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3,Saturday

비엣남에서의 한인의 자취_ 비엣남 세상을 향해 문을 열다

첫번째 이야기- 비엣남 세상을 향해 문을 열다

올해로 비엣남과 한국이 수교한지 24주년이 되었다. 이제는 우리 베트남에서의 한인들의 자취에 대하여 기록을 남겨놓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 생각되어 집필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이 6개월 전인데 준비한 것이 부족하여 아직도 망설이다가 일단 시작이 반이라고 시작부터 하기로 했다. 첫글이니 이 연재에 대한 안내와 이 연재물의 무대인 비엣남에 대한 기본 정보와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연재는 비엣남에 20여년을 살아오신 교민 1세들의 증언과 필자의 기억 그리고 본지에 남긴 기사 등을 활용하며 사건 별로 구성하기로 했고 꼭 연대순을 따르진 않는다. 주로 호찌민을 중심으로 꾸려갈 생각인데 하노이나 타 지역 교민사회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원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적극적인 제보를 당부 드린다.  글_한영민 주필.

오늘의 비엣남을 만든 도이머이 정책
비엣남은 오랜 전쟁이 끝나고 1975년 통일을 달성했지만 악성 인플레이션과 높은 환율에 시달렸고, 1990년 경제협력공동체였던 소련과 동구권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았었다. 그런 와중에 1986년에 시작된 비엣남의 도이머이(Đổi mới,혁신)정책은 비엣남이 공업화, 현대화 국가로 들어서는 기폭제가 됐다. 그 뒤 30년 동안 이룩한 비엣남의 개혁과 경제발전은 많은 외국의 전문가, 학자, 관리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비엣남 픽토리알 인용)

그럼 오늘의 비엣남을 있게 만든 도이머이란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자.
도이 머이(Đổi mới, 刷新, 쇄신 이라는 뜻)는 1986년의 비엣남 제6차 대회에서 제기된 슬로건이며, 주로 경제(가격 안정, 국제분업형 산업구조, 생산성의 향상), 금융 면에서 새로운 방향 전환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도이 머이라는 용어는 응우옌 쑤언 오아인(Nguyen Xuan Oanh, ~2003년 8월 29일) 박사가 1982년 새로 만든 비엣남어이다. 도이머이 정책으로 문호를 연 비엣남은 시장 경제의 도입이나 대외개방정책이 도입되어 큰 경제적 성과를 거두었다. 도이 머이는 공산당 일당 지배 체제를 유지하면서, ‘공산주의 지향형 발전’의 이념을 계승하였다. 도이 머이의 사상 분야의 일부로 민부나 강국, 민주, 문명사회를 내걸어 발전한다는 이념이다. 이것은 개혁개방으로 성공을 거둔 중국이 목표로 하는 ‘2050년, 문명공산주의국가’의 계보를 잇는다는 견해도 있다.(위키 백과사전)

이렇게 비엣남은 전쟁의 상흔을 딛고 일어나 도이머이라는 신조어로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중국의 것을 참고로 하고, 거기에 과거를 문제 삼지 않고 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또한 누구라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실용주의를 국가의 기본 정책으로 삼고 새롭게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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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익에 우선이 된다면 누구와도 손을 잡는 실용주의를 채택한 비엣남
이런 비엣남인들의 사고는 지난번 비엣남을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을 맞이하는 자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미국과 치열한 전쟁을 벌인 그들이지만 미국 대통령을 맞이하는 일반 국민들의 자세는 자신들의 최대의 우방국으로 비치는 중국의 지도자를 맞이하는 것보다 훨씬 열광적이었다. 오바마가 한가한 차림으로 들려 분짜와 하노이 맥주를 마시던 분짜집은 이제 관광명소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저녁 일찍부터 분짜 재료가 동이 나는 소동이 일상화되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에 바쁜 비엣남 사람들. 그들은 미국과의 전쟁으로 미국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으리라는 일반적인 사고와는 달리 과거는 과거일뿐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향해가는 이 마당에 과거에 발목이 잡히는 일은 바람직한 사고가 아니라며, 오히려 미국의 대통령인 오바마가 이런 서민 식당에 들려 자신들의 전통음식을 소개하여 주었으니 고마운 일이라며 그의 행보에 찬사를 보내는 쿨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비엣남의 당당한 자세를 보면 아직도 주변국과의 악연에 허덕이며 국익을 위한 정책보다는 국민 감성적 대응을 고려한 감성 정치로 가장 가까운 이웃과의 관계조차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한국에게 뭔가 메시지를 던져주는 듯하다.

