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델스존의 이름인 펠릭스는 행운아를 의미합니다.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자 철학자인 할아버지의 지적 재능과 금융재벌인 아버지의 부,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음악적 소양을 모두 물려받은 것처럼 보이는 펠릭스멘델스존은 당대 최고 수준의 지적 교육을 받았고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두각을 드러낸 그야말로 ‘엄친아’였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그의 부모들이 즐거움 속에 학습하도록 그를 도왔죠.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다양한 재능의 인사들과 교류하고, 스코틀랜드의 ‘핑갈의 동굴’과 같은 멋진 곳에서는 그림도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고전 등을 읽게 했으며, 음악도 즐기도록 했습니다. 음악을 진정으로 즐겼던 음악가로 평가받는 멘델스존은 이제껏 소개된 많은 음악가들의 고달팠던 인생 역정과는 여러모로 비교되는 인물입니다.
바흐가 활동했던 라이프치히에서 세계 최고의 교향악단으로 평가받는 게반트하우스(Gewandhausorchester Leipzig)의 지휘자를 지냈던 그는 근대 오케스트라의 기초를 확립하고 현재 지휘자의 기능과 직책을 확립한 인물로 평가되죠. 바흐의 마태수난곡이나 슈베르트의 잊혀진 교향곡들을 발굴해 초연한 공로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라이프치히에 음악원을 설립하고 슈만과 같은 우수한 교수진을 유치한 공로도 있죠. 오늘날까지 라이프치히가 유럽 음악의 중심지가 되는데 멘델스존에게 진 신세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유태인이라는 굴레죠. 아버지가 차별을 받지 않도록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고 멘델스존 자신도 유태인이라기보다 자랑스런 독일인이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그의 사후에는 그는 무엇보다 먼저 유태인으로 규정되었으며,특히 나치의 멘델스존 흔적 지우기는 도가 지나칠 정도였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1729년에 초연되었다가 바흐 사후 잊혀졌던 <마태 수난곡>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1829년 멘델스존이 재발굴하여 세상에 알려진 바흐의 이 작품은 멘델스존 뿐만 아니라 괴테와 헤겔, 그리고 히틀러와 바그너에 이르기까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사와 사상, 음악의 굵직한 인물들과 인연이 깊기 때문입니다.
멘델스존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100년 만에 ‘다시 연주하겠다’고 도전합니다. 하지만 바흐 신봉자이자 멘델스존에게 바흐를 가르쳤던 스승 첼터 마저도 이 곡의 연주에 반대했습니다. 100년 동안이나 잊혀진 옛날 풍의 음악을, 그것도 3시간에 달하는 길고 지루한 음악을, 누가 들으러 오겠냐며 걱정했던 겁니다. 하지만 멘델스존은 어렵사리 첼터를 설득해, 원곡 악보에 자신의 첨삭을 가미해 1829년 3월 마침내 공연에 나서 대성공을 거둡니다. 연주를 반대했던 스승 첼터마저도 괴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날의 연주를 자랑했습니다. 열흘 뒤에 열린 재공연 때는 베를린의 엘리트들이 거의 다 참석했는데, 이때 철학자이자 베를린대학 총장으로 부임한 헤겔도 참석했다고 합니다. 헤겔은 연주를 칭찬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첼터가 괴테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 속에는 헤겔이 바흐의 음악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불평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로부터 100년 후 나치 치하로 세상이 바뀌면서 바흐 복원자인 멘델스존의 공로는 순수 독일인인 스승 첼터의 기여로, 그리고 바그너의 위대함으로 그 빛이 바랬습니다. 유태인을 증오하고 혐오했던 히틀러는 순수 독일인인 바흐와 그의 음악이 유태인인 멘델스존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는 사실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 치하에서는 1829년의 <마태수난곡>등장에 대해 멘델스존보다는 그의 스승이자 순수 독일인이었던 첼터가 멘델스존에게<마태수난곡>을 연주하라고 적극 권했다는 식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예 음악사에서 멘델스존의 기억을 지우려고까지 했답니다. 나치는 박물관에 있던 멘델스존의 모든 유품과 악보를 불태웠으며 라이프치히 시민들이 그를 기념해 게반트하우스 근처에 세운 동상도 부셔버렸습니다. 심지어 한때 학교 음악시간에 배웠던 ‘노래의 날개 위에’라는 유명한 가곡도 금지곡으로 지정될 정도였죠. 이유는 유대인 출신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의 시에 멘델스존이 곡을 붙였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히틀러는 바그너를 위대한 작곡가로 치켜세웠습니다. 독일적인 게르만 신화를 이상으로 삼아 게르만 민족에게 긍지를 심어주는 오페라의 작곡 및 이론 정립에 노력했다는 이유 때문이죠. 히틀러에게 바그너는 독일인의 이상적 모습이 투영된 완벽한 인물이었고 그의 음악은 독일 음악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비롯한 수많은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있는 유대인들은 가스실로 끌려가는 공포에 떨면서도 밤낮으로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바그너의 음악을 들어야 했고, 독일이 점령한 지역의 극장에서는 매번 바그너의 작품을 공연하며 히틀러를 찬양했습니다. 침략당한 나라와 민족은 물론, 유대인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에게 바그너 음악은 끔찍한 기억이 아닐 수 없었겠죠. 최근까지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의 음악 연주가 금지되어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만 합니다.
바그너는 라이프치히 태생입니다.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에 와서 죽는 날까지 12년 동안 이 도시를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을 때, 바그너는 빚쟁이들에 쫓겨 야반도주하여 전 유럽을 방황하며 잡초 같은 인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바그너는 작품에 깊은 철학적 요소를 반영하고 일반 오페라에 연극적 요소를 강화하여 ‘악극’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장르를 창시한 재능있는 인물로 현대 음악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만, 유태인을 싫어한 것으로 유명하죠. 실제로 유태인은 페스트와 같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바그너가 멘델스존의 작품을 지휘할 때는 꼭 장갑을 끼고 지휘봉을 들었다가 연주가 끝나자마자 장갑을 벗어버림으로써 자신의 유태인 혐오를 여과 없이 드러내곤 했던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런데 유대인 멘델스존과 유대인을 싫어했던 바그너, 물과 기름 같은 두 사람의 곡이 우리나라의 결혼식에서 늘 함께 연주되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입니다. 결혼식에서 신부 입장과 동시에 울려 퍼지는 음악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3막에 나오는 혼배합창곡입니다. 그리고 예식을 마친 신랑 신부가 희망찬 미래를 향해 행진할 때 연주되는 곡은, 멘델스존이 작곡한 ‘한여름 밤의 꿈’의 결혼식 장면에 나오는 음악이죠. 사실 멘델스존의 대표작인 <한여름 밤의 꿈>은 바로 이 결혼행진곡 때문에 우리에게 유명한 작품이 되어 있습니다. 1858년 영국 빅토리아 공주와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에서 연주된 이후 일반인의 결혼식에서 널리 연주되기 시작했다고 하는군요. 어쨌든 100여 년이 넘도록 앙숙 지간인 두 작곡가의 곡이 신랑 신부의 백년해로와 영원한 화합을 축하해 준다는 것도 참 대단한 인연입니다.
고전과 낭만의 절묘한 어울림을 실현했던 작곡가 멘델스존은 바흐로부터 시작된 우리 강좌에서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마태수난곡과 얽힌 멘델스존의 음악적 생애의 궤적에서 그는 역시 고전과 낭만을 절묘하게 연결하고 최고의 낭만적 순간으로 기억되는 우리의 결혼식 풍경에까지 절묘하게 들어와 있는 음악가라 하겠습니다.