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를 앞 둔 8월 말경 회사가 쑥대밭이 되었다.
<씬짜오 베트남>이 생긴 이래 최대의 인사 이동이 일어났다. 10 여년 동안 실질적인 회사 업무를 진두 지휘하던 이진경 총괄실장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을 하고, 그 후임으로 한국에서 유명 애널리스트로 명성을 날리다 10년 전 베트남에 진출하여 베트남 진출 한국 회사들의 컨설팅 업무를 하던 임송학씨를 사장으로 영입했다. 워낙 명성이 자자하던 양반이라 소문도 안 냈는데 사무실에 축하화환이 몰려든다.
짧게는 3년, 길게는 20여 년을 함께 일하던 직원들을 보내면서 그 무게에 맞는 충분한 설명을 할 기회를 못 가진 게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전임자들이 떠나고 후임은 아직인데, 어김없이 마감날이 닥친다. 후임이 없다고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다. 없는 대책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책임자의 역할이다. 난장 속에서 간신히 한 호를 마쳤다. 하지만 2 주면 어김없이 또 마감이 돌아온다.
추석이 마감일자와 겹친다. 예년처럼 한국가서 노모도 뵙고 성묘도 다녀와야 하는데 자리를 떠날 정도로 한가한 입장이 아니다. 한가위 연휴가 시작된 후에서야 마지 못해 4박 5일 여정을 잡았다. 짧은 여정이니 작은 기내 가방이나 하나 들고 가자 하며 옆방에 들어서니 방 한 곁을 다 차지하고 있는 가방들의 행렬이 낯설다. 지난 2-30년의 세월은 나와 같이 세상을 유람하던 가방들인데 마치 이번 인사이동으로 인해 떠나가는 장기 근속 직원들처럼 애처롭다. 그냥 가자 하고 서류 가방과 백팩만 챙겼다.
자기가 뽑히길 기다리며 빤히 바라보는 가방들의 애절함에 마음이 흔들렸는가? 눈 밑이 파르르 떨려오며 손에 경련이 인다. 힘들다, 불평하지 마라. 네 스스로 계획하고 진행한 일이 아니던가, 변화에는 반드시 기회가 있다는 빌 게이츠의 말을 믿어보자.
공항에 나가기 전, 양치질을 하러 전동 칫솔을 드는데 왼손으로 치약을 짤 수가 없다. 좀 전에 왼손이 하얀 벽과 춤을 추었던가? 손이 거덜이 났다. 그런데 그 과정이 기억되지 않는다. 상처를 씻고 붕대를 대충 감고 공항으로 향했다. 밤새 퉁퉁 부은 손을 감싸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놀라는 아내를 진정시키며 병원부터 향했다. 손은 철심을 박는 수술을 해야 하는데 붓기가 좀 가라앉도록 며칠을 기다린 후에 수술을 하겠단다. 붓기가 가시면 수술을 해서 부러진 뼈를 맞추고 철심을 박은 다음 6주 후에 깁스를 풀고 철심을 빼겠다는 의사의 설명을 한참 들으며 이게 환갑 진갑을 넘긴 노친네에게 하는 소리인지, 철없는 10대 사고뭉치를 꾸짖는 소리인지 잠시 헷갈린다.
3일 후 멀쩡하게 눈을 뜬 채로 수술을 하는데 의사는 컴퓨터 화면으로 수술 장면을 보여주며 친절한 설명을 덧붙인다. 손등에 철심이 박히고 또 그 끝이 부러져 나가는 것을 보여주며 잘 된 수술이라고 자평을 한다.
수술을 마치고 마취로 감각을 잃어버린 왼팔을 붙잡고 입원실로 들어서니 이미 2명의 선임자가 자리를 잡고 있다. 좁은 3인용 병실에 가지런히 침대가 3개 있는데 창문과 문 쪽의 침대는 선임자들이 차지하고 가운데 침대를 나를 위해 비워둔 듯하다. 일단 침대에 올라 앉아보니 고개를 어디로 돌려도 사람이 가득하다. 결국 사단은 다음날 아침 일어났다. 사단까지는 아니라도 내 코고는 소리가 아침 식탁의 반찬거리로 오른 것이다. 오늘 밤은 이어폰을 준비해야겠어요 하는 옆 침대 선임자 부인이 하는 소리에 속이 뜨끔해진 내가 집사람을 조용히 불렀다.
“여보 얼른 1인 방을 알아봐줘요.”
