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베트남의 한 시골 마을로 스케치 여행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막 도착했을 때, 그 마을엔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고, 그 마을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람과 오토바이를 몇 대 겨우 실을 수 있는 뗏목처럼 생긴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지만 들어갈 수 있었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저에게 한국의 시골도 낯설기만 한데, 베트남어도 잘 하지 못 해서 말도 거의 통하지 않았고, 휴대폰도 터지지 않았던 그때의 베트남 시골 마을은 더욱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고양이와 소녀 1910 Female Artist 1910
Female Artist 1910
‘다리파
(Die Bruke)’란?
독일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파. 1905년 독일에서 창립됨. 최초의 화가 공동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인 불안, 공포, 애정, 증오 등을 격렬한 색채와 왜곡된 선으로 표현함.
다리파 화가들 1925
그곳에 도착한 이틀 후에 큰 태풍이 왔습니다. 그 지역의 전봇대란 전봇대들은 모두 쓰러지고, 바나나잎으로 지어져 있던 하숙집의 부엌은 태풍과 함께 날라가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고, 그날 밤부터 전기가 다시 복구될 때까지 2주 넘게 촛불에 의지해서 지내고, 선풍기도 못 틀다 보니 더워서 잠도 푹 못 자는 날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저녁 메뉴에 ‘닭’ 요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료가 ‘닭’이 아닌 어떤 ‘새’ 였나 봅니다. 처음 맛보는 비린 맛에 깜짝 놀라서 그날은 ‘수박’ 만을 반찬으로 밥을 다 먹어야 했습니다. 작은 시냇물 위에 외나무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되는 스릴 넘치는 남부 지방의 ‘화장실’도 처음에는 저를 놀리려고 농담하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 화장실이 정말 화장실이 맞더군요.
모델이 있는 자화상 1910 군인 모습의 자화상 1915
화장실도 너무 불편하고, 빨래도 직접 다 손으로 해야 해서 힘들었지만 ‘아, 여기서 영영 살고 싶다. 돌아가기 싫다.’라는 생각이 가끔 들 정도로 그 생활이 좋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화구들과 화판을 옆구리에 끼고선 그림을 그리러 갔다가 점심 먹으러 돌아 와서는 뜨거운 햇빛을 피해서 낮잠 한숨 자고, 다시 오후에 그림 그리러 나갔다가 해가 질 때쯤 돌아와서 그날 그린 그림들을 펼쳐 놓거나 수정하다가 잠들고 다음 날 또다시 그림 그리러 가고, 또 반복되고, 반복되는 생활이 너무 좋았습니다. 아무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주위의 어떤 방해도 없이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스스로 “아, 나 고흐가 된 것 같아.” 하고 고흐가 된 것처럼 상상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드로잉을 하러 가곤 했습니다.
‘고흐’ 하니까 갑자기 생각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난주 칼럼의 주인공이었던 ‘에밀 놀데’ 기억하시나요? ‘에밀 놀데’ 소개 중에 ‘다리파(브리케파)’ 초반에 참여를 했다가 18개월 후 탈퇴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놀데가 느끼기에 ‘다리파’ 동료들이 고흐 화풍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의존적이라는 것 때문이었는데요.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그 ‘다리파’의 창시자이자 주축인 화가. 표현주의자들 중의 표현주의자로 꼽히는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입니다.
군인 모습의 자화상 1915
그럼 이제 그의 그림을 볼까요? 이 그림은 ‘모델이 있는 자화상’입니다. 자화상이니까 앞에 있는 인물이 키르히너이고, 뒤에 있는 작은 인물이 모델입니다. 당당하고 힘찬 붓놀림으로 화가인 자신을 그려놓았습니다. 대조적으로 화가가 그려야 될 대상인 모델은 나약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더욱 키르히너의 강한 힘과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이 그림과 비슷하면서도 풍기는 느낌이 전혀 다른 그림이 있습니다. 그의 유명한 자화상 중 하나인 ‘군인 모습의 자화상’입니다. 이 그림 속의 키르히너가 어때 보이세요? 시체 같은 인물의 표정과 그림을 그려야 할 잘려버린 오른팔을 보면 그의 신경쇠약과 약물중독으로 얼룩진 획일화된 군 생활이 맞지 않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게 동물처럼 가죽이 있다면 산 채로 벗김을 당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져 키르히너가 느꼈던 심적, 유체적 고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배경에 키르히너가 즐겨 그리던 주제인 ‘나체’의 여인이 불안한 모습으로나마 등장하는 것이 그가 계속 작업을 이어갈 것처럼 느껴져 조금 다행스럽게 보이긴 합니다.
그의 다른 그림들을 보면 거칠고 뾰족뾰족하게 보입니다. 실제로 그는 불안감과 의심이 많아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동료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며 지내려 했다고 합니다. 그의 그림들을 보다 보니 ‘몇몇 작품들은 뭉크의 작품이랑 비슷한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는데, 그 스스로 일기장에 이렇게 쓰기도 했습니다.
“나는 뭉크가 오랫동안 나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며 그는 나의 작품을 꽤 많이 모방하였다. 사람들은 모든 다른 방식으로 내가 그의 아이디어를 훔쳤다라고 말하는 것에 걱정스럽기조차 하다.”
키르히너와 모르는 사이인 게 참 다행입니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고, 제 지인이었다면 저를 아주 멀리했을 것 같은 상상이 떠오릅니다. 저를 거칠고 뾰족뾰족한 스타일의 화풍으로 그려놓았을 수도 있고요. 키르히너가 뭉크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연구도 있지만, 화가 스스로 받지 않았다고 일기까지 적어 놓았으니 화가의 뜻을 존중하며 그만 넘어가야 겠습니다.
‘고흐’ 이야기에서 ‘키르히너’ 이야기로 너무 많이 새어버렸네요. 그럼 다시 제 스케치 여행 이야기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너무 더워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도 일주일에 한번 아이스크림 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때만 먹을 수 있었던 꿈속 같은 마을에서 처음으로 사탕수수를 이로 우걱우걱 씹고 뱉으며 먹어 보고, 밤이 되면 가로등이 없어서 암흑이지만 올려다 보면 별이 한꺼번에 쏟아지던 곳에서 한 달 정도 지내다 보니 어느 날부터인지 이상하게 종이 위에 제 손이 그곳의 풍경이나 사람이 아닌 자꾸 자꾸 자꾸 ‘김밥’을 그리더군요. 그 길로 그동안 그렸던 드로잉들을 잔뜩 챙겨서 시커멓게 탄 얼굴로 집으로 돌아와서 그토록 그리웠던 김밥을 맛있게 먹으며 다시 작업을 했답니다. 스케치 여행 이야기 끄-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