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호찌민 한인회의 탄생

野石 野談

비엣남에서의한인의 자취

두 번째 이야기

지난해 현재 코참 회장으로 있는 평산 한동희씨로 부터 호를 하나 받았다.
野石: 들에 떠도는 돌맹이처럼 정제되지 않은 성품을 표현한 듯하다. 그러나 호를 던져준 한회장의 주석은 나름 위로가 되었다. 들野는 너른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고 돌石은 강직함을 지칭한 것이니 수시로 별다른 수사도 없이 거칠고 입바른 소리를 불사하지 않는 필자의 성품에 적합한 듯하여 그렇게 지어 보낸 것이라 한다. 아무튼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들였다. 그래서 이번 호부터 비엣남에서의 한인의 자취라는 연재물에 야석 야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글_한영민 주필

지난 호에서 언급하였듯이 88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북방정책을 밀어 붙이며 그동안 우리나라와 수교하지 못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수교에 박차를 가하여 급기야 1992년 비엣남과도 수교를 한다. 당시 비엣남은 통일 후 국내 정비를 마감하고 도이머이 정책을 채택하여 세계를 향해 문호를 개방하고 그들과의 교역에 박차를 가할 때 였다. 비엣남의 개방 소식은 한국민에게 특별한 소식으로 다가왔다. 이런 저런 상황에 말려들어 어쩔수 없이 비엣남의 통일 전쟁에 참여했던 한국으로서는 만감이 교차할 수 밖에 없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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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비엣남에서의 교민들의 목숨을 책임진 교민 자취회 결성
특히 종전 후 제때 빠져나가지 못한 일부 교민들과 외교관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종전 후에도 비엣남에 남아 한인회장으로 역할을 수행하던 이순흥 옹에게는 더더욱 감회가 깊은 소식 일 수 밖에 없었다. 石川 이순흥 옹은 68년에 남비엣남에 입국하여 순흥 물산이라는 회사를 운영하던 중에 75년 종전을 맞는다. 아수라장 속에서 미군과 모든 외국인의 철수는 진행되었지만 미 대사관에서의 마지막 철수때 헬기에 탑승하지 못한 170여명의 교민들과 8명의 공관원들은 본국과의 공식적 연락이 끊긴 채 스스로 살길을 찾아 나서야 했다.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빠져 나가려던 시도가 무산되고 다시 한국의 대사관으로 돌아온 교민들은 스스로 한인자치회를 조직하고 자신들의 운명을 자치회에 맡기기로 하고 전원일치의 추대로 이 순흥 옹을 자치회장으로 옹립했다. 170여명의 교민들과 8명의 공관원의 운명을 책임지는 막중한 임무가 이 옹에게 자취회장이라는 이름으로 넘겨졌다. 통일 비엣남의 첫번째 한인회장인 셈이다. 그로부터 이 옹은 75년 4월 30일 부터 81년 5월 28일까지 만 6년이 넘도록 비엣남에 남아서 교민들의 귀국과 공관원의 뒷바라지를 위해 민간인으로서, 이미 그곳에서 사라져 버린 한국의 대사 영사 업무를 도맡아가며 여권과 비자를 발급하는 일을 담당하였고 그들을 위한 비행기 표까지 마련하며 헌신적인 봉사를 수행했다.
결국 모든 교민들과 공관원의 귀국을 확인한 후 81년 5월 28일 마지막 잔류 교민 3명과 함께 사이공을 출발하여 방콕으로 가는 에어 프랑스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원래 78년 7월 통일 비엣남 정부로부터 출국 명령을 받았지만 남아있는 교민들과 억류된 공관원의 뒷바라지를 위해 스스로 출국을 연기하고 한치 앞의 일을 알 수 없는 그곳에 남아 자신에게 주어진, 아니 자신 스스로 받아들인 조국을 위한 봉사활동에 목숨을 내 걸은 것이다.
이 순흥 옹이 이 위험천만하고 불가능하게 보였던 일들을 수행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것은 비엣남의 여인들이었다. 한국인과 이런 저런 인연으로 함께 지내던 비엣남의 여인들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연락망을 열어주었고 본국의 지원이 끊어져 먹을 것 조차 마련하기 힘든 잔류 한국인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한국명 매화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의 힘은 이 순흥 옹에게 엄청난 힘이 되었다. 이 옹이 79년 5월 미국의 CIA 첩자라는 굴레로 비엣남 공안에게 잡혔을 때 매화 여사는 각처에 구명운동을 하여 4일만에 풀려나게 만들었다. 당시 우리 교민들이 그나마 뒤늦게라도 모두 무사히 빠져 나오는데 있어서 비엣남 여인들의 국경을 초월한 인도적 지원이 그 무엇보다 큰 힘으로 작용하였다. 그 일로 매화 여사는 한국 정부로부터 나이팅게일 상을 받았다. 지금도 한국 남자들이 비엣남 여인들과 결혼을 많이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인연이 그저 단순한 호기심의 산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옹은 귀국 후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보국훈장 1급 통일장을 수여받았고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국가 유공자로 증서를 받았다. 또한 정부의 권유로 6개월 동안 전국을 다니며 귀국 보고회와 강연회를 가진바 있다.
94년 다시 비엣남에 돌아온 이 옹은 97년~98년 3월까지 제 2대, 3대 한인회장직을 역임했다.

