럼프 제 45대 미국 대통령이라는 말을 연습해야만 한다. 그 선거가 이루어지기 하루 전만 해도 전혀 어울리지 않은 이름과 직책이 조합된 새로운 단어가 탄생되었다. 절대 이런 신조어가 생겨나리라는 기대도 희망도 없었건만 미국인은 그들만의 신조어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이성적인 사고로는 절대 일어날 수 없을 것 같던 이런 신조어의 탄생이 어떻게 실현되었는가?
수 만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상세한 원인의 분석은 전문가의 몫이긴 하지만 위의 그의 어록을보면 트럼프는 그렇게 우리가 염려하듯 막돼먹은 무식쟁이는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관심이 가는 것은 모든 이의 예상, 심지어 수십 차례의 여론조사를 통해 클린턴의 승리를 장담하던 언론의 장담마저 빗나갔다는 것이다. 세계의 가장 권위있는 여론조사기관을 포함하여 미국의 대표적 매체마저 유권자의 진정한 마음을 읽어내지 못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이번 선거는 8년간에 걸친 오바마 대통령의 비교적 안정된 국정 이후의 미국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오바마의 평가는 호의적이었지만 그 이후의 미국을 어떻게 끌어갈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로 인식한 듯했다.
결과를 보고야 알았지만 미국의 이번 선거에 대한 기대는 한마디로 집약한다면 ‘변화’였다.
대 놓고 비판할 수 없는 흑인 대통령의 국정은 특별한 실수가 없는 한 호의적일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그런 과정을 또 다시 반복하겠다는 말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알고보니 남몰래 속을 끓이는 집단이 있었다. 즉 백인 노동자 집단이다. 산업화시대의 몰락으로 노동자로서의 일자리가 가뜩이나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2008년 리먼사태로 직격탄을 맞고 그나마 줄어든 일자리마저 히스패닉이나 동양인 이민자에게 밀려나는 상황이 화가 치밀었지만 엄격하게 인종차별적 행위를 금하는 사회 분위기에 눌려 벙어리 냉가슴을 앓듯 지내던 저학력 백인 노동자들은 자신을 대변하는 듯이, 마구 막말을 뱉어내는 트럼프에게 대리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누가 그를 공개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회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인종차별, 성 차별은 물론이고 미국의 기본적인 이민 정책마저 부인하는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말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의젓한 미국시민이 아니던가?
그러니 여론조사기관으로부터 누구를 지지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으면 답변을 유보하거나 자신의 의사와 다른 답변을 한 유권자들이 정작 익명성이 보장되는 투표소 안에서는 자신의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현상을 미국 언론은 샤이트럼프(Shy Trump)라고 불렀다. 그를 지지한다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웠지만 내면으로는 그의 말을 동조하고 지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미국 서민들의 이런 민낯은 사실 공감이 갈만하다.
우리들 역시 사회적 분위기에 반하는 의사를 갖고 있을 때, 누군가 자신의 의사를 물었을 때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것보다는 자신도 사회의 마땅한 일원으로 대중적 흐름에 부합하는 답변을 하는 것이 죄를 짓는 일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런 대중의 심중을 읽어내지 못한 언론이나 조사기관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동북아의 어느 나라에서 일어난 민낯 사건은 너무나 충격적이다.
이 경우는 미국의 그것과 정반대다.
미국에서는 트럼프는 처음부터 민낯으로 대중 앞에 나섰고, 오히려 대중이 민낯을 감추는 경우다.
그러나 동방 예의지국이라고 일컫는 그 동북아의 조그만 나라에서 최고 지도자로 뽑힌 미혼의 여성은 철저히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고 오랜세월 철저한 가면 속에 대중과 괴리된 은밀한 생활을 즐기다가 어느 한 순간 감춰진 민낯이 담긴 작은 물증이 언론에 입수되면서 그만 대중에게 적나라한 맨 얼굴을 드러내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러나 정작 충격은 받은 쪽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지지하고 뽑아준 대중이었다. 그녀의 드러난 민낯은 충격 그 자체다. 그녀의 민낯은 너무나 생경하여 그 충격으로 대중은 밥조차 넘기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의 실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모든 것이 달랐다. 이름도, 성도, 가족도, 성정도 달랐다. 단지 하나, 그녀가 여성이라는 것이 같았을 뿐이다.
국정을 돌보라며 이양한 권력은 그녀는 사적 가면극 놀이에 필요한 도구로 오용되었고, 국민의 세금은 가면극의 자금으로 무단히 사용(私用)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후광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국민을 선도하여 피와 땀으로 일으켜 세운 나라를 자신의 손으로 뭉개버리고, 유사이래 최악의 지도자로 스스로 역사에 기록을 남겼다.
동방예의지국의 민낯은 세계인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그러나 냉정하게 이 모든 원인의 근원을 따지자면 국가가 시스템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도자 한 사람의 인치로 다스려지도록 만든 구 시대적 제도가 문제다. 개인적 인치로 인한 과오를 이제 국민들은 대중의 힘으로, 즉 집단적 인치로 다시 세우려 거리에 나선다.
이들은 외친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어둠이 땅을 덮고, 거짓이 만민을 가리우는 이 나라를 바로 세우자.
이제 다 함께 겨례를 위한 눈물을 뿌리고, 결연한 마음을 모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궁리해보자.
모두의 지혜를 모아 결코 실족하지 않는 의인이 살아있는 자랑스런 나라를 세우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