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베트남의 지명(地名) 얘기. 지명에는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이를 잘 이해하면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베트남 지명은 얼핏 보면 대부분 한자같은데 사실은 판랑, 냐짱, 속짱 등에서 보듯 토착언어에서 변형된 것들도 많다. 베트남은 북부의 유교한자문화, 중부의 짬파국 힌두문화, 남부의 크메르 및 중국문화가 혼재된 퓨전국가다.
월남에서 베트남으로
먼저 베트남이라는 국호.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는 ‘월남전’,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월남의 달밤’ 등 월남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그러다 베트남통일 후 우리가 남베트남을 월남이라고 부른 것과 구분해 통일된 월남을 베트남이라고 부르게 됐다. 사실 월남(越南)은 한국식 한자 발음이고 베트남어 발음이 베트남(원음은 비엣남에 가까워 정작 베트남사람들은 베트남이라고 하면 못 알아 듣지만 국립국어원의 표기가 그러니 따라 할 수 밖에 없다)이니 서로 같은 말인데 이를 전혀 다른 말로 아는 사람도 꽤 되는 듯 하다. 하여튼 월남이 베트남이고 베트남이 월남이다.
南越이 越南으로
그럼 언제부터 베트남(Việt Nam, 越南)이라는 국호를 공식적으로 쓰게 됐을까? 응웬왕조의 자롱(Gia Long)왕은 1802년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남비엣(Nam Việt, 南越)이라는 국호를 쓰기를 청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남비엣을 국호로 인정하기 거부했는데 기원전 세를 떨쳤던 남비엣 영토범위가 광동, 광서, 운남과 북베트남에 이르고 중국에 심하게 저항했기 때문. 따라서 베트남사람의 뿌리로 일컬어지는 박비엣(Bách Việt, 百越)의 영역 남쪽이라는 의미로 당초 요청한 남비엣의 순서를 뒤바꾸어 베트남(Việt Nam, 越南)으로 국호를 정하고 1804년 자롱왕을 베트남국왕에 책봉하게 된다.
교지와 안남은 식민지 지칭
그럼 다른 말로 베트남을 일컫는 교지(交趾)와 안남(安南)의 유래는 무엇인가? 기원전 남비엣이 멸망하고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다음 중국입장에서 남쪽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의미로 중국의 지배하의 베트남을 교지 또는 교주(交州)로 종종 불렀다. 말레이시아 말로 교지를 쿠찌(Kuchi)로 불렀고 포르투갈 상인들은 코친차이나(Cochin-China)로 불렀는데 이유는 인도에 코친왕국이 있어 구분하기 위해 차이나를 붙인 것이었다. 나중에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베트남을 3등분해 남부를 코친차이나로 이름 지었다.
한편 안남(安南, An Nam)은 당나라가 독립한 베트남 초기 리(Ly)왕조를 복속한 다음에 설치한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에서 유래하는데 이후에는 교지보다 안남이란 명칭을 더 많이 쓰게 된다. 우리가 알락미라 부르는 찰기 없는 쌀은 사실은 베트남쌀이라는 의미의 안남미(安南米)의 오류다.
평화와 구복의 지명
다음으로 베트남 주요 성(省)과 시 이름의 유래를 살펴보자. 베트남의 주요 지명 특히 북부지방의 지명은 한자어에서 유래한 것이 가장 많고 빈(Bình, 平), 옌(Yên, 安) 또는 안(An, 安), 투언(Thuận, 順), 화(Hòa, 和), 닌(Ninh, 寧), 광(Quảng, 廣), 푸(Phú, 富) 흥(Hưng, 興), 푹(Phúc, 福) 등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지명이 많고 평화와 복을 기원하는 지명이 많다. 예를 들면 광닌(廣寧)성 흥옌(興安)성, 푸옌(富安)성, 화빈(和平)성, 빈투언(平順)성, 빈즈엉(平陽)성, 빈프억(平福)성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당연히 이런 명칭은 사람이름에도 많이 쓰이므로 지명의 한자를 알아두면 유용하게 쓰이는 경우가 많다.
수도인 하노이(Hà Nội , 河內)는 홍강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강 안에 있다는 의미다. 예전에는 승천하는 용이라는 의미의 탕롱(Thăng Long, 昇龍)이 많이 쓰였고 동낑(Đông Kinh, 東京)이라는 명칭도 쓰였는데 이것이 변형돼 프랑스시절 똥낑(Tonkin)이 된다.
절경인 하롱베이의 하롱(下龍)은 용이 내려왔다는 의미인데 탕롱에서 승천해 하롱베이에 내렸는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보면 북부를 중심으로 지명으로 볼 때 한자를 중심으로 한 문화권임을 알수 있다.
까마우는 까맣다
반면 사이공을 비롯한 그 아래 메콩델타지역은 당초 크메르 민족들이 살던 곳으로 지명도 크메르말을 베트남어로 변형시킨 경우가 많다. 먼저 까마우. 까마우성의 까마우(Cà Mau)는 까맣다는 의미. 당초 까마우성의 크메르식 이름은 Teuk Khmao로 검은 물이라는 의미라 한다. 실제로 까마우성을 가보면 개펄이 많아 온통 검은 색 투성이다. 또 다른 예는 역시 메콩델타의 속짱. 속짱(Sóc Trăng)의 크메르식 이름은 스록 크랭(Srok Kh’leang). 이것이 속카랑(Sốc-Kha-Lang)으로 변했고 결국 속짱(Sóc Trăng)이 됐다. 스록 크랭의 의미는 크메르 말로 왕의 은창고라는 의미라 한다. 이 두가지 예만 봐도 과거 메콩델타는 철저히 크메르 문화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판랑은 힌두신의 현신
반면 중부지방은 짬파(Champa)왕국의 본거지이기도 하고 소수민족이 많아 지명 역시 독특한 지명이 많다. 먼저 판랑(Phan Rang)은 힌두교를 신봉하는 짬파왕국의 수도였는데 판랑의 원이름인 Panduranga는 힌두신의 이름. 원래 시바신과 함께 최고의 반열에 있는 비쉬누의 현신이라고 일컬어지는 신의 이름이 도시명이 된 셈.
현재 다낭 밑의 광남성에는 과거 심하푸라(Simhapura)라는 짬파왕국의 최초수도가 있었는데 이 도시이름은 산스크리트어의 신하푸라(Sinhapura)와 같은 어원으로 전설적인 인도왕의 수도라고 한다. 뜻은 사자의 도시라는 의미로 Singhapura로도 쓰며 다소 변형된 이름이 싱가포르(Singapore)다. 싱가포르의 상징이 바다사자(Mer-lion)이고 태국 싱하(Singha)맥주의 상징이 사자인 이유가 바로 이것
냐짱은 갈대의 강
중부 냐짱(Nha Trang). 냐짱 북쪽에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강이 있는데 그 강 이름이 까이(Cai)강. 이 강의 원래 이름이 야짱(Yja Tran 또는 Ea Trang)인데 여기서 소수민족 말로 ‘야’는 강, ‘짱’은 갈대를 의미. 결국 야짱은 갈대의 강을 의미하고 이것이 냐짱으로 변화된 것. 강 이름이 지명으로 변한 것이고 냐짱은 갈대의 강이다.
언어가 문화의 바탕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지명을 통해 살펴본 베트남은 한자문화가 중심이면서도 크메르문화와 힌두문화가 스며들어 있으며 여기에 소수민족의 문화가 섞여 있음을 알수 있다. 바로 이것이 베트남의 퓨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