한베수교
동서 냉전 해소의 기운을 던져준 88년 올림픽을 치른 대한민국의 노태우 정권은 그 여세를 몰아, 국가외교 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우리와 아직 수교를 맺지못한 공산권 국가와의 새로운 수교를 맺는 북방정책을 내세웠다. 그 당시 새롭게 한국과 수교를 맺은 나라를 꼽아 보자면, 헝가리와의 수교를 시작으로 한소수교, 한중수교, 한베수교, 몽골, 체코,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몰도바,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루마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벨로루시,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알바니아, 키르기스스탄, 라오스, 세르비아 등과 수교하였다. 그러나 그만큼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한중수교 당시 타이완과 단교해야 했고 러시아의 상업차관을 주는 조건으로 러시아에서 상환조건으로 무기를 받는 형식으로 차관을 줘야 했고 발칸에서는 평화유지군을 보내야 했다. 북방정책의 성과는 외국과의 교역확대가 늘어나고 많은 물건들이 들어오고 교류가 이루어지게 만들었으나 명분에 쫓겼다는 비판도 받았다.(네이버 지식인)

어찌되었든, 덕분에 한베수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그때부터 한인들이 비엣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마도 최우선적으로 비엣남에 들어온 한국사람들의 부류는 한국 여권을 가진 분들 보다는 호주나 미국 등지에서 살던 교포들이 구경삼아, 그야말로 새롭게 오픈한 비엣남은 과연 어떻게 변해있는가 확인차 들린 것으로 추정된다. 비엣남 전에 한국군이 파견되었다는 사실에 한국인의 본격적인 유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인 아닌가? 베트남 전에 관한 막연한 두려움도 세계 어느 오지도 개의치 않고 다가서는 한국인의 개척 정신을 오래 잡아두지는 못했다. 수교 다음해 호찌민에서 열린 박람회에 많은 한국기업이 참여하며 비엣남 시장을 엿보기 시작했다. 필자도 그때 전자 자수기를 들고와 전시회에 참여하며 베트남에 첫 발을 디딘 것이다.

전략적 협력 동반자, 한국과 비엣남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 비엣남과 한국은 미래를 향해 함께 나가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로 굳게 손을 잡았다. 한국과 비엣남이 특별히 가까워진 이유는 사돈 국가라고 서로를 칭할 만큼 많은 한국인과 비엣남 인들이 (일년에 약 6천 여쌍)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이야 말로 한베관계의 각별함을 보여주는 증표로 양국의 관계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 것이다.

현재 호찌민에는 약 12만여명, 하노이에 5만여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 생활하는 비엣남인들의 숫자 역시 30만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단순히 인적 교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가장 주된 교류는 경제적 교류다. 해외진출을 원하는 한국의 기업인들에게는 비엣남은 거의 모든 것을 갖춘 최적의 생산기지이자 신흥 소비 시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인의 러쉬는 앞으로도 더욱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비엣남에 대한 한국인의 러쉬의 정점이 된 것은 삼성의 대규모 투자였다. 삼성은 핸드폰 및 백색 가전 공장 진출로 비엣남 국가 GDP의 30% 가까이를 차지하며 이나라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는 거대 기업로 자리 잡았다. 삼성의 투자에 따라 함께 들어오는 1차 2차 벤더들까지 따진다면 비엣남에서 삼성은 백만명 이상의 비엣남 가족들의 호구를 직접 해결하고 있고, 금액으로는 비엣남 경제의 30%을 책임지고 있는 셈이다. 다시 한번 한국의 번영이 베트남이라는 지역을 통해 이루어지는 듯하다.

이렇게 비엣남과 한국은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앞으로 서로에게 뭔가 남 다른 동반자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어떤 형태로든지 서로를 연결하는 운명의 끈이 존재하는 듯한 두 나라다.
그리고 이곳 비엣남에서 생활하고 계신 모든 한인들은, 이 뜨거운 여름나라에서, 또 한번 한반도의 번영을 건설하고 있는 현장에서 역사적 증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역사적 증인들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며 만들어가는 세상사를 같이 살펴보기로 하자.

*그동안 한국의 외국어 맞춤법에 따라 표현되던 베트남 이라는 이름대신 가능하면 현지 발음과 유사한 단어로 표기하자는 생각에 비엣남으로 표기했다. 이런 일이야 말로 현지에서 살아가는 언론이 결정하고 잘못된 표기를 수정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여 표기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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