수교 후 첫번째 한인회 결성
92년 수교후, 수출을 해야 먹고 살 수 밖에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비록 전쟁의 참화를 겪기는 했지만 9천 만이 넘는 신흥 시장 비엣남을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93년 호찌민 박람회를 계기로 한국의 상인들이 비엣남을 넘보기 시작했다. 필자도 그런 상인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아름아름 한국인의 모습이 사이공 거리에 등장을 하기 시작했고 96년에 이르러 김영삼 대통령이 비엣남을 방문한다는 일정이 발표되었다. 당시 교민의 수는 약 6천명 정도였다.
대통령이 외국을 방문할 때 빠질 수 없는 일정이 있다. 교민들과의 만남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한인회라는 조직도 없었고 외국인은 모임 자체가 허락되지 않던 시기였다. 교회도 한 군데 밖에 없었고 기본적으로 교민수가 적어서 교민회나 대표기관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할 때였다.
하긴 요즘이라고 뭐 필요가 있겠냐마는.
아무튼 대통령이 온다고 하니 공관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김 대통령은 비엣남의 수도인 하노이를 오는데 하노이에는 교민이 별로 없으니 어쩔수 없이 교민 수의 절대를 차지하는 호찌민에서 교민 대표를 뽑아서 김영삼 대통령과 악수를 하러 보내기로 하였다. 당시 호찌민 총영사관의 박창택 안기부영사는 긴급히 상사협의회와 투자협의회 등 일부 자생적 교민 단체장들을 불러 한인회 결성을 주문하였다. 시일이 촉박하니 절차를 밟아 한인회를 결성 할 여유도 없었고 당시 상사 협의회장으로 있던 서울대 법학과 출신의 박옥만 씨를 회장으로 추대하여 하노이에 보내게 되었다. 한인회 정관은 베트남 NGO 협의회장을 역임했던 오덕목사가 여러나라 정관을 참조하여 만들었다.
이로서 수교 후 처음으로 한인회가 결성된 것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한인회가 자생적으로 교민의 필요에 의해 탄생된 것이 아니라 정부의 요식 행위를 위해 공관의 주도로 결성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한인회가 자리를 못잡고 누더기 정관을 만들어가며 서로 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유도 어찌보면 교민들끼리 충분한 상의도 없이 공관의 지시로 졸석으로 결성된 원죄 탓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박옥만 초대 회장은 한인회장으로서 일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단지 그에게 주어진 임무인 대통령과의 면담을 수행하는 것으로 역할을 마감한 셈이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자 또 총영사관에서 이제는 한인회를 해산하라는 의사가 전달되었다. 당시 비엣남에서 외국인의 단체 활동을 엄하게 통제하고 있던 차라 그런 것이 영사관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래도 어떤 이유든지 어떻게 한번 결성된 한인회를 해산하라고 하느냐는 반발이 교민들 사이에서 일어나며 해산은 면했지만 단체활동이 엄하게 통제되는 상황에서 사무실도 없는 한인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일단 한인회가 결성되기는 했지만 활동은 없이 이름만 존재하는 한인회로 제 1대의 임기가 마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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