밤마다 단잠을 흔드는 고약한 비음이 이번에는 오히려 주인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1인실 병원은 그야말로 휴식 공간이다. 침대도 자동으로 높이가 조절되는 상급이고, 냉장고, 에어컨, 대형 TV 등 모든 것이 다 완벽하게 준비되어있다. 물론 3인실 방보다 2배는 비싸지만 어차피 보험으로 처리하니 실제로 직접 지불하는 금액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독방에 오니 병원이 고맙다. 3인방 TV보다 두 배나 큰 TV로 밤늦게 하는 골프 중계도 맘놓고 볼 수 있으니 그야말로 널브러진 팔자다.
그러고 보니 재벌총수나 정치인들이 왜 심심하면 병원에 가서 누워있는지 알만하다. 특히 1 인실에 누워있는 정형외과의 나이론 환자는 진짜 쉬러 온 것과 다를 바 없다.
특히 한가위에는 해볼 만 하다. 호텔보다 결코 비싸지 않는 금액에 모자란 것이 없는 시설의 방에서 전문 의료진이 24시간 돌봐주지, 삼시 세끼 식사도 빠짐없이 내주지, 아침마다 의사가 와서 미소 띤 얼굴로 별로 심각하지 않은 대화를 나누다 가지, 평소에는 간호사들이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확인하며 다니지, 이만하면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하며 기대하던 한가위 팔자가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덤으로 돌아오는 것이 더 있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찾아온다. 그 잘난 손을 다친 주제에 앉아서 가족과 친구를 만나고 또 아무의 방해도 없는 독방에서 대화를 나누니 이보다 더한 호강이 어디 있으랴.
과수원을 하는 여동생이 그 바쁜 과수원 일도 접어두고 오빠를 찾아왔다. 아직도 사고를 치고 다니는 철없는 오빠를 둔 탓이다. 오빠에게 좀 나이에 알맞게 조심해 살라며 잔소리를 한아름 안겨준 여동생이 주고 간 책을 펼쳤다. 애덤 그랜트라는 사상가가 쓴 오리지널스라는 책인데 마침 보고 싶은 책이었고, 필자처럼 회사를 뒤집어 놓고 그 정당성을 이론적으로 정립하지 못한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그렇구나, 역시 내 동생이야. 결코 병원에서의 시간이 헛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구나 싶다.
이 책의 첫 장의 제목이 창조적 파괴다.
임송학 신임사장과 회사의 전체 구조를 개편하고자 논의를 할 때 이렇게 평안하게 잘 굴러가는 잡지사에서 이런 무지막지한 개혁을 왜 해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찾을 때 만난 단어가 창조적 파괴였다. 그런데 아직 이론적으로 무장이 덜된 것을 아는지 이런 책이 마침 그 일을 하느라고 골이 아픈 인간 앞에, 마침 또 이 시간에 이렇게 펼쳐지는 것은 무슨 우연인가?
창조적 파괴를 앞세운 책에서 하는 소리를 잠시 보자.
이 책의 저자 애덤 그랜트는 예로부터 세상의 개혁은 기존 사회의 틀에 순응하고, 공부 잘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엄친아에 의함이 아니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존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반골정신이 있는 친구들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다고 강조한다.
한국을 예로 들자면 서울대학 나오고 사법고시 행정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은 결코 기존의 틀을 뒤집어 버리는 개혁을 하지도 않을 뿐더러, 아예 그런 생각조차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왜? 이미 그들은 기존 사회의 최상의 자리를 차지 했는데 어쩌자고 개혁을 해서 이 다진 자리를 무른 자리로 만들려 하겠는가? 그러고 보니 서울대학교를 나와서 직접 기업을 세워 일으키는 창업을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에게는 이미 가문과 사회에서 마련한 포장도로가 있느니 집안 어른 말씀이나 잘 따르면 만사형통이다. 창업과 같이 거친 일은 주류사회에 제때 합류하지 못한 잡대 출신인 우리가 맡아야 할 일이다.
기업가라는 단어는 ENTREPRENEUR 인데, 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 이라는 어원을 갖고 있다. 바로 우리같이 길도 없는 곳을 다니며 자신의 길을 만들며 살아온 인간들에게 딱 접합한 일이다. 이런 삶은 워낙 거친 여정이라 좀 고달프긴 해도 사는 맛을 찾는다면 오히려 권장할 만도 하다. 이 삶에는 포장도로에서는 결코 만나기 힘든 다양하고 흥미로운 스토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아! 애증의 서울 대학교, 거기서 공부 못했음을 반드시 서러워할 일이 아닌가 보다. 그 대가로 이렇게 한가위의 풍요를 병원에서 한가하게 즐기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