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등장에 혼비백산…이기심의 민낯
재앙에 대한 상상력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특히 영화에 있어서는 만일 재앙이 실제 우리 삶 안에 발생한다면 그건 말 그대로 끔찍한 형벌이겠지만 스크린 위에서 발생하는 재앙이란 짜릿한 간접 체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상의 재앙이라면 더욱 흥미롭다. 좀비 영화는 그런 점에서 가상의 재앙이 오락화된 장르다. SF적 재앙, 지구와 혜성의 충돌이라거나 쓰나미, 지진과 같은 재앙이야 개연성 위에서 가능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죽은 시체가 벌떡 일어나 걸어 다니거나 뛰어다니는 상상은 판타지라고 부르는 게 더 맞다. 말 그대로 허구의 재앙인 셈이다. ‘부산행’은 한국 영화 최초의 본격 좀비물이라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지금껏 한국 영화 가운데서 재난이나 재앙에 대한 상상력은 ‘괴물’ ‘연가시’ ‘감기’처럼 꽤나 현실성 높은 재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메르스나 플루와 같은 경험은 재난에 대한 상상력을 더욱 높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비다. 좀비는 말 그대로 영화적인 상상이며 영화적인 재앙이다.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돼 생각도, 기억도, 판단도 모두 잃고 일방향적 충동의 괴물이 되는 것, 좀비에는 바로 이런 영화 공식만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은 ‘사이비’ ‘돼지의 왕’ 같은 애니메이션으로 이미 동시대적 호응을 얻는 데 성공한 감독이다. 무엇보다 연 감독은 이런 이야기들을 사회적 맥락 안에서 상대적으로 비춰볼 줄 아는 시각을 가졌다. 이 솜씨는 그의 이전 애니메이션 ‘서울역’을 모태로 한 실사 영화 ‘부산행’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부산행’의 모든 재앙은 서울역에서 출발해 부산역 도착을 목적으로 하는 부산행 KTX 열차 안에서 발생한다. 달리기 시작한 이상 입구도 출구도 없는 열차는 좀비 발생의 공포를 최대화할 수 있는 밀폐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현재를 압축해놓은 표본이다. 펀드매니저, 대기업 임원, 임산부, 고교 야구단 등 어떤 무리들이 탑승해도 그럴듯하고 또 한편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개성과 다양성이 보장된 공간인 셈이다. 연 감독은 좀비 바이러스라는 가상의 재앙과 이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개연성 있는 재앙을 대조하고 참조한다. 겉으로 보기엔 갑자기 돌변해서 뛰어드는 식인 좀비가 가장 무섭지만 점차 멀쩡한 사람들의 이기심과 집단 내부의 배타적 결속이 더 무서운 것이 되고 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층이 생기고 지금껏 부와 권력으로 나뉘었던 계층이 이번엔 감염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뉜다. 이 아비규환 가운데서 결국 재앙을 이겨낼 수 있는 해답은 가족이다. 대개 재앙이나 재난을 다루는 영화들은 가족이 구원의 핵심임을 설파하는데 이는 연 감독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 점이 대중영화로서의 한계기도 하다. 거의 붕괴 직전에 도달했던 가족이 재앙을 맞아 봉합되고 재결합된다는 것이나 부모의 숭고한 희생을 통해 다음 세대의 삶이 지속된다는 설정 자체가 무척 기시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행’은 머리보다는 눈으로 즐기고 판단하기보다 가슴으로 격동하는 여름 블록버스터의 요건에 부합하는 성공적인 대중영화임을 부인할 수 없다. 아크로바틱한 댄스를 연상케 하는 좀비들의 움직임이나 그에 대응하는 주조연들의 호연도 영화에 박진감을 높인다. 무더운 날 볼만한 영화로 손색없다.
강유정 영화평론